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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st in Translation Sep 21. 2017

커리어를 갑자기 그만 둔 유명 발레리나의 또 다른 삶

앨리스 롭, 2016년 10월 18일, 엘르

원문: The Afterlife of a ballerina


더우면서 습기까지 가득했던 쿠바 아바나의 어느 토요일 밤, 국립 대극장(Gran Teatro)의 냉방 장치는 작동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오래된 공연장의 1,500석 모든 티켓은 발매된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전부 매진을 기록했다. 또한 수천 명의 일반 마니아들은 7월의 뜨거운 태양빛을 뒤로한 채 대극장 건물 주변으로 모여들며 공연을 스트리밍으로 중계해주는 대형 스크린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영국 로열발레단이 런던에서 공연할 때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물론 쿠바 내에서의 공연 티켓값은 싼 편이다. 관객들은 소풍 온 것처럼 짐을 가져왔고, 야외 분위기는 매우 시끌벅적했다. 이때가 2009년이었다. 해외 유명 발레단이 쿠바 아레나에서 공연을 한 것은 무려 30년 만에 처음이었다. 또한, 커리어의 정점을 찍고 있었던 알렉산드라 안사넬리(Alexandra Ansanelli)의 마지막 공연이기도 했다.


로열발레단은 안사넬리의 마지막 공연 작품으로 이반 세르게비치 투르게네프가 1855년에 발표한 극작을 각색한 [시골에서의 한 달(A Month in the Country)]을 선정했다. 주인공은 나탈리아인데, 그녀는 러시아 갑부이지만 지루한 생활을 하던 도중 자신의 아들의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나탈리아의 딸과 하녀도 역시 그 가정교사를 흠모한다. 미국인 관객들은 상식을 벗어날 정도의 해학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주인공인 안사넬리가 등장하자 분위기는 매우 진지해졌다.


쿠바 아바나의 국립 대극장

뉴욕시립발레단에서 8년, 로열발레단에서 3년 동안 활약한 알렉산드라 안사넬리는 무대 위에서 자유분방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그녀는 음악과 감정 속에 자신을 숨겼다. 발레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예술가에 보다 가까웠고, 매혹적인 발레리나로서 다소 시대착오적인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고전적인 미를 추구했다. 그날 아바나에서의 밤도 모든 것을 이끌어낸 안사넬리였다. 당시 그녀의 파트너였던 이반 푸트로프는 "자신의 마지막 공연인 듯이 발레를 했었습니다."라면서 "하지만 여타 공연도 그러했듯이,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끌어냈었어요."라고 답했다.


공연장 커튼이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자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숙였다.  88살이었던 쿠바 무용수 알리샤 알론소는 장미가 가득한 꽃다발을 그녀에게 증정했다. 관객들이 열렬히 환호하면 할수록 안사넬리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발레리나로서 자신의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 안사넬리


공연이 끝나자 알렉산드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을 했고, 몇몇 동료 무용수들과 함께 수영장에 갔다. 그날 밤에 그녀는 잠들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자 그녀는 비행기에 올랐고 미국 뉴욕으로 되돌아갔다.


로열발레단에서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예술감독으로 일을 했었고, 50년 넘게 이 단체에서만 주요 무용수들의 마지막 공연을 직접 목격한 모니카 메이슨은 알렉산드라의 은퇴 공연을 두고 "가장 감동스러운 광경 가운데 하나, 가장 감격스러운 광경 가운데 하나"라고 묘사한 바 있다. 하지만 그 공연은 알렉산드라 안사넬리가 무용계에서 급부상한 과정을 계속 봐왔던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혼란을 주기도 했다. "왜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발레리나가 갑자기 그만두려는 걸까?"라고 워싱턴포스트의 사라 카우프만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라 안사넬리같은 사람이..... 그녀가 은퇴를 한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기 어렵다."라는 도 유명 발레 블로그인 발레 백(Ballet Bag)에 올라왔다. 푸트로프도 "모든 사람들이 아마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라고 짤막히 답했다.


매년 수백만의 어린 소녀들이 발레학원의 문을 두드리며 수업을 듣는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아주 극소수의 소녀들만 훗날에 프로 발레리나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알렉산드라 안사넬리처럼 명예와 커리어를 밟는 사람은 더더욱 많지 않다. 왜냐하면 그녀처럼 "한 조직의 수석무용수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 긴 기간 동안 훈련에 임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로열발레단의 전직 수석무용수이자 지금은 코치로 활동하는 조나단 코프가 설명했다. 무용수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가능한 오랫동안" 널리 확장시키고 싶어 한다. 그런데 예술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희생한 사람이 갑자기 왜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떠났을까?


Flex 30 Times While Brushing Your Teeth


나는 실력이 뛰어난 어린 발레 무용수들을 위한 뉴욕의 아메리칸발레학교(School of American Ballet)와 좀 더 나이가 있는 무용수들의 상급학교인 뉴욕시립발레단(New York City Ballet)에서 3년 동안 소속된 바 있었다. 학교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나만의 또 다른 관심사나 흥밋거리를 제대로 계발하기 전까지 나는 발레를 계속했었다. 하지만 내가 발레를 그만둔 결정적인 시기는 발레리나로서의 야망이 좀처럼 확실하지 않다고 알게 해 준 사춘기 시절이었다. (내가 12살 때 아메리칸발레학교의 선생님들은 자질 부족이라는 이유로 나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나는 그 후에 몇 년 동안 뉴욕의 소형 연습실들을 전진하면서 견뎠지만, 그들이 옳다는 점을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누가 나에게 발레를 얼마나 많이 연습했는지 묻는다면, 나는 그때 매주 10~12시간 정도 훈련했다고 말하고자 한다. 특히 여름방학일 경우에는 매주 30시간 이상 연습에만 매진했었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훈련을 많이 한다고 해서 경력이 잘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내가 훗날에 위대한 발레리나로서 살겠다는 야망과는 거리가 먼 10대 학생이었지만, 발레는 하나의 종교처럼 나의 일상 모든 단면에 스며들었다. 양치를 할 때도 발레 발목 훈련인 포인과 플렉스를 왼발과 오른발 연달아 하며 30회를 반복하기도 했었다. 내가 책을 읽거나 TV를 볼 때에도 스트레칭을 꾸준히 병행했었다. 선생님 한 분은 나의 발 상태를 개선시키고자 걸을 때 발등에 힘을 강하게 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턴아웃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어디든 갈 때마다 오리처럼 양발을 바깥을 향해 내딛어야만 했다.


발레에 자질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일수록 훈련받는 강도가 점차 높아지고 개인 일상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들은 아메리칸발레학교의 수업뿐 아니라 개인 과외와 더불어 하계집중훈련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평범한 학교 수업은 자연스레 뒤처질 수밖에 없으므로 홈스쿨링을 받거나 예술학교에 들어가 수업을 듣는다. 좀 더 강도 높은 훈련에 임하게 되면 무용수의 가족은 감정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크나큰 희생에 직면하게 된다. 블로그 파이브썰티에잇(FiveThirtyEight)에 따르면 발레 무용수 한 명이 만 18세가 될 때까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훈련비, 뽀엥뜨 슈즈(point shoes) 구입비, 그리고 오디션 등록 비용까지 합쳐 약 12만 달러(1억 3천5백만 원)로 추산했다.


이러한 훈련 방식은 그저 여성들의 신체 모양을 특정하게 만드는 것뿐 아니라, 여러 악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들의 마음가짐도 변하게 만든다. 마야 랭스도르프의 저서인 [발레- 그런 다음에는?]에 따르면 현재 무용을 전공하는 여학생들 가운데 25% 이상이 섭식장애(eating-disorder)를 앓고 있다. 영국 BBC는 이와 비슷한 장애로 고통을 호소하는 발레 무용수들의 비율이 일반인보다 10배 높다는 점을 추정했다. 리어타드 복장을 입은 한 무리의 소녀들이 거울로 몰려 가 자신의 신체의 어느 부분을 잘라내고 싶은지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광경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오디션을 보던 도중 갑자기 정신을 잃은 한 어린 여성 무용수가 그날 내내 단식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 스스로가 깜짝 놀랐다는 것도 지금도 기억한다.


어린 아이들은 첫 번째 발레 수업에서 매트 바닥에 구르거나 나비가 된 것처럼 움직인다. 어린 소녀들에게 있어 발레리나가 되고픈 소망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 동화 속 공주가 되고픈 바람보다도 더욱 진지하게 바라보지도, 실현될 거라고 마음먹지도 않는다. 오직 극소수의 소녀들만이 엄청난 훈련이 뒤따르는 희생을 통해 훗날 결실을 맺을 뿐이다.


내가 들었던 발레 수업의 얘기를 하자면, 나는 9살 때 처음으로 발레를 배웠는데, 우리보다 언제나 우위에 있었던 또래 소녀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욱 감각적이었고, 예뻤으며, 기술적으로도 우월했다. 또한 그들은 지도 선생님의 이목을 자기한테만 집중시키고자 엄청난 경쟁을 했었고, 최고의 역할을 막상막하로 대등하게 해냈다. 내가 23살이었을 때 그들의 근황을 알게 되었는데, 한 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 단체에서 솔로이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부동산 중개업자로 일을 하고 있었다.


A Golden Future


알렉산드라 안사넬리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발레를 시작했다. 11살이었을 때 축구 훈련 대신 무용 수업을 선택했었을 뿐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곧바로 무용에 빠져들었다. "무용을 알게되자 저는 곧바로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죠."라고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인 2014년에 나에게 답했다. 우리는 그날 뉴욕 맨해튼에서 아침식사를 같이 하고 있었다.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완벽한 자기관리와, 어딘가 흠이 없을 정도의 날렵한 체형과 자세를 토대로 나는 알렉산드라가 아직도 자신을 유명한 스타라고 여긴다고 생각했었다.


알렉산드라의 부모님은 그녀를 아메리칸발레학교의 오디션이 열렸던 롱아일랜드까지 직접 바래다주면서도 괜히 헛된 희망 같은 것을 가지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거기에 수백 명의 어린 소녀들이 다리 찢기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는데요, 모두가 신체적으로 아름다웠어요. 저만 빼고요."라고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그때 제 별명은 '지티(Ziti, 파스타의 일종)'였는데, 그 이유는 축구 훈련이 끝날 때마다 지티로 가득한 도시락을 먹었기 때문이죠." 오디션이 끝난 후 그녀는 5학년 수업을 학교에서 듣는 평범한 소녀로 돌아갔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의 엄마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알렉산드라는 발레학교 입학 오디션에 합격했다.


큰 뜻을 품은 발레리나일수록 훈련을 갓난아기 시절 때부터 받는다. 하지만 알렉산드라에게 있어 발레 훈련은 '모든 것을 뒤에서 따라가는' 게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아메리칸발레학교에서 또래 친구들이 쁠리에(plies)나 탄듀(tendues) 동작을 연마할 때 그녀는 다리를 찢는 것부터 상대방과 함께 공을 차며 주고 받기, 잘못 쓰인 근육을 제대로 발달시키는 방식 등 매우 기초적인 훈련을 받았다. 아메리칸발레학교의 학생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척추측만증을 진단받았다. 그때 이후로 20대 후반까지 알렉산드라는 무용을 하지 않을 때면 허리 보조기를 꼭 착용했다.


12살이 되자 알렉산드라는 아메리칸발레학교의 수업에 보다 집중하고자 그때까지 다녔던 일반 학교를 그만두었다. "발레학교 수업이 열리기 전 아침 일찍 개인 연습실에서 훈련을 했고, 밤 늦게는 개인교습을 받으며 수업 내용을 복습했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프렌즈 아카데미(Friends Academy)를 자퇴한 후에 그녀는 스케줄 관리가 좀 더 용이한 맨해튼의 프로페셔널 칠드런 스쿨(Professional Children's School)에 다시 입학했다. 알렉산드라의 부모님도 롱아일랜드의 주택을 팔고 맨해튼으로 이주했다. 외과의사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도시에서 교외로 향하는, 1시간 30분 이상 걸리는 역방향 통근자가 되고 말았다.


알렉산드라 안사넬리에게 찾아온 첫 번째 크나큰 시련은 일련의 여러 심리적 고충이 있은 후에 찾아왔다. 15살이었을 때 그녀는 아메리칸발레학교에서 유급되었고, 결국 그해 연말에 열릴 예정이었던 워크샵에서도 당연히 배역을 받지 못한 채 누락되고 말았다. 이 워크샵은 발레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뉴욕시립발레단으로 진급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징검다리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그녀는 풀이 죽은 상태였다. "롱아일랜드의 어린 시절을 다 뒤로 하고, 그때 사귀었던 친구들도 다 포기하고 이곳으로 왔는데.."라고 말한 그녀는 이어서 "발레 때문에 제 어린 시절을 다 포기했다고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피터 마틴스가 옆에 있었다. 1989년부터 뉴욕시립발레단을 이끌었던 마틴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주목했고, 발레단 수업에 그녀를 초대했다. 암묵적인 오디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오디션을 통과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뉴욕시립발레단의 일원으로 제안을 받았다. 16세 생일이 다가오기 전에 알렉산드리아는 호두까기 인형의 이슬방울(Dewdrop) 역할을 맡아 데뷔했다. 보통 이 역할은 그녀보다 10살 정도 많은 나이의 숙련된 무용수들이 맡곤 했었다. 당시 이 공연을 본 뉴욕타임스의 안나 키셀고프는 알렉산드리아 안사넬리를 "독창성과 미묘한 차이를 제대로 살릴 줄 아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무용수"라고 묘사했으며 "진정한 발레 신동"이라고 평가했다. 무용 비평가인 클라이브 반스도 그녀가 앞으로 장밋빛 가득한 미래를 맞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스의 예견대로 알렉산드리아는 얼마 정도 그런 장밋빛 나날들을 보냈다. 그녀는 시립발레단의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의 레퍼토리를 터득했다. 마틴스가 그녀의 주도적인 역할 수행을 위해 따로 안무를 만들 정도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알렉산드리아는 솔로이스트로 성장했고, 동료들보다 훨씬 나은 성과를 거두며 수석무용수로 발돋움했다. 발레단원들의 승급 현황을 볼 때, 수석무용수라는 역할은 오직 소수의 무용수들이 특정 단체에서 몇 년 정도는 활약을 해야 얻게 되는 자리이며, 대부분 이런 직함을 얻지 못한 채 은퇴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적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는 어떠한 표명을 하지 않은 채 뉴욕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와 관련된 소문들이 파다했다. 마틴스과 약간의 불화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이에 대해서 그녀는 비합리적인 처사는 결코 없었고, 마틴스가 아버지 뻘이기는 하지만 그와의 유대관계는 지금도 견고히 남아 있다고 답했다. 뉴욕시립발레단에서 나왔지만 지엽적으로나마 그녀의 위치는 발레계에서 확고했다. 스위스 로잔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그녀는 게스트로 무대에 섰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특별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 달 안 되어서 알렉산드라는 영국 런던의 로열발레단에 들어갔다.


2006년 [잠자는 숲속의 공주] 공연에서 라일락 페어리를 맡은 안사넬리


알렉산드리아의 커리어 그래프는 여기서 급격히 꺾였다. 그녀는 수석무용수가 아닌 솔로이스트의 역할에 순응했다. 이는 뉴욕시립발레단에서의 위치보다 한 단계 아래였다. "완전히 다른 승급체계였죠."라고 그녀는 말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분장실을 동료들과 함께 썼다. 스피드를 강조하고, 전통적인 손과 발 위치에 변형을 가하는 미국식 발레를 대표한 무용수였지만, 런던에서는 보다 엄격한 형태의 테크닉을 그녀는 재차 배워야만 했다.


하지만 1년 도 안 되어 그녀는 한 단계 위로 승급했다. 회의주의가 가득했던 영국 무용 평론가들로부터 압승을 거두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가 로열발레단에 합류한 직후 영국의 가디언 소속 한 무용 담당 기자는 그녀의 파트너가 "무모한" 움직임을 하는 데도 제대로 관여하지 못했다면서 비난의 칼날을 겨눴지만, 그로부터 약 3년 후에는 "모든 사소한 실수까지도 자발적으로나마 그녀의 스타일에 우아한 흔적으로 덧붙여졌다."라면서 알렉산드리아의 위기관리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무대 위의 그녀는 엄청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라고 로열발레단의 모니카 메이슨이 답했다. 알렉산드리아만의 고유한 극적 움직임은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력 가득한 광경을 선사해 준다. "그녀가 출연을 하려고 할 때마다 주변에서는 엄청난 기대가 보입니다."라고 과거에 수석무용수를 역임한 조나단 코프가 말했다. "당신은 그녀를 보고자 좌석의 맨 끝에 걸터앉게 됩니다."라고 덧붙여 말했다.



나도 어린 시절에 뉴욕시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단역이었던 나는 매일 밤마다 아주 짧은 시간만 무대로 나갔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 내내 대기 무대에서 공연 전체를 지켜보곤 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화면이 거친 백스테이지 모니터를 바라보거나, 아니면 공연장의 빈 좌석이 왕왕 있을 경우, 그곳에 앉아서 공연의 나머지 부분인 2막을 내려다봤다. 3년 동안 나는 이러한 행동을 무려 60번 이상이나 했던 것 같다. 주연을 밭은 발레리나 수십 명을 지켜봤다. 하지만 알렉산드라가 슈가플럼 페어리나 이슬방울 역할을 맡아 무대 위에서 움직였을 때 나는 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면서 발레에서는 어떤 것이든지 간에 가능하다고 깨달았고, 그녀의 기쁨을 토대로 발레도 역시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칸발레학교 학생들은 성인 공연이 열리는 날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선배 무용수들을 위한 응원의 메시지를 노트에다 적어 무대출입구 근처 안내데스크 위에 남겨두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메모에는 일정한 양식이 존재했는데, 이를테면 "이슬방울을 연기하는 선배님을 보는 게 정말로 좋아요."라든가, 아니면 "선배님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슈가플럼 페어리이세요."라는 구절 따위었다. 그러면서 말미에 선배님들의 사인이 들어간 오래된 토슈즈를 혹시 받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어린 소녀들의 부탁과 요청에도 묵묵부답인 발레 단원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발레 유망주들 사이에서 평판에 크나큰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는 너그러운 사람들에 속했다. "앨리스에게, 당신의 모든 꿈이 꼭 이뤄지길 바랄게요!" 그녀는 자신의 오래된 토슈즈 가운데 한 켤레에다 이 구절을 쓴 후 2002년 크리스마스가 되기 이틀 전에 나에게 선물로 줬다. 그때 내 방 한쪽 벽에는 나의 어린 시절 대부분이 표현된 에드가 드가의 발레 수업(La classe de danse) 그림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나는 그 옆에 알렉산드리아의 토슈즈를 함께 걸어 놓았다. 하지만 발레를 그만둔 이후로 나는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떼어낸 다음 버렸다.


My Life Was a Three-Block Radius


1970년대에 눈이 움푹 들어간 얼굴로 알려졌던 젤시 커클런드는 조지 발렌신의 마지막 여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자 발레 신동으로 업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완벽주의 추구에 대한 강박관념과 스스로 자해하는 습관 때문에 커리어를 망치고 말았다. 커클런드의 자서전인 [내 무덤 옆에서 추는 춤(Dancing on My Grave)]에서 오랜 기간 동안 폭식증 때문에 고통스러운 생활을, 그리고 코카인과 암페타민 중독에 힘들었던 삶을 자세하게 서술했다. 발레리나의 체형을 장기간 유지하고픈 욕망 때문에 그녀는 성형수술을 수차례 했었다. 코 성형뿐 아니라 귓불도 인위적으로 축소했다. 무대 위에서 보이는 실루엣을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고자 발목 주변에 실리콘을 주입하기도 했었다. 이런 젤시 커클런드를 알렉산드리아는 우상으로 우러러봤다.


젤시 커클런드

 

뉴욕시립발레단에 입단했을 때 알렉산드리아는 자신만의 예술적 능력과 헌신을 통해 좀 더 성장하는 발레리나로 성장했다. 리허설을 위한 공연장 연습실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때도 그녀는 스스로 외부 연습실을 빌려 훈련에 임했다. 결코 대여 비용이 적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또한 그녀는 예술 도서관에 들러서 우상인 커클랜드를 비롯한 여타 다른 발레리나들의 공연 영상물을 시청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공연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연습실에 홀로 남기도 했다. "방 안에 홀로 앉아서 방금 마친 공연을 다시 복기했죠."라고 그녀가 말했다. "공연의 모든 과정과 모든 순간을 머릿속에서 떠올렸어요." 공연이 끝난 다음날도 "여전히 똑같았다"라고 한다. 수업에 들어가고 만약 필요하다면 저녁에 홀로 리허설을 했다. 그녀는 매 순간 근육의 피로감을 맛봤을 것이다.


무용수들은 일반적으로 단체 내에서 동료들과 우정을 다진다. 특히 오랫동안 군무를 연습하게 되면 심리적 압박감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솔로이스트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런 단계를 건너뛰었고, 로열발레단에 녹아드는 과정에서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는 아주 뛰어난 무용수였어요. 그래서 고립되는 면이 없지는 않았죠."라고 한때 동료 수석무용수로서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분장실을 공유했었던 로렌 커스버트슨이 답했다. "물론 알렉산드리아는 항상 아름다웠고 매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좁은 상자에 갇힌 개구리가 날뛰는 것처럼 발레에 완전히 미쳐있었고요." "당신이 예술에 전적으로 매달려야 할 때는, 우리 업계에서 수석무용수가 될 때죠."라고 메이슨이 설명했다. "그렇게 되면 사생활은 엄청나게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친구들과의 우정이나 기타 다른 요소는 후순위로 밀려나게 됩니다. 알렉산드라는 철저하게 예술에만 신경을 썼었죠."


발레 세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여정은 "다른 사람들이 쉽사리 따라 하기 어려운 정도의 고난"이었다고 한다. "한 명이라도 제대로 친교를 맺은 적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 자신을 중요하게 여겼거든요." 물론 그녀의 발레단 동료들이 집이나 파티로 초대를 한 적은 여러 있었지만, 알렉산드리아는 발레에만 모든 관심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참여가 어려웠다. "제 인생은 세 블록 반경 이내에서만 유지되었죠."라고 그녀가 말했다. 영국에서 4년을 살았던 그녀는 "공연장과 아파트 바깥 주변을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라고 한다.


로열 발레단 공연이 끝난 후 집에 전화를 거는 안사넬리


알렉산드리아 안사넬리가 무용계에서 승승장구를 하고 있었지만, 누구나 찾아오는 인생의 획기적인 시가는 이상하게도 그녀를 빗나갔다. 대미언 워젤(Damian Woetzel), 벵자멩 밀피예(Benjamin Millepied, 지금은 배우 나탈리 포트먼의 남편) 같은 유명 발레리노의 아름다운 상대역으로 분장해 연기도 했었다. 검은 머리, 도자기 같은 피부, 커다란 눈망울 등 그녀의 미모는 인기를 끄는 데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28세가 될 때까지 그녀는 애인을 사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저는 실로 다양한 사람들을 좋아했었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성숙하지 않았고, 그런 사람들과 비교해서 매우 어린 편이기도 했었죠. 무엇보다도 저는 제가 굉장히 어리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알렉산드리아가 좋아하는 무용 연습과정은 "한 명의 남성과 함께 호흡을 맞춰"나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제 말은, 제 사생활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거죠." 그녀는 자신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대미언 워젤과 파드되(pas de deux)를 연습하던 도중 첫 키스를 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때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다면서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첫 키스를 하는 때보다는 훨씬 나이가 든 시점이었다고 생각했다. "저는 그쪽에서 느린 편이었죠."


발레의 주된 줄거리는 멜로드라마와 고귀한 희생이다. 지젤은 이별로 인한 상심으로 죽게 되고,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는 마법사의 저주 때문에 눈물로 가득한 호수에서 맴돌 뿐이다. 자신의 커리어의 마지막을 향해 달리던 알렉산드라는 자신이 영화 [분홍신, The Red Shoes]의 주인공인 어린 발레리나 빅토리아와 어딘가 닮아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저만의 발레 업계의 커리어와 외부 세계 사이에서 좌절감을 느꼈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작곡가와 예술감독. 두 명의 남자들 사이에서 좌절스러운 느낌을 받았던 빅토리아는 결국 자신의 몸을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기차 앞에 내던지며 생을 마감한다.


$5 a Day and a Sense of Emptiness


무용수들은 은퇴 이후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데 있어 능숙하지 않다는 점으로 악명이 높다. 현업에서 완전히 은퇴할 나이를 낮게 잡는 편이고(이들의 은퇴 나이는 평균적으로 34세다), 금전적 수입을 생각 이상으로 많이 잡는 편이다. 그리고 자신의 경력을 끝낸다고 판단하는 원인을 그릇되게 판단한다. 2004년에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무용수들 가운데 1/3 이상이 은퇴의 주된 원인을 부상으로 여겼고, 오직 5%만이 새로운 삶을 추구하고자 은퇴할 거라고 말했다. 이 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무용수들의 3%만이 은퇴 후에 강사나 선생님으로 일을 계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무려 53%가 여러 이유로 무용을 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2004년도 설문조사를 진행한 한 작가는 이에 대해서 "우리는 극도로 광범위한 훈련이 꼭 필요한, 문화적 헌신을 다함으로써 존경을 받아 마땅한 직종에 대해 무지한 편이기 때문에 돈을 가능하면 적게 지불하려고 한다."라고 쓴 바 있다. 유독 많은 수입을 받는 해가 따로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 내에서 무용수들의 평균적인 연수입은 3만 5천 달러(3,900만 원)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무용을 제외한 일반 노동자들의 연봉에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한 발레 스타라고 하더라도 더 많이 벌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 바깥 세계에 자신을 좀 더 적합하게 만들려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한다. 에드워드 빌렐라는 1950~60년대 뉴욕시립발레단을 대표하는 발레리노였다. 30대 때 자신의 신체적 한계로 인해서 무용계를 떠난 빌렐라는 그 후로 미국의 4명의 대통령이 연달아 일하는 동안까지 계속 활동을 했다. 다만, 일주일에 5달러 정도 받았을 뿐이었다.


에드워드 빌렐라


한 명의 무용수에게 있어 은퇴라는 것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 그 이상의 시사점을 의미한다. 자신의 정체성뿐 아니라, 심지어 존재론적 가치까지 한꺼번에 잃게 되는 촉매제나 다를 바 없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은퇴한 무용수들 가운데 16%는 이른바 "공허감(sense of emptiness)"이 극복하기 가장 힘든 감정이라고 답했다. 몇몇은 아예 무용을 그만두면서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거나, 아니면 극장에서 기술 스태프로 일하는 것을 원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무용계 선배들이 밟았던 길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런던의 로열발레단 전신이었던 빅웰스발레단에서 프리마로 활동했었고 영국의 왕립무용학원 원장을 지냈던 마고트 폰테인은 파나마의 한 목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 지인들은 그녀의 길고 긴 40년 발레 인생이 담긴 유품을 그저 몇 점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마고트 폰테인


"저는 그런 이야기가 끊임없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봤습니다."라고 알렉산드라 안사넬리의 옛날 파트너였던 푸트로프가 대답했다. 커리어의 종착점은 "갑자기 찾아오기 마련이며, 무용수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올해 36살인 푸트로프는 여전히 무용을 하고 있지만, 예술공연 제작이라는 새로운 직함으로 두 번째 커리어를 쌓아나가고자 지금 심혈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당신이 무용수라면 연습실에서 훈련과 연습으로 하루의 시간 대부분을 보내게 될 겁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런 궤적이 당신의 삶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해 봐요. 비극이에요. 공백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독일인 기자인 마야 랭스도르프는 한때 무용수로 활약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자신의 발레 커리어를 끝내야만 했다. 2006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에서 랭스도르프는 27명의 전직 무용수들을 인터뷰하면서 생계 수단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삶의 끈을 계속 유지하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무용 이후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일종의 금기에 가깝다"라는 구절을 삽입했다. 무용 이후의 삶에 관련된 주제는 암묵적으로 논의가 안 되는 편이다. 무용계처럼 일반인들이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매우 배타적인 세계를 떠난다는 것은 그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에서도 여러 선택사항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는 어쩌면 무용계에서 억척스럽게나마 계속 남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일종의 모욕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랭스도르프는 은퇴 이후 우울 증세를 앓고 있거나 삶의 목적을 잃은 전직 무용수들의 일화를 들려준다. "솔로 발레 커리어의 끝은 안내데스크의 책상이거나 아니면 매표소에 앉게 되는 의자로 나타난다. 아니면, 좀 더 비극적인 결과로써 알코올 중독이나 자살로도 나타난다."라고 그녀는 서술했다. "일련의 연구에서는 약물 중독이나 자살 및 자해 시도율이 월등히 높게 나타난다는 점도 있다" 랭스도르프의 저서에서 인터뷰 당시 21세였던 전직 발레리나인 소피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찢어진 인대 때문에 자신의 발레 경력을 끝낼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서 5일 동안 병원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했다고 전한다. "단순하게 저는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고, 그저 어떻게 되든 지 간에 죽을 거라고만 생각했어요."라고 소피는 랭스도르프에게 얘기했다. "저는 발레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또 다른 여성인 23살의 베로니카는 랭스도르프와 인터뷰를 할 때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졸업장이나 그 어떤 직업을 가질 여건도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 기실, 이 젊은 여성은 인생을 통한 예술적 헌신보다 심각한 발 부상과 장기간 찾아오는 식욕 부진에 허덕이고 있을 뿐이다. "무용수가 되고자 저는 예전부터 계속 도전했었어요."라고 베로니카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희망이 사라졌고, 제가 왜 도전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도전을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Two Bodies


알렉산드라 안사넬리가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면 더욱 나은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부상만 적절히 피한다면 수석 직위에 오른 무용수들은 동료들보다 훨씬 긴 커리어를 장기간 구축할 수 있다. 뉴욕시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인 웬디 윌란은 40대 중반까지도 무용을 했다. 그녀의 동료인 다르시 크리스틀러는 46세에 은퇴했다. 하지만 그들과 다르게 알렉산드라는 부상도 없고, 꽤 젊으면서도 커리어의 정점을 찍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간 자신이 소홀히 했던 실제 삶의 영역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타진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병원에서 근무하는 안사넬리


현재 알렉산드라는 뉴욕의 웨스트 어퍼 사이드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롱아일랜드에 있는 아버지의 병원에서 직원으로 소속되어 있다. 그녀는 운영 및 커뮤니케이션 책임자로 일을 한다. 사무실에 들어서면 그녀의 과거 인생을 암시하는 아주 삭막한 대형 사진 액자가 알렉산드라를 반겨 준다. 로열발레단 시절에 찍은 사진으로써 계단 위에서 핑크색 튀튀(tutu)를 입은 채 토슈즈를 앞에 내미는 그녀가 액자 안에 있다. 매우 로맨틱한 사진이다. 그녀의 두 눈은 점잖게 아래를 향하고 있으며, 얼굴은 발레 공연을 할 때처럼 꽤 짙은 화장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채, 귀에는 진주 귀걸이가 달려 있다. 긴 줄기가 유독 돋보이는 분홍과 빨간 장미가 계단 주변에 흩어져 있다. 이 커다란 사진 때문에 아버지 진료를 대기하는 사람들의 공간 한쪽 벽이 대부분 잠식되었다. 병원에 찾아오는 어떤 환자는 이 때문에 청록색의 수술실 보조 복장을 입은 우아하고 매우 아름다운 여성과 저 사진 속의 영화배우 같은 아름다움을 때로는 연관 짓기도 한다.



알렉산드라가 뉴욕으로 되돌아갔을 때 매일 발레 수업을 들으면서 다시 무용계로 복귀하고픈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그녀는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양과목 수강을 신청했다. 그녀는 지난 7년 동안 컬럼비아에서 이런 수업들을 종종 들었다. 그리고 뉴욕타임스의 한 기자에게 경영학을 공부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은 그녀에게 뒤늦게 찾아온 청소년기가 아닐까 싶다. 맛있는 음식, 발톱 관리, 자유시간 등등 발레리나로서 한때 절대로 피해야 했던 여러 삶의 요소를 이제는 즐기고 있다. "만약 당신이 우리에서 벗어나게 되었더라면, 아마도 '이것을 먹어 봐야지', '이것을 한번 해 봐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한 그녀였다. 이제는 체중이 좀 늘어났기 때문에 그녀는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는 것을 막 시작했다.



아버지의 일에 좀 더 집중하면서 그녀는 마치 인생의 새로운 방향으로 자신의 몸이 당겨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빈센트 안사넬리는 레이저로 유방암을 치료하는 기술을 가진 몇 안 되는 의사 가운데 한 명이다. 전신마취를 하지 않거나 대형병원에 입원하지 않더라도 수술이 가능한 의료 기술이다. 알렉산드라는 아버지의 수술실에 들어가서 자신의 역할을 맡고 있는데, 수술이 보다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보조를 담당하거나 환자를 관리한다. 그녀는 "무용을 완전히 그만둔 이후로 제가 인생에서 실제로 관여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발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버지의 업무에 좀 더 집중한 이후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여기에도 존재한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 일을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사회에 대해 심각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요."라고 답했다. 발레리나 커리어를 쌓을 무렵에 알렉산드라가 경험했던 세계와 비교해 본다면, 작금의 "실제 세계(real world)"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답답하게 느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그때 저는 항상 어디론가 가고 있었죠. 그래서 기다림에는 익숙하지가 않아요."


뉴욕 컬럼비아 대학 수업에서


35세가 된 알렉산드리아는 사람들 대다수가 아주 어릴 때부터 "너는 모든 일을 제대로 하고자 노력하지만 아마도 그렇게 하지는 못할 거야"라는 생각을 강제로 주입받은 채 성장한다고 최근에 깨달았다. 사무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녀이지만, 자신을 '오피스 레이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구두로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크나큰 도전이었다. "제가 얼마나 내성적인 사람이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어요. 조용하게, 그리고 신체로만 감정을 피력하는 것에 익숙했나 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많은 자신의 또래 동료들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발레 경력 때문에 촉발된 (인생의) 제약을 확실히 인식했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활기차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알렉산드리아에게 개인적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묻자, 그녀는 "변화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어요."라고 짤막히 말했다. 물론 일반 동료들이 10대와 20대 초반에 겪었을 여러 사회적 단계들을 지금 그녀가 따라잡기에는 무리가 있다. "저는 매 순간 무엇인가를 배운다고 생각해요.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말이죠." 알렉산드리아는 새롭게 만나는 지인들이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 약간의 불안감을 느낀다. 잘 나가는 발레리나가 갑자기 커리어를 그만두었던 방식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라고 답한 그녀는 "아마도 그녀는 뭔가 정신 병력을 앓았던 게 아니었을까?"라면서 그들의 의구심을 스스로 상상해봤다.


2016년의 알렉산드리아 안사넬리


그녀는 지금 매우 진지한 관계를 꿈꾼다. 자매 두 명 모두가 결혼한 유부녀이기 때문이다. 소셜데이팅 앱인 틴더(Tinder)에 가입했고, 최근에는 채팅앱인 범블(Bumble)에도 계정을 만들었다. 여러 명확한 이유로 인해 개인의 모든 삶의 발자취를 기록해야 하는 그런 앱들을 알렉산드리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는 스포트라이트와 극적인 순간들이 가득했던 지난날의 삶을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을까? "실생활에서는 충분할 정도의 화려함 같은 것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면서 그녀는 화려함이 "당신의 인생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렉산드리아 안사넬리는 과거에 맡았던 주요 주인공들을 최근에 상기하면서 얻게 된 감정적인 원숙함을 계속 이어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저는 그때 초조했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현재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당신이 진실로 어떤 것을 사랑한다면, 덜 초조해질 거예요." 지금도 알렉산드리아는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제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네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면 저는 지금까지 계속 일을 해왔을 테니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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