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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st in Translation Nov 10. 2017

한 여성의 눈물겨운 미국 취업기

링 림, 2017년 8월 11일, 미디엄 비 유어셀프

원문: How I came to America as a traveler, changed my career, and built a life


거의 비슷한 내용의 메일을 이틀에 한 번씩 받습니다. 저에게 연락을 한 사람들에게 계속 답변을 주기보다는 차라리 여기에 저의 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제 글은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1. 건축(어떤 전공이든지 간에 상관없음)에서 UX 디자인(역시 어떤 분야이든지 상관없음)으로 이직을 하려는 사람들. 추가: 이미 저는 좋은 UX 디자이너가 되는 법에 대해 글을 따로 쓴 적이 있습니다.


2. 미국 시민이 아니지만, 미국에서 직업을 가지거나 합법적으로 거주하고 싶은 사람.


3. 현재 불행하면서도 미지의 세계에 거대한 도약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글의 주된 목적입니다.


제 글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1. 어려운 일을 피하고 싶은 사람.


이 글은 전적으로 제 사례입니다. 당신에게 저의 사례가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기실, 당신의 사례는 달라질 거라고 거의 확신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토대로 저는 당신의 여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의 이야기는 2013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싱가포르에 살고 있었는데, 직장을 다니면서도 불행한 기분이 들었다. 먼 훗날에 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유명 건축가가 될 거라고 나 자신과 약속한 적이 있었지만, 그런 순진무구한 꿈은 직장생활을 하고 나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무려 10년 동안 마음속에 품은 꿈이 있다면,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 버틸 테고, 불행한 기분이 들더라도 앞을 향해 계속 나아갈 것이다. 당신의 친구와 가족이 계속 "너는 8년 동안 학교에서 건축만 공부했잖아!"라고 변죽을 울리는 게 귀에 들려도 말이다.


Planning my US trip


나의 경우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기로 마음먹을 때까지 2년이나 걸렸다. 싱가포르에 계속 남으면 지금과 꽤 비슷하게, 편안한 동시에 아주 가끔씩 영감을 받는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면 더욱 불행해질 수도, 아니면 더욱 행복해질 수가 있다. 행복이라는 행운이 나에게 깃드기를 무작정 염원하면서 나는 직장에 사표를 냈고, 곧바로 뉴욕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때 나에게는 돈도, 일정표 따위 같은 게 없었다. 심지어, 미국에 사는 친구나 친척도 없었다. 싱가포르를 떠나기 전날 밤에 앞으로 어떤 상황이 나에게 닥쳐올지 기대가 되기도,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나의 가족과 친구들은 싱가포르에 남아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내가 홀로 미지의 세계에 돌아다닐 거라는 예상에 염려를 나타냈고, 그러한 행동이 자신들의 문화와 이질적이라는 판단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내가 고향을 떠나는 것에만 미쳐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완전히 미쳐갈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나는 뉴욕까지 가는 데 24시간이나 걸리는 한 비행기 안에서 일기를 적으며 이 구절을 집어넣었다.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인생이 지금과는 확연히 달라질 거라고 알 뿐."


그 이후의 2개월은 나쁜 일, 좋은 일 상관없이 새로운 경험의 회오리바람과 다를 바 없었다. 돈이 별로 없던 나는 미국 전역을 카우치 여행(couch-surfed)으로 다녔고, 주를 통과할 때마다는 음습한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하는 값싼 버스로 이동을 했다. 이 모든 것을 나는 스스로 했다. 미국 초반의 2개월 내내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얻은 나는 뉴욕과 시카고, 라스베이거스, 로스앤젤레스, 샌디이에고, 하와의 오아후 섬, 카우아이 섬을 거쳐 마침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늘 그렇다. 정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다.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확실히 믿는 미신이 하나 있다. 만약 당신이 하늘의 축복을 좇으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당신이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이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간에 당신은 하늘의 축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하나 열어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하늘의 축복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겁니다."
- 조셉 캠벨(Joseph Cambell)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여행하는 내내 각기 다른 소파, 방바닥, 에어 매트리스에 자느라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그날 밤에도 나는 에어 매트리스에서 잠을 청했다. 왜 이렇게 잠을 잘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 하기가 솔직히 어렵지만, 하여튼 그렇게 잤다. 2개월 동안 카우치 여행을 한 나는 결국 다음날에 여행객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고야 말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커리어의 변화를 생각하면 할수록,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나의 무기고(arsenal)에 새로운 경험이 잔뜩 쌓이게 되면서 작금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동시에 불확실한 미래를 적극 수용할 무궁무진한 능력을 갖추었다. 창의성을 요구하는 일자리에 나는 수백 가지의 레쥬메를 보냈다.(참고: 내가 '수백'이라고 말할 때는, 내 글이 연설문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시라) 그래픽 디자인, UX 디자인, 건축 디자인, 조경 디자인 등 분야는 가리지 않았다. 솔직히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는 잘 몰랐다. 그저 내가 생각했던 것은, 싱가포르의 집으로 돌아가면 내 인생은 쓰레기처럼 될 거라고, 다시는 외국으로 나갈 기회가 없을 거라고 예상했던 게 다였다. 나는 새롭고 더 나은 삶을 꿈꾸기 위해 미국에 온 것이다. 그 누구도 나를 멈추지 못했다.


레쥬메 수백 장을 보냈건만, 답변은 거절, 아니면 무응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레쥬메를 계속 보냈고, 사람들과 계속 대화를 주고받았고, 도움을 계속 요청했다. 나 같은 외국인에게 있어 이런 상황은 매우 험난한 도전이고, 무(zero)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특히 미국 이민정책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나의 여정이 매우 어려워질 거라고 내다봤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 지 4개월 만에, 천신만고 끝에 뭔가 획기적인 변환이 나타났다. 온라인에 3D 가상공간을 재현하는 스타트업 한 군데서 나의 건축학적 배경에 흥미가 생겨서 나에게 연락을 준 것이었다. 나는 공간 계획(spatial planning)을 레버리지해서 실제 상품을 보다 나은 수준으로 이끄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아주 약소한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그들은 나는 수습 직원으로 데려갈 수 있다는 데 흥미를 느꼈다.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서 디자이너로 첫 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정말로 기묘했다. 나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단 인턴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는 J-1 트레이니(인턴, 연수생) 비자를 받을 생각에 짜릿함을 느꼈다. 이 비자야말로 내가 싱가포르에서 나 자신에게 약속했던, 더 너은 삶을 살아가는 과정의 시작이면서 미국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전문적으로 구축하는 첫 삽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직무를 배워나갔고, 시간이 나면 온라인 강좌를 통해 공부를 했으며, 업계 사람들과 계속 교류를 했고, SNS 계정을 만들었다. 나는 수많은 타인들과 방 하나를 공유하며 지새웠던 밤의 나날들에 작별을 고하면서, 샌프란시스코의 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Keys to my first apartment


외국인 직원이 전문직 취업비자인 H1-B를 받도록 도와주는 일이 스타트업 고용주 입장에서는 매우 중차대한 일이다. 계획은 완벽했다. 하지만 비자 발급 체계가 엉망이었다. 작금의 체계에서 H1-B를 받는다는 것은 복권 당첨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매년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인기 높은 이 비자를 발급받는다. 그리고 당첨 확률은 수학이 아니라 운이다. 나는 운이 좋지 않았다.


비자 발급 결과가 안 좋게 나오자 나는 주저앉았다. 미국에 거주하고자 나는 그동안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인생을 살지 않았던가. 나는 그 후로 몇 주 동안 길거리를 배회하면서 주변을 그저 찬찬히 살펴봤다. 내 인생을 위해서 성실하게 일을 했지만, 결국 그것이 나 자신을 오히려 깍아내린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것만큼 달곰씁쓸한 일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전혀 없다고 단정지었다.


결국 내 운명이라고 단념하면서 싱가포르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한 어느 날 밤에 나는 처음으로 우버 풀(Uber pool)을 탑승했다. 차 안에는 나 말고 다른 손님도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싱가포르에서 공부를 했다는 이력을 아주 우연히 알게 되었다. 마치 나처럼 말이다!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 사람에게 내가 처한 어려움을 넌지시 알렸다. 그 사람의 이름은 스리람(Sriram). 스리람은 나에게 자신이 O-1A 비자를 받았고, 엄청난 업적과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니, 나에게 한번 제대로 준비를 해보라고 권했다.


나는 스리람이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스포티파이(Spotify)의 동남아시아 시장을 관리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O-1A 비자에 해당되는 사람이라고 확실히 인지했다. 그와 나는 달랐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약간의 웃음을 보인 채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그렇게 엄청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먹고살기 위한 방편으로 나온 말이었다.


그날 밤, 나는 O-1A 비자 발급에 대한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두 번째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렸기 때문이다. 앞을 향해 무조건 돌진하는 선택이 있는데, 이는 나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주변 환경이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선택인데, 싱가포르로 다시 돌아가서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지만, 그리 재미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날이 밝아오자 나는 스리람에게 연락했다. 그는 나에게 조언을 해줄 거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먼저, 나는 이 비자를 획득하는 지원자가 되기 위해 실로 다양한 기준을 통과할 만한 나만의 이력과 성취들을 밤낮없이 모았다. 


만약 이 상황에서 아주 중요한 마음가짐을 하나 꼽으라면, 그건 바로 이거다. "너 자신을 믿어야 한다(you just have to believe in yourself)."


확실히 그래야 한다. 건축과 관련된 과거 이력을 열심히 발굴하고 있었을 때 나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수상 실적도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와 관련된 수상은 5차례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아니면 팀의 구성원으로 상을 타기도 했다. 나는 이 경력을 기억하지 못했다. 왜냐면 나는 나 자신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글을 썼고, 곧바로 출판 작업에 돌입했다. 또한 나는 강의 이벤트를 기획했다. 강연을 했고, 스타트업 창업가들에게 조언을 했으며, 동료 디자이너들에게도 좋은 얘기를 해주었다. 정말로 좆같은 긴장감의 향연이었다.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강연을 할 때 긴장했다. 내 첫 글이 출판되었을 때도 긴장했다. 팟캐스트에 출연해서 인터뷰를 처음으로 할 때도 긴장했다. 처음으로 학생에게 디자인을 알려줄 때도 긴장되어서 미칠 뻔했다.


그들이 나를 통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들이 만약 내가 사기꾼이라고 얘기한다면? 내가 충분히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진실로 엄청나게 뛰어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만약에 내가.....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했다. 솔직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다. 하지만 존 웨스튼버그(Jon Westenberg)가 잘 표현했듯이, "당신이 고군분투를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이 무엇을 알고 일을 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된다."


내 수중에 돈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비자 발급 지원서를 스스로 작성할 수밖에 없었고, 최종 검토를 위해서 변호사 한 명을 고용했다. 작업이 마무리되자 나는 높이만 하더라도 무려 6인치(15.24cm)나 되는 신청 서류 뭉치를 보냈다.


원래 나는 성취 따위가 있는지 회의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1)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 대회에서 8차례나 수상을 했었고, 2) 관련 분야에서 명망 있는 전문가들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한 학회 구성원으로 8가지의 이력을 획득했고, 3) 14가지의 전문적인 논문을 써서 대중에게 공개했으며, 4) 두 번이나 대규모 콘퍼런스에서 주요 강연 연사 리스트에 포함된 사람으로 거듭났다.


나의 두꺼운 비자 신청서를 보니 감정이 갑자기 휘몰아쳤다. 울고 싶은 나머지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약 2주 동안 내 손바닥은 매번 땀에 젖었고, 가슴은 계속 두근거렸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온라인 웹사이트에 접속해 나의 신청번호를 입력하고 엔터키를 눌렀다. 그럴 때마다 화면에서는 "신청 완료"라는 구절이 나왔고, 더 이상의 업데이트는 서술되지 않았다.


나는 계속 똑같은 행동을 했다. 웹사이트에 접속할 때마다 똑같은 화면 글귀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287번이나 시도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마침내 "비자 승인"이라는 글귀를 모니터에서 두 눈으로 목격했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은 집이라고 여기는 이곳 미국에서 계속 지내려고 나는 말 그대로 커리어의 정점에 섰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뛰어난 인물이라고 깨달은 일종의 발견이었다.


그로부터 내 인생은 몇 번의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내가 일했던 스타트업은 결국 자금난에 빠졌다. 현재 내가 일을 하는 회사(과거 야후라고 불렸던 오스 <Oath>이다)도 예전에 인수가 되어서 대량 해고가 벌어진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비자가 없었던 나를 포함한 몇몇은 실제로 이런 해고 사태에서 직장은 잃는 게 아닌, 삶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처지에 놓였다. 우리의 집, 우리의 친구들, 집에서 5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피트니스 센터, 바리스타가 내 이름을 외웠고, 개에 친화적인 환경을 구축한 나의 카페, 내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음료 주문까지 다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그간 열심히 쌓았던 인생의 탑이 무너질 위기에 본의 아니게 직면한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운이 좋게도 O-1A 비자보다 2단계나 좋은 것을 받을 수가 있었다. 지금 나는 영주권 신청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비자를 받았지만, 영주권까지 얻지 못한다면, 내 안의 평화를 100% 유지할 수 없다. 그간 경험에서 내가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앞으로도 내 삶을 위협할 여러 요소가 랜덤으로 다시 나타날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몇 번이나!) 다시 싸워야 한다면, 이제는 어떻게 주먹을 적재적소에 날려야 하는지를 알 것 같다. 이 글을 쭉 읽은 사람이라면 나에게는 마법과 같은 지름길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오늘날의 위치에 서기까지 나는 정말로 좃뺑이를 쳤다(I busted my ass off to get to where I am today). 그리고 나의 경험 덕택에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고 고마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My favorite spot in San Francisco - it always reminds me of how far I've come


그로부터 약 4년이 지난 지금, 샌프란시스코의 전체적인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에 서 있을 때마다, 그간 내가 겪었던 개인적인 난관과 고생에서 진실된 아름다움을 기억하곤 한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이었는지를 깨닫는다. 


당신이 30살이나 되었는데도 방바닥 요에서 잠을 자는 것은 최악의 결과가 아닙니다. 가장 최악이 뭔지 아세요? 몇 가지 이유로 결혼을 했지만, 킹 사이즈의 침대에 누워 여전히 사랑하지 않는 부인을 옆에 두고 잠을 청합니다. 그러면서 자식들이 생기고, 그리 좋아하지 않는 데도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최악의 사례입니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그냥 요에서 홀로 잠을 청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꿈을 좇는 데 리스크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정을 추구하는 삶에서 엄청난 리스크가 생기는 겁니다.
- 빌 허 (Bill H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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