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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st in Translation Jan 29. 2016

Interview: Cameron Mackintosh

John Gapper, Jan 15, 2016, FT.com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뮤지컬 '캣츠'와 '미스 사이공'의 프로듀서는 재창조의 대가(master)이다. 지난 50년간 그는 위험 요소가 가득한 뮤지컬 비즈니스를 10억 파운드의 현금 인출기로 바꿔놓았다.


1965년 리오넬 바트(Lionel Bart)가 만든 뮤지컬 [올리버(Oliver)]의 투어 제작 파트에서 카메론 맥킨토시는 무대 매니저를 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또한 그는 이 작품에서 사환(pot boy)으로 출연하기도 했었다. 그의 저택에 인접한 벽에 붙여있는 포스터에는 [올리버]에 출연한 배우가 '카메론은 뭐든지 완수하는 성격의 인물'이라고 휘갈기며 쓴 글씨를 볼 수가 있다. 넓은 정원 구석에 있는 헛간에는 그가 만든 뮤지컬 작품들의 무대 의상과 소품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가 뮤지컬계에서 쌓은 기억 남을 만한 추억들의 아카이브 형태로 존재해 있다. 


우리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나 [미스 사이공(Miss Saigon)}, 혹은 유수의 다른 작품들에 사용된 배우 의상들이 있는 선반을 지나치면서 소도구들만 따로 모은 박스들을 내려다 보았다. 코끼리, 독수리, [미스 사이공]의 카딜락, 사이공 맥주의 빈병들이 쌓여 있다. 지금도 작품이 상연될 시 이것 대다수를 사용한다. 공연이 완전히 끝나면 잠시 보관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맥킨토시의 마음가짐과 경제적 논리가 합쳐진, 일종의 결과물일 것이다. 맥킨토시는 저장 공간을 따로 빌려 공연의 흔적들을 보관했다. 몇몇 의상은 그런데 축축하다. 


작품 [올리버]에서의 무대 매니저 역할은 매우 어린 맥킨토시의 생명을 앗아갈 뻔 했다. 영국 사우스시(southsea)의 킹스 극장에서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그의 오른팔이 무대 배경 설치물에 꽉 끼여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무대 장치가 가동되자 그는 공중으로 들어올려졌고 떨어지면서 석제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그가 무대 관리자가 아닌 프로듀서로 활동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1977년 [올리버]가 재상연을 하자 그는 공연 수익의 절반을 챙겼다. 이 계약은 그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다 주었다. 또한 그의 손길이 거친 다른 작품들이 연달아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수백만 파운드가 그의 주머니로 들어가 버렸다. 


[올리버]가 다시 상연되면서, 물론 맥킨토시는 그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이름이 바느질로 새겨진 사환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는 전체적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고 영국 웨스트 엔드(West End)와 미국 브로드웨이(Broadway)에서 수차례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68년에는 [올리버]가 영화화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는 매년 마다 상업 공연 극단, 아마추어 공연자들, 그리고 예술학교로부터 [올리버]와 관련된 저작권 비용을 거두어들인다. 또한 다른 3개의 히트작품인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그리고 [메리 포핀스(Mary Poppins)]도 마찬가지다. [올리버]는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진행 중이다.


웨스트 엔드나 브로드웨이나 그 누구도 맥킨토시 만큼 프랜차이즈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다. 다만 여기에 예외가 있긴 하는데, 바로 맥킨토시의 오랜 파트너이자 라이벌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가까울 때도 있고 서로 죽이지 못해 억울한 때도 있다. 맥킨토시는 초창기 시절에 주로 다른 사람들이 만든 뮤지컬 작품에 참여했다. 미국 작사가인 앨런 제이 러너(Alan Jay Lerner)는 맥킨토시의 이름이 들어간 공연을 호평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무슨 호평인지 아세요? 잘 모르시죠?"라고 말한 러너는 장난스럽게 "모든 기를 다 빨아들이는 성공이에요."라고 말했다.


[캣츠(Cats)],  [레미제라블] 그리고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 맥킨토시와 웨버는 공연 엔터테인먼트(theatrical entertainment)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했다. 뮤지컬 상연 하나만으로는 사람들의 기를 다 빨아들이기는 어려웠다. 1981년 이래로 뮤지컬 [캣츠]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맥킨토시는 재창조의 대가로 성장했고 일반 대중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의 프랜차이즈 작품들을 몇 십년 동안 성공리에 상연할 수 있었다. 작품에 대한 그의 확고한 지배력은 또 다른 뮤지컬이 상연될 때마다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최근 영국의 웨스트 엔드에 있는 공연장들이 가지는 성공 스토리를 맥킨토시가 일정 부분 만들어준 것이에요. 그의 뮤지컬 작품들은 전 세계로부터 인기와 수익을 거두어들이고 있고요. 또한 영국인의 재능과 상상력이 세계에 통할 수 있다는 것의 확실한 증표이기도 해요." 'Creative Industries Federation'의 최고경영자인 존 카프너는 "매킨토시는 성실하면서도 매번 뭔가에 열정적이죠. 그는 성공으로 가는 모든 요인들을 다루길 원해요."라고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그가 지구촌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라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웨스트 엔드에서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로버트 팍스는 "매킨토시는 역동적이고 자부심이 꽤 강하며 정력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특성이 그로 하여금 보다 생산적인 활동을 하게 만들죠. 물론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특성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매킨토시는 처리해야 할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고 주변 사람들이 그 기준을 따르는 걸 좋아합니다. 이것 때문에 그를 언제나 좋게 바라보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주변의 시기와 비난이 그를 귀찮게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에게 있어 부단한 친절함과 지원 능력이 있지만 동시에 매우 대하기 어려운 일종의 터프함도 내재해 있거든요."라고 덧붙였다.


현장에서 50년 동안 일을 한 뒤, 매킨토시는 현재 뮤지컬계의 개입을 줄이고 있다 하지만 왕성한 에너지는 좀처럼 식을 줄 모른다. 'Cameron Mackintosh Limited'의 수장인 그는 지난해만 약 1천 3백만 파운드(223억 원)을 배당금으로 받았다. 그는 이런 수익 배분 과정의 모든 면을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밑에서 수년간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에게 헌신적이다. 때때로 그가 부리는 예상하지 못한 변덕에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카메론이 무엇을 결정할지 예상하기가 매우 어려워요."라고 한 동료가 답했다. 물론 그 동료는 맥킨토시의 열렬한 지지자다.


올해 그는 70세의 생일을 맞는다. [올리버]에 나오는 노래에 등장하는 파긴(Fagin)과 똑같은 나이다. 만족감을 느끼는 매킨토시는 현재의 상황을 재검토한다. [레미제라블]이 성공에 이르면서 영국 서머셋 지역의 한 수도원을 구입해 저택으로 개조한 'Stavordale Priory'에서 팔걸이의자에 걸터 앉으며 앞으로 다가올 자신의 생일에 대해 얘기를 꺼내 놓는다. 그는 "시간이 다가왔네요. 70세라.... 당신이 늙으면 매우 싸늘한 느낌을 받을 겁니다. 내가 죽든 아니면 계속 살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거든요."라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잠시 멈추더니 이윽고 노래 가사를 읊는다.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돈이야. 그래도 그동안 모아뒀으니...'


매킨토시가 만약 자신의 일을 몹시 좋아하지 않는다면 돈은 그나마 위안거리가 될 것이다. 제작이라는 것은 꽤 위험한 직업이다. 작품이 흥행하기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젊은 세대의 입맛에 맞추는 것에 실패해서 공연 프로듀서들 대다수가 자금난에 허덕이거나 사업규모를 어쩔 수 없이 축소한다. 돈과 연관지어서 말을 한다면, 캐머론 매킨토시는 웨스트 엔드에서 제일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로이드 웨버의 부하(knight)라고 여겨지긴 하지만 자산은 그보다 훨씬 많다. 작년 선데이 타임즈가 공개한 이들의 자산 규모에 따르면 매킨토시는 10억 파운드(1조 7천억원)인 반면, 웨버는 6억 5천만 파운드(1조 1천억원)이다. 


이것은 아마도 프로듀서로서의 매킨토시의 전성기가 저물고 있다는 점의 보상이나 다름 없을 게다. 다만 완전히 그의 활동은 저물지 않는다. 그는 혹자가 제기하는 염려를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호사가들은 저에게 '또 다른 일을 시작할 건가요?'라고 물어요. 하지만 그 질문은 틀렸답니다. 그들은 정말로 저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라면서 그는 두 팔을 흔든다. "한번 보세요. 첫째, 저는 그간 원작들을 뮤지컬로 재창조해서 크나큰 성공을 일궈냈습니다. 둘째, 새로운 뮤지컬 작업을 완료했어요." 매킨토시가 '새로운'이라는 개념을 인용한 건 논리적이다. 올해 영국 치체스터에서 뮤지컬 [하프 어 식스펜스(Half a Sixpence)]를 상연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소설가 HG 웰스의 작품인 '킵스(kipps)'를 원작으로 해서 지난 1963년에 초연되었는데, 이번에는 미국 PBS의 [다운타운 애비(Downtown Abbey)]에서 대본을 담당했던 줄리안 펠로우즈가 작사가로 참여했다. 


매킨토시가 직접 참여한 마지막 작품은 [메리 포핀스]이다. 1994년 원작자인 소설가 파멜라 트래버스(Pamela Travers)로부터 판권을 구입했고, 2004년에 대중에 공개했다.  또한 16세기 프랑스 소작농의 일생을 다룬 뮤지컬 [마틴 기어(Martin Guerre)]는 프랑스 듀오인 클로드 미쉘 쉔베르그(Claude-Michel Schonberg)와 알랑 부빌(Alain Boublil)이 담당했는데, 이들은 [레미제라블]과 [미스 사이공]에서 같이 활약한 바 있다. [마틴 기어]는 상연 후 2년 동안 투어를 했고 1998년에 휴식기에 돌입했다. 허먼 멜빌의 소설을 이야기로 만들어 여학교를 무대로 한 [모비 딕(Moby Dick)]은 1993년에 대중에 공개되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히트를 친 뮤지컬 [어베뉴 큐(Avenue Q)]를 수입해서 런던에 다시 공개할 예정이고, 내년 2017년에 미국의 건국 아버지인 알렉산더 해밀턴을 주인공으로 한 힙합 뮤지컬 [해밀턴(Hamilton)]을 여기 런던서 초연할 계획이다.


작사가나 작곡가가 아닌 매킨토시이기 때문에 그는 온전히 뮤지컬 작품을 만들지 못한다. 이것은 로이드 웨버와는 다른 양상이다. 웨버 역시 펠로우즈의 원작과 영화의 힘을 빌려 뮤지컬 [스쿨 오브 락(school of rock)]을 완성해 브로드웨이에 내놓았다. ("앤드류는 구식 뮤지컬을 만들었어요.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볼 때 바뀐 것이 하나도 없네요. 그저 재미난 밤을 관객에게 선사할 뿐이죠"라고 맥킨토시는 아주 능글맞게 평을 했다.) 매킨토시는 자신이 하고픈, 혹은 계속 발전시켜나가고픈 아이디어를 위해 다른 영역의 사람들과 협업을 자주 한다.


다른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협업을 한다는 일은 좌절감이 들기도 불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끝에 가서는 매우 유용할 수도 있다. 장기간 인기를 끄는 뮤지컬이 소수인 것도, 또한 그 작품의 가치가 계속 지속되는 것이 어려운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매킨토시가 소유한 극장에서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리차드 존스턴은 "[레미제라블]은 약 30년 전에 초연되었지만 지금도 객석 점유율이 90%가 넘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뮤지컬 작품들의 수명 주기를 누가 도대체 알 수나 있을까요?"라고 자문했다.


카메론 맥킨토시는 1946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부인 이안(Ian)은 앵글로 스코트족의 후손으로 목재 상인이었고 친모인 다이애나는 전직 비서 출신으로 몰타, 이탈리아, 프랑스의 피가 섞였다. "저는 그저 '무'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 전쟁이 끝난 상황이었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매우 화목한 과정에서 자란 저는 '프라이어 파크 콜레지(Prior Park College)'라는 공립학교에 다녔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저는 그리 부족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은행 예금 따위는 없었죠. 그래서 주위로부터 10파운드, 20파운드를 계속 빌려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의 맥킨토시가 뮤지컬과 같은 공연 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그의 숙모들이었다. 그들은 소년 매킨토시를 데리고 웨스트 엔드의 [샐러드 데이즈(Salad Days)]를 보여주었다. "공연장에 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공연을 본 저는 곧바로 거기에 꽂혀버렸죠. 하루는 제 생일날 엄마와 숙모들이 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샐러드 데이즈]를 다시 보러 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매킨토시는 곧바로 업계에 들어간다. 1960년대에 그는 무대 조감독으로 일을 하는 동시에 자체 소규모 뮤지컬을 제작하는 것으로 밑바닥에서 나름대로 효과적인 시간을 보냈다. 그는 1976년에 뮤지컬 [사이드 바이 사이드(Side by Side)], 1977년에는 [올리버(Oliver!)]를 제작했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오클라호마(Oklahoma!)] 투어를 담당했고, 영국 전역에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를 순회공연 했다.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뮤지컬과 관련된 명성이 높아졌는데도 불구하고 매킨토시는 1980년, 그가 43세가 될 때까지 월세 25파운드 짜라의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랑 만나 시인 T.S. 엘리엇(T.S. Eliot)의 글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 작품을 담당할 작곡가 섭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저와 웨버는 동년배에요. 나이가 비슷하죠. 그때 저희가 만났던 곳은 '세빌 클럽'이었는데 점심이 너무나 형편 없었죠. 저희는 저녁 오후 5시인가, 아니 6시때 쯤에 쫓겨나온 것 마냥 나왔어요. 그래서 웨버의 아파트에 들러서 이야기를 계속 나눴습니다. 엘리엇의 작품인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를 읽고 난 뒤 영감을 받은 음악을 웨버가 소개해 주고 직접 연주도 해주었죠. 저는 음악을 들으면서 '아, 뭔가 있구나.'라고 느꼈답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자신이 직접 작곡한 작품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로 인해 이미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1971년에 이 작품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역시 그의 작품인 [에비타(Evita)]는 그로부터 약 7년 후인 1978년에 초연되었다. [에비타]의 대사와 작사는 팀 라이스(Tim Rice)가 담당했다. 두 작품이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뮤지컬 [캣츠(Cats)]의 제작 속도는 느렸다. 맥킨토시는 연출가인 트레버 넌(Trevor Nunn)에 찾아가 작품 참여를 끈질기게 부탁했다. (매킨토시와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넌은 그에게 '더 이상 당신을 피할 변명거리가 나에게는 다 떨어졌네요.'라고 말했다.) 돈도 역시 문제였다. 웨버는 두 번째로 자신의 주택을 담보로 해서 대출을 받아 45만 파운드(7억)을 제작비로 충당했다. 매킨토시 역시 파이낸셜 타임즈에 광고를 하면서 투자자들에게 작품의 특색과 강점에 대해 어필을 했다.


"영국 사람들이 뮤지컬을 만든다고 하면 꽤 비웃음 살 만한 행동입니다. 더더욱 댄스 뮤지컬이라고 하면 미친놈 소리를 듣고 말죠. 왜냐면 그것은 미국인들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매킨토시는 회고한다. 뮤지컬 [코러스 라인(A Chorus Line)]이 1975년에 브로드웨이서 초연되었던 것과는 달리 영국의 웨스트 엔드 뮤지컬은 음악과 연극이 함께 한다는 성향이 있었고 오직 소수의 선택 받은 배우들만이 노래와 춤을 배울 환경이었다. 매우 어렸을 때의 주디 덴치(Judi Dench)가 [캣츠]의 그리자벨라 역할로 잠깐 활동을 하려고 했었으나 리허설 때 힘줄이 끊어져 다른 배우인 엘레인 페이지(Elaine Paige)로 교체된 적도 있었다. 매킨토시와 웨버는 프리뷰가 있기 직전까지 사고를 수습하느랴 진땀을 뺐다.


그 다음은 뮤지컬 마니아라면 잘 아고 있는 사실들도 이어진다. [캣츠]가 웨스트 엔드는 물론 브로드웨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또한 초연 당시 투자를 했던 사람들 240명도 21년이 지난 후 당시 금액의 무려 60배인 수익을 거두었고 그 금액만 하더라도 2600만 파운드(461억 원)에 다다른다. "투자를 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자주 '쇼 비즈니에서 돈을 줘서는 안 돼. 매우 위험하거든.'라는 말을 자주 들었대요. 요즘에는 사람들이 우체국 적금까지 빼서 공연에 투자하려고 해요. 저는 '그렇게는 하지 마.'라고 말을 합니다만 그들은 '우리는 앤드류 웨버랑 트레버 넌을 믿거든.'라고 응수합니다." 1985년 [레미제라블]에 약 60만 파운드(10억 원)을 투자한 68명의 다양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총 814억원의 수익을 가져갔다. 무려 78배나 차익을 거둔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엄청난 돈을 벌고 있다.


[캣츠]는 그저 히트를 친 것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뮤지컬의 형식을 단번에 깨트린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잘 생기고 한 미모 하는 미국인들이 대거 출연하지 않으면서도 소위 '어메리칸 드림'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많은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웨버랑 매킨토시는 결과론적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번역되어 상연될 수 있는 공연을 만들어낸 셈이다. 일반적인 뮤지컬 관례나 형식을 따르지 않았던 [캣츠]이기 때문에 부가적인 이익도 가져갈 수 있었다. 영국과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의 공연장에서 자체적으로 라이센스 [캣츠]를 상연하는 것보다 아예 오리지널 프로덕션과 배우들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말이죠. 제가 [캣츠] 대본을 그쪽에다 보내고 저작권 관련 비용 3천 파운드(519만원)을 받으면 작품과 관련되어 전체적인 큰 그림만 조언해 주었죠. 그러면 그들은 자체적으로 [캣츠]를 공연했고요. 하지만 지금은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노르웨이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캣츠] 뮤지컬을 올리고 싶대요. 다만 영국의 오리지널팀을 보내달라는 조건에 한해서요." 이런 양상은 매킨토시만의 차별점(hallmark)을 극대화한다. 뉴욕이나 런던에서 상연되는 뮤지컬 공연은 중국 베이징이나 미국 밀워키에서 올리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캣츠]가 물꼬를 틀었다면 [오페라의 유령(Phantom of the Opera)], [레미제라블], 그리고 [미스 사이공]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지닌다.


매킨토시의 작품들이 보란듯이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자 미국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결과물이 포착되었다. 영화 전용으로 지었던 건물을 뮤지컬 공연장으로 개조하는 사례가 많아졌던 것이다. 


"[레미제라블]을 만들 당시 저는 '사람들이 대본을 충분히 숙지하지 않거나 사운드와 조명이 여기 런던과 동등하지 않다면 나는 이것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무대위에 올리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죠. 이것은 저만의 커다란 유산이자 현재의 공연 원칙과도 비슷합니다. 현실에서도 합리적이에요. 왜냐하면 조잡하고 복잡한 일처리보다는 간단하지만 중요한 원칙이 실상에서도 오래 지속 가능하고 더욱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매킨토시는 자체적으로 새로운 프로덕션을 조직해 과거 올렸던 작품들을 재해석 하면서 관객들에게 공개한다. 그는 2020년까지 상연 할 공연과 그에 따른 구체적인 세부사항이 적힌 스프레드시트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앞으로 [레미제라블] 공연이 6~7차례, [오페라의 유령]은 3차례, [캣츠]는 2차례 정도, 그리고 [미스 사이공]은 4차례나 남아 있네요. 아, 약 2주 전에 한국과 호주 브리즈번에서 [레미제라블]이 공연되었고 일본에서는 [미스 사이공]이 관객들을 불러 모았죠. [메리 포핀스]는 영국에서, 그리고 [오페라의 유령]은 최근에 미국에서 상연되었고요. 저는 또한 2편의 영화를 제작하려고 해요. [올리버]와 [미스 사이공]을 영화화하고자 합니다."


[레미제라블]의 영화화에 성공을 거두고 오스카 상을 무려 3가지 부문에서 수상했던 매킨토시이지만 여전히 미국 할리우드보다는 영국 웨스트 엔드를 더욱 선호한다. "최근에 깨달은 것인데요, 영화에는 단점이 있어요. 박스오피스에서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산을 하면 저에게 남는 건 별로 없어요. 스스로 5년치의 활동을 가지고 정산해볼 수밖에 없죠. 만약 공연장에서 거둔 수익 100만 파운드와(17억) 영화에서 거둔 수익 1000만 파운드(172억)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냐고 묻는다면, 저는 당연히 전자에요. 제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 공연에서 더욱 많거든요."


뮤지컬을 제작하면서 매킨토시는 종종 특히 소수의 사람들이 그의 비즈니스를 간단하게 치부하거나 예술(공연)의 가치를 폄하할 때마다 좌절감을 느낀다고 한다. 뮤지컬은 예술 장르 가운데 제작하는 데 있어 매우 많은 돈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상위 랭킹에 있는 대규모 뮤지컬 작품들은 보통 한 주당 15만 파운드(2억원)에서 25만 파운드(4억 3천만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공연에서 나오는 수익은 공연장, 프로듀서, 작가, 그리고 투자자들이 나눠서 가져간다. 하지만 (영화 제작과는 달리) 뮤지컬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수익을 거둘 수 있다.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영화 [아바타(Avatar)]는 지금까지 다 합쳐 29억 파운드(3조 5천억원)를 벌었다. 하지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지금까지 약 60억 파운드(7조 2천억원)를 수익으로 거두었는데, 이는 [아바타]의 약 2배 정도 되는 수치다. [레미제라블]은 지금까지 55억 파운드(6조 6천억원)을 거두었다.


"물론 많은 돈을 벌었지만 돈이 다가 아닙니다."라고 'Cameron Mackintosh Limited'에서 관리책임자로 일을 하는 닉 앨롯이 말했다. "영국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비즈니스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현재 정부무역대사로서도 일을 하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나라의 공연 규모가 정말로 얼마인지 모르십니까? 국립극장에서 [워 호스(war horse)]가 올라가고 있고, 여기 웨스트 엔드에서 [마틸다(Matilda)]나 [한꺼번에 두 주인을(One man, Two Guvnors)]를 볼 수도 있어요. 또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 작품이나 우리 작품도 볼 수가 있다고요. 장기간에 걸친 우리들만의 엄청난 사회 공헌이라 볼 수 있어요."


매킨토시의 뮤지컬 제작은 그가 차린 회사 'Cameron Mackintosh Limited'의 3가지 주요 업무 중 하나일 뿐이다. 참고로 지난 해에 이 회사는 1억3천9백만 파운드(2390억원)의 총매출을 기록했는데, 세전이익만 하더라도 2천7백만 파운드(476억원)에 육박한다. "매킨토시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끊임없이 현장에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어떤 한 가지를 배웠다면 다른 영역에서 그것을 합쳐 시너지가 만들어지도록 유도하죠."라고 나이맥스 시어터 그룹(Nimax Theatre Group)의 사장인 니카 번스가 말했다. 현재 매킨토시는 뮤지컬을 만드는 프로듀서의 역할보다는 공연장을 관리하고 작품의 저작권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와 프린스 에드워드(Prince Edward) 극장을 대신 관리하는 것으로 매킨토시는 다른 영역에서도 특출 난 능력을 보였다. 그는 1991년 퍼스트 레져(First Leisure)를 운영하는 버나드 델폰트(Bernard Delfont)의 요청으로 이들 극장을 대신 책임지고 있는데 리모델링에 따른 권리 수익을 약 절반 정도 챙기고 있고 아예 소유권까지 가질 수 있도록 계속 지분을 넓혀가고 있다. 그는 이밖에도 길구드 극장(Gielgud), 퀸즈(Queen's)와 윈덤(Wyndham's) 극장 및 여타 8개의 크고 작은 공연장까지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앨럿은 "우리는 자주 사람들로부터 '이 극장을 사고 싶어요?', 혹은 '누가 이런 곳을 소유하고 싶을까?'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러던 도중에 매킨토시는 최고를 선별할 줄 알고 구입까지 끝내고 맙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제작자와 극장 소유자 사이의 알력 같은 것이 생긴다. 소유주 입장에서는 가능하면 대관을 길게 하고 싶어하고 제작자는 가능하면 대관을 짧게 하고 싶어 한다. "공연장을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과거에는 해본 적이 없답니다. 하지만 제 라이벌들은 저와 비슷하게 말을 하지만 굳이 당연시 그걸 고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언제나 생각하죠."라고 매킨토시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몇 개의 공연장을 소유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고 4500만 파운드(776억원)을 리모델링에 투자 하면서 전 세계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관객들을 불러모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영국에서 공연장 소유와 관리에 있어 제일 큰 기업은 앰버서더 시어터 그룹(Ambassador Theatre Group)이다. 이 회사는 1992년에 창립되었고 미국의 미디어 전문 투자기업인 프로비던스 에쿼티(Providence Equity)가 대주주로 있다. 매킨토시는 이 회사에 대해 그리 상관하지 않는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에요. 런던의 프로듀서 대다수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고요. 이런 회사들은 위험하고 그리 건전하지 않는 이유가, 수익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투자자들을 위한 맞춤형 비즈니스만 하려는 경향이 높기 때문입니다. 수익을 거두기 위해 상품(공연)을 쥐어짜낼 시 끔찍한 상황에 직면할 수가 있지요."


공연장 외부와 내부의 리모델링에 들어간 막대한 비용은 매킨토시 자산에 그리 충격을 주지 않는다. 그는 최근에 거의 소유권에 근접한 'Delfont Mackintosh'라는 회사를 가지고 있는데, 지난해 총매출은 4천4백만 파운드(757억원), 세전이익은 1천4백만 파운드(244억)를 기록했다. 마진이 꽤 괜찮은 편이다. 아니, 영국의 웨스트 엔드에 전체적인 활기가 느껴진다. 티켓 가격의 상승에 따른 위험이 예상되었지만, 2014년에 총 입장관객의 수는 1천4백만 명으로 전년도에 비해 1%가 상승했다. 공연 입장 가격은 평균적으로 42파운드(7만 2천원)으로 올랐지만 공연 수익은 전년도보다 6.5%가 올라 6억2천만 파운드(1조 726억원)으로 기록되었다. 


뮤지컬 제작, 공연장 관리에 이어 매킨토시의 주요 3가지 업무 가운데 나머지 하나는 450개의 크고 작은 뮤지컬의 2차 저작권 소유이다. 물론 이들 작품의 1차적인 소유권자는 따로 있긴 하다. 1952년 [아가씨와 건달들(Guys and Dolls)]에서 작사 작곡까지 담당한 프랭크 로서(Frank Loesser)가 직접 창립한, 뉴욕에 본사가 있는 'Music Theatre International'의 주식을 대거 매입하며 소유권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매킨토시다. 보다 정확히 설명을 하자면, 현재 그는 이 회사의 주식을 75%나 구입했고 내년 쯤이면 모든 비즈니스를 소유 및 지휘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매킨토시가 전 세계적으로 또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저작권법에 따르면 뮤지컬이나 연극을 상연할 시 라이센스가 필요한데 'Music Theatre International' 산하에 지역 극단부터 학교 예술 동아리까지 7만 개의 크고 작은 관련 조직들이 있고, 매년 2만 5천개의 여러 공연이 진행된다. 예를 들면 미국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뮤지컬 [헤어스프레이(Hairspray)]나 [애니(Annie)] 등 다양한 작품을 상연하고 싶다면 'Music Theatre International'에 750달러(90만원)에서 1000달러(120만원)을 저작권료로 줘야 한다. 이것은 미국 전역의 모든 고등학교가 따라야 할 법적 조항이다. 이 저작권료는 회사가 15%를, 나머지는 작가와 작곡가에게 돌아가고, 혹은 그들의 자산에 투입되기도 한다.


이론적으로는 학교나 아마추어 극단이 유명 뮤지컬 작품을 따로 무대에 올리면서 악보를 따로 구입하거나 저작권료를 피하는 방법으로 법적 조항을 교묘하게 빠져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소셜 미디어 때문에, 공연을 만들거나 연습을 할 때 배우 및 스태프들이 현장 사진을 바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기 때문에 그만큼 적발될 확률도 매우 높다. 'Music Theatre International'의 드류 코헨 회장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이것을 사적으로 사용하거나 몰래 도둑질 할 수가 없도록 만들었습니다."라면서 "물론 노래를 듣고 싶다면 혼자서 조용히 다운로드할 수는 있지만, 제가 제일 아름답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인데, 다시 말해 저희가 관리하는 공연 작품은 타인이 청중으로 대거 필요하다는 조건이 있으니까요."


결론적으로 'Music Theatre International'은 거대한 현금자동지급기(Cash Machine)이 되고야 말았다. 예를 들어 보자. 브로드웨이에서 더 이상 상연되지 않는 뮤지컬 [리틀 숍 오브 호러스(Little Shop of Horrors)]라고 있는데, 매년 미국 전역에서 여러 규모로 상연되고 있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 매킨토시는 2천2백만 파운드(387억 원)이라는 저작권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러한 현금 흐름은 인기만 끌면 장기간 상연이 가능한 뮤지컬이라는 특성과 더불어 사후 70년 동안 저작권을 유지하게 만들어 준 미국 저작권법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는 기간 이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점진적으로 맥킨토시는 자신의 비즈니스 방향을 위험요소가 많은 뮤지컬 제작에서 공연장 관리로, 이제는 작품 저작권 수익 창출로 바꿔나가고 있다. 대중이 보다 새로운 인물을 갈구하면서 자신의 위치가 낮아지거나 영향력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그는 자기 자신만의 보호 방법을 수립했다. 코헨은 "매킨토시는 극장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때마다 알아차릴 뿐이죠. 뮤지컬 제작보다는 라이센스 관리를 주요 업무로 처리하는 것은 마치 그의 노후 연금을 제대로 설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카메론주의(Cameronism)입니다."라고 리처드 존스턴이 말했다. 우리는 길구드의 원형 관객석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지금 이곳에서는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The Curious Incidnet of the Dog in the Night-Time)]이 상연되고 있다. 그는 좌석 가운데 몇 개를 가르키면서 매킨토시가 리모델링을 지휘할 때 복도를 가능하면 줄이고 그만큼 좌석을 채운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그의 업그레이드, 개발, 향상, 재정립, 자산으로부터 수익 창출에 있어 완벽한 예시이기도 했다.


매킨토시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특성은 모든 것에 관해서 그가 결정을 내린다는 점이다. "하루는 어떤 회의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거기서 두루마리 휴지 케이스에 대해 약 30분 동안 일장연설을 하더군요."라고 존스턴이 계속 말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중요합니다. 엄청난 호기심을 지닌 그이기 때문에 회의실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컵받침을 유심히 보면서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그의 비즈니스는 베드포드 광장(Bedford Square)에 위치한 그루지아 풍의 두 개의 건물에서 이루어진다. 이곳에는 총 45명의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다. "구멍가게에서 제 인생이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셀프리지스(Selfridges, 영국의 고급 명품 백화점)급 규모로 키워나갔어요. 제 주변에는 많은 수의 친구들이 있답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이곳에는 경험이 매우 많은 베테랑들이 즐비하고 있다. 매킨토시와 무려 35년 동안 협업을 한 올해 61세인 닉 앨롯은 [캣츠]가 초연되었을 때부터 함께 했었다. 앨롯 말고도 다른 직원들도 보통 20년 넘게 매킨토시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엄청 큰 규모의 비즈니스를 하는 소규모 집단"이라고 앨롯이 말했다. 


현재 매킨토시의 후계자는 공식적으로 없는 상황이다. 그는 소머셋에서 마이클 르 포에 트렌치(Michael Le Poer Trench)와 함께 살고 있다. 트렌치는 프랑스 출신의 사진작가로서 오랜 기간 매킨토시와 같이 작업을 한 남성이다. 이 둘 사이에서 자식은 없다. 매킨토시의 두 명의 조카딸이 있기는 하다. 그들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매킨토시는 유산을 상속하거나 일을 물려 줄 계획이 전혀 없다고 한다. 친척이라고 해서 혜택을 베풀고 싶지 않다고 덧붙여 말했다. 또한 그는 자기가 만약 사망할 시 자신의 재단을 통해 재산을 헌납할 예정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회사 내 직원들이 자신의 위치에 오르지 말 것과 둘째는 자신이 해왔던 사업을 회사가 대신 하는 것이다.


매킨토시는 이에 대해서 "나의 꿈을 이뤄가는 것 이상으로 나는 크나큰 성공을 일궈냈습니다. 제가 만든 재단에도 엄청난 돈이 들어가겠죠. 하지만 절대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서는 안 될 겁니다. 그 누구도 제가 만든 업적에 손 대서는 안 되고요, 제가 제작한 작품을 새롭게 각색해서도 안 됩니다. 공동 프로듀서의 역할까지 허용 가능하면서도 저를 대체할 사람을 빨리 섭외해야겠죠. 저에게 있어 혁신은 우리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나온다고 봅니다. 혁신에 관해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환상적인 예가 있는데, 바로 그것은 저의 어머니에요. 올해 97세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예리한 통찰력으로 저에게 말씀을 해 주시죠."


올해 70세인 매킨토시이지만, 어렸을 적 뮤지컬 [샐러드 데이즈]를 보고 난 이후 만족이라는 것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베드포드 광장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는 [올리버]에 출연한 배우가 선물을 한 기념 사발이 하나 놓여져 있다. 이 사발은 [올리버]에서 주인공이 구빈원에서 귀리죽을 더 먹고 싶어 "제발, 주인님. 조금만 더 주세요!"라고 외칠 때 사용되었다. 올리버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카메론 맥킨토시 역시 더 많은 것을 원했고 끝에 가서 결국 얻었다. 


원문 - Interview: Cameron Mackinto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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