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포스터, 2005년 케년 컬리지 졸업식 연설
원문 : This is water David Foster Wallace 2005 Kenyon College Commecement Speech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결을 헤살지으며 헤엄쳐 가다 마침 반대편에서 오던 늙은 물고기를 만난다. 그 늙은 물고기는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안녕, 아이들아. 물은 어떠냐?” 어린 물고기들은 대꾸하지 않고 나아가다가, 그중 한 마리가 다른 물고기에게 이렇게 묻는다. “물? 그게 도대체 뭐지?”
아니, 미리 지레짐작하지 마시라. 내가 지혜로운 늙은 물고기이고 이제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는 너희들에게 물이 뭔지를 알려주려는 게 아니니까. 난 지혜로운 늙은 물고기가 아닌 까닭이다. 이 물고기 얘기의 핵심은 이렇다. 가장 빤한 것. 어디에나 있는 것.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현실’ 내지 ‘실체’야말로 가장 보기 어렵고, 그에 대해 얘기하는 것마저 어려운 주제라는 것이다. 이렇게 문장으로 엮어놓고 보면, 물론 극히 상투적인 얘기다. 그렇지만 매일의 인생살이에서 이러한 상투적인 얘기야말로 삶과 죽음을 가를 만큼 중요하다. 과장처럼 들리겠지. 추상적 난센스로 들릴 수도 있겠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진리라는 것, 너무도 확신하게 되는 것 중의 대개는 나중에 보면 결국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난다. 아예 망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예 중 하나를 들어보자.
“나야말로 이 우주의 중심이며, 현실 중의 현실이다. 존재하는 것들 중 가장 명징하고 중요한 개체이다. 이러한 나의 뿌리 깊은 믿음은 내 경험 중 직접적인, 매개체를 통하지 않은 경험에 의해 뒷받침된다.”
우린 이런 식의 자연스러운, 근본적인 자기중심성에 대한 얘기를 꺼려한다. 사회로부터 배척되는 탓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이러한 생각을 마음 깊숙이 품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 뇌에는 ‘디폴트’로 배선이 그리 깔려있는 까닭이다.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너희가 경험한 것 중 너희가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지 않은 경험이란 게 있었는지. 너희가 경험하는 세상은 네 앞에 있든지 뒤에 있든지 옆에 있든지, 아니면 티브이에 있든지 모니터에 있든지, 하여튼 네 둘레에 있다. 남들의 생각과 느낌은 어떤 식으로든 너희에게 소통돼야 한다. 하지만 너희 자신의 생각과 느낌은 그런 매개체가 필요 없다. 직접적이다. 급박하다. 현실이다.
아니, 다시 말하지만 지레짐작하지 마라. 너희들에게 남에 대한 자비심이나 이타심에 대한 설교를 하자는 게 아니니까. 소위 말하는 ‘덕목’에 대한 설교를 할 마음은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덕목’ 얘기가 아니다. ‘선택’ 얘기를 하자는 게다. 디폴트로 이미 세팅돼버린, 뿌리 깊은, 말 그대로 ‘자기중심성.’ 이 탓에 모든 것은 ‘나’라는 렌즈를 통해 보고 해석하는 성향. 이를 바꾸거나 이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선택’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디폴트 세팅을 조절(adjust)할 수 있는 사람들을 흔히 ‘잘 조절된(well-adjusted)’ 사람이라 부른다. 이 표현은 아무 생각 없이 나온 게 아니다. 내가 이 연설을 하고 있는 이곳이 대학의 졸업식이니까 자연스레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일 게다. 즉, 내가 말하는 ‘디폴트 세팅 조절’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지식과 얼마나 높은 지능이 필요한가, 라는 의문일 것이다.
이 질문은 사실 답하기 까다롭다. 최소한 내 경우를 볼 때 대학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점 중 가장 위험스러운 것은 대학교육을 받고 난 후에는 모든 것을 너무 머리로만 해석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머릿속에서만 추상적 담론을 하다가 거기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곤 한다.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그저 주의를 기울이면 될 일을 가지고. 그저 내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주의만 기울이면 될 일을 가지고.
너희들도 지금쯤이면 깨달았겠지만,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독백에 취하지 않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기는 극히 어렵다. 졸업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리버럴 칼리지에서 내세우는 표어인 ‘생각하는 법 배우기’라는 말이 좀 더 심오하면서도 좀 더 진지한 아이디어의 축약형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곧, ‘생각하는 법 배우기’란 생각하는 ‘방법’과 ‘주제’에 대한 ‘컨트롤’을 발휘하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다. 이 말은 충분히 ‘깨어있고’ 늘 ‘자각하는’ 상태에 있음으로 해서 내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지를 선택할 수 있고, 경험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도출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너희들이 어른이 된 이후 살이에서 이러한 선택 능력이 없다고 한다면 너희 삶은 끝장이다. 상투적 표현 하나를 생각해 보자.
"마음은 하인으로서는 100점이지만, 주인으로서는 0점이다."
다른 상투적 표현처럼 이 표현도 겉만 볼 때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얘기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주 커다란 진리, 그러면서도 마주하기 두려운 진리를 담고 있다. 어른이 돼서 자살하는 사람들, 최소한 미국에서는 그 대부분이 머리에 총을 쏴서 죽는 것은 다 까닭이 있다. 또 하나의 진실은 이들, 자신의 숨을 스스로 끊는 이들이 방아쇠를 당기기 오래전에 이미 죽어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 주장은 이렇다. 너희들이 이곳 리버럴 칼리지에서 받은 교육의 가치는 이래야 한다. 즉, 너희들이 앞으로 살아갈 어른으로서의 삶. 안락하고 부유하고 폼난 살이를 해가는 동안, 어떻게 하면 죽은 삶, 무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삶, 너희 머리의 종으로 사는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너희들이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오는 ‘디폴트 세팅.’ 매일매일 오롯이 혼자서만 사는, 제가 무슨 왕이나 되는 양 홀로 사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고유한 체 혼자 사는, 그러한 ‘디폴트 세팅’의 노예가 되지 않는 길은 무엇인가! 이를 깨칠 수 있어야 한다.
과장 같나? 추상적인 난센스같이 들리나? 그럼 좀 구체적인 얘기를 해보자. 너희들 졸업생들은 ‘매일매일’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정말이다. 이 나라에서 이제 성인으로 살아갈 너희들에게는 아예 언급되지 않는 진실이 있다. 그 진실 중 하나는 욕구불만이다. 짜증이다. 이는 지루하면서도 반복되며 사소하다. 너희들의 부모들과 나이 많은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으리라.
예컨대, 평균적 일상에 대해 말해보자. 아침에 일어나서 제법 고단한 직업상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근을 한다. 하루 아홉 시간이든 열 시간이든 열심히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된다. 이때쯤 해서는 피곤해진다. 스트레스도 엄청 쌓여있다. 이제 원하는 것이라고는 얼른 집에 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한 두 시간 빈둥거리다가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고 싶은 마음뿐이다. 다음날도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탓이다. 그때 퍼뜩 떠오르는 게 집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번 주에 슈퍼마켓에 갈 시간마저 없었다. 일이 너무 바빠서.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나와 차에 올라 슈퍼마켓으로 몰아간다. 퇴근길의 도로는 꽉 막혀있다. 슈퍼마켓까지 가는 시간은 너무도 오래 걸리기만 한다. 어찌어찌 도착해 보니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다른 사람들도 퇴근길에 잠시 들러 쇼핑을 하러 몰렸으니 당연하다. 가게 안은 창백한 형광등 불빛 조명 아래서 짜증 나는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정말 있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렇지만 잽싸게 들어갔다가 잽싸게 나올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과도한 조명과 과도한 넓이의 이 슈퍼마켓 안 골목골목,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그곳에서 내가 원하는 걸 찾으려면 마냥 돌아다녀야 한다.
카트는 또 어떤가. 나만큼 피곤에 지친, 나만큼 바쁜 사람들, 그리고 물론 느릿느릿 움직이는 노인네들과 얼빠진 인간들, 후천성주의력결핍증에 시달리는 아이들 사이를 요리조리 카트를 움직여 조종해 나가야 한다. 이를 앙다물고 ‘좀 지나갈까요’ 하면서 최대한 예의를 차려 말한다. 마침내, 드디어, 살 것을 다 산다. 다만, 이제는 체크아웃 카운터에 기다란 줄이 지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바보 같다. 닫혀 있는 체크아웃 카운터는 도대체 뭔가! 부글부글 끓는다. 그렇다고 좃 빠지게 일하고 있는 점원에게 화를 풀 수도 없다.
아무튼, 차례가 돼서 카드를 내밀고 값을 치른다. 잠시 후 ‘안녕히 가세요’라는 소리가 들린다. 철저하게 죽은 목소리다. 음식이 가득 찬 봉지들을 카트에 담아 주차장으로 나선다. 곳곳이 울퉁불퉁 돋아있고 쓰레기로 지저분한 주차장을 가로질러 카트를 밀고 차를 세워둔 곳까지 온다. 이제 차에 쇼핑 봉지를 안의 내용물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조심조심 잘 실어야 한다. 집으로 가는 동안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기 일쑤인 까닭이다. 다 실었으면 그제야 집으로 향한다. 정체가 심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교통지옥을 뚫고.
뭔 말이냐면, 이처럼 사소하고 짜증 나는 개똥 같은 일을 겪을 때야말로 ‘선택’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교통정체든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슈퍼마켓이든, 기다란 줄을 지어 체크아웃 카운터 앞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 뒤에 서야 하든,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생각할 틈이 있다. ‘어떻게’ 생각할 것이며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한, 장 보러 갈 때마다 우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오고 기분은 개차반이 될 게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디폴트 세팅’이 그렇게 생겨먹은 탓이다.
‘디폴트 세팅’에 따르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언제나 ‘나’만을 생각하게 된다. 배고픈 나. 피곤한 나.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나. 온 누리가 내 앞길을 거칙적대며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내 길을 가로막으며 거치적거리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보라. 이들은 얼마나 짜증 나게 생겨먹었는가. 얼마나 어리석으며 소처럼 미련하게 생겨먹었는가. 눈은 퀭하니 죽어있고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는, 체크아웃 카운터에 줄을 지어 서있는 이것들! 줄을 지어 기다리면서도 휴대전화에 대고 큰 소리로 떠드는 이들에게서 예의범절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짜증이 밀려온다. 게다가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난 하루 온종일 열심히 일했다. 밥도 못 먹어서 굶주려 있다. 피곤에 지쳐있다. 그런데도 집에 가서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좀 쉬고 싶은 욕망마저도 충족할 수 없다. 이 모두 둘레에 있는 이 미련한 인간들 탓이다.
아니면, 내 ‘디폴트 세팅’이 좀 더 ‘사회 지향적’으로 맞춰져 있다고 하자. 퇴근길에 꽉 막혀 있는 도로에 멈춰 서서 차선 하나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몸체의 SUV, 허머, V-12 엔진을 장착한 트럭들을 본다. 이 미련하고 몸집만 큰 차들은 이기적 이게도 엄청난 양의 연료를 낭비하고 있다. 화가 나며 생목이 치밀어 오른다. 뒤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범퍼 스티커들은 또 어떤가. 애국적이거나 종교적인 메시지를 고함치는 저것들. 왜 저런 구호들은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낭비가 심한 차량에, 가장 추하고 생각 없고 제맘대로 운전하는 인간들이 모는 차량에 붙어있는가.
이 인간들은 대개 운전 중에도 휴대전화로 끊임없이 지껄인다. 정체 속에서 겨우 몇 미터 앞서가고자 느닷없이 끼어드는 이 인간들. 우리 손자들이 우리 세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얼마나 낭비가 심한 사람들로 여길까. 지구의 기후 체계를 망친 세대. 버릇없고 어리석고 역겨운 세대. 모든 게 그저 개차반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디폴트 세팅’에 내맡겨진다.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로 ‘선택’한다면 그것도 좋다. 대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생각은 너무 저절로, 너무 쉬이 다가와서 그것을 ‘선택’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은 지적하자. 그저 ‘디폴트 세팅’의 작동에 불과하다. 자동적이며 무의식적이다. 우리의 살이가 지루하고 짜증 나고 구질구질한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고 우선 당장 내게 필요한 것과 나의 느낌이야말로 세상의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한다는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믿음. 이 탓이다.
요컨대, 이런 상황에서도 생각을 달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앞길을 막고 꼼짝도 않고 기름을 낭비하고 있는 차량들. 이러한 교통정체 상황 속에서, 저 SUV에 타고 있는 사람이 과거에 아주 끔찍한 사고를 당한 적이 있어서 이제 운전하는 것이 너무 무섭게 되어, 심리치료사가 차를 살 때는 꼭 덩치가 큰 SUV를 사라고 명령했을 수도 있다. 저 허머에 타고 있는 사람은 어떤가. 방금 전 내 앞에 느닷없이 끼어든 커다란 허머에 타고 있는 저 사람은 아마 자신의 아이가 크게 다쳐서 그 아이를 옆에 태우고 허둥지둥 병원으로 몰아가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가 서두르는 연유가 내가 서두르는 까닭보다 더 정당할 수 있다. 그가 내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앞길을 막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아니면, 억지로라도 이렇게 생각해 보자. 슈퍼마켓에서 체크아웃 카운터에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적어도 나만큼 지루함을 느끼고 짜증 나 있을 공산이 크다. 그중 몇은 나보다도 더 힘들고 구질구질하고 고통스러운 살이를 하고 있을 공산도 크다.
또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너희들에게 어떤 윤리 강의를 하고 있다고 여기지 마라. 아니면 너희가 이런 식으로 ‘꼭 생각해야 한다’라고, 내가 설교하고 있다고도 생각지 마라. 어느 누구도 너희들이 자동적으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어려운 탓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몸에 붙이려면 의지력과 정신적 노력이 필요하다. 너희들이 나와 비슷하다면 어느 날은 도저히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없으리라. 또 어느 날은 할 수는 있어도 하고 싶어 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대개의 나날들에서 너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이런 식의 생각을 한다면, 체크아웃 카운터에서 만난 뚱뚱하고 죽은 눈을 가지고 있던 여인, 얼굴에 화장으로 떡칠한 그 여인이 어린 아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도 달리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아마 그 여인은 삼일 밤을 연달아 세야 했을 지도 모른다. 암으로 죽어가는 남편의 손을 보듬어 잡고서. 아니면 어제 아내가 관공서에 갈 일이 있었을 때 친절하게 도와준,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그 공무원이 이 여인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더 높다. 하지만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다. 요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의 ‘선택’에 달려있다. 너희가 ‘실체’가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자동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중요한 ‘사람’이 누구이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동적으로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다시 말해 너희가 ‘디폴트 세팅’에 의존한다면, 너희도 나처럼 무의미하고 짜증스러운 가능성 외에는 아무것도 고려에 넣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말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고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면 너희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바글바글하고 시끄럽고 느리고 구질구질한 상황 속에서도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뭔가 성스러움마저 볼 수 있는 능력이 네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성스러움. 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태우고 있는 바로 그 힘과 동일한 힘에 의해 불타고 있는 성스러움. 자비와 사랑. 그리고 만물의 바탕에 깔려 있는, 껍질 속에 존재하는 단일성을 볼 수 있는 힘이 네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신비주의적 전통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누리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어떤 식으로 볼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너다, 라는 것이다. 어떤 것에 의미가 있는지, 어떤 것이 무의미한지를 네가 의식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 어떤 것을 숭배할지, 그걸 정하는 것은 바로 너다.”
유일한 진리가 이것이라고 했는데, 사실 또 하나의 진리가 있다. 매일매일 참호 속에서의 살이에서 소위 ‘무신론주의’라는 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것도 숭배하지 않는다’라는 말 따위는 의미 없다. 우리 모두 뭔가를 숭배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숭배할 ‘대상’이다. 이른바 ‘신’이라든가 어떤 영적인 대상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까닭이 있을까? 그리스도건, 알라건, 야훼건, 위컨여신이건 아니면 어떤 윤리적 원칙이건, 이런 대상을 숭배할 까닭이 있을까?
있다. 그것도 아주 도드라진 이유가. ‘신’이나 ‘영적 대상’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 외의 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면 필경 그 숭배의 대상이 너희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인 까닭이다. 돈이나 물질을 숭배하면, 다시 말해 돈이나 물질에서 너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면, 결코 너희들은 이제 그만 가져도 돼, 라는 말을 못 하리라. 결코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리라. 이게 진리이다. 숭배의 대상이 네 몸뚱이이거나, 아름다움이거나, 성적 매력이라면 너희는 늘 자신을 추하게 느끼며 평생을 보내리라.
마침내 늙고 병들어 죽을 시간이 가까워 오면, 너희는 명부의 사자가 너희를 방문하기 이전에 벌써 수 많은 죽음을 경험한 후이리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 진리를 이미 잘 알고 있다. 신화에도 나오고, 속담에도, 상투적 표현에도, 우화에도, 브로마이드에도, 짧은 경구에도 늘 나온다. 인류가 간직하고 있는 위대한 이야기들의 뼈대는 이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진리를 매일의 의식 표면에 명징하게 떠올릴 수 있느냐는 점이다. 힘을 숭상하라. 그러면 너희가 느끼는 것은 약함과 두려움뿐이리라. 그 두려움을 눙치기 위해 너희는 더욱 많은 힘을 찾아 헤맬 것이다. 너의 지성을 숭배하라. 똑똑해 보이는 것에 전념하라. 그러면 결국 네가 다달을 감정의 종착역은 어리석음이다.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남이 너의 어리석음과 사기꾼임을 밝혀낼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형태의 숭배 대상이 나쁜 이유는 그것들이 ‘악하다’ 거나 ‘죄스러운’ 탓이 아니다. 나쁜 까닭은 그것들이 ‘무의식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바로 ‘디폴트 세팅’인 탓이다. 이러한 숭배의 대상은 성장하면서 안개처럼 우리의 의식에 스며든다. 매일매일. 이제 보는 것도 이런 숭배의 대상의 눈으로만 본다. 이제 가치 매김도 이런 숭배의 대상을 척도로 한다. 나도 모르게. 너도 모르게.
그럼, 세상은 네가 ‘디폴트 세팅’에 따라 작동하는 것을 탓할까? 아니다. 세상은 남자와 돈, 권력이 주도한다. 이런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두려움과 경멸, 욕구불만, 탐욕, 그리고 ‘나’에 대한 숭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는 이러한 포스들, 두려움, 경멸, 욕구불만, 탐욕, ‘나’에 대한 숭배를 지극히 잘 사용해서 엄청난 부와 안락함,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이끌어 냈다. 자유. 두개골 크기의 왕국의 왕이 될 자유. 모든 피조물의 한 가운데 홀로 있을 자유. 이런 식의 자유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으리라.
하지만 이와 다른 종류의 자유가 있다. 이 자유는 너무도 진귀해서 바깥세상, 이기는 것, 성취하는 것, 보이는 것이 다인 저 바깥세상에서는 그다지 다른 사람들의 얘기에 오르지 않는 주제이다. 정말 중요한 이 자유에는 몇 가지 필수 속성이 있다. 주의 기울이기. 깨어 있기. 하기 싫어도 하는 엄격함. 노력. 진정으로 남을 위하기. 진정으로 남을 위해 희생하기. 이 모든 것을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매일, 사소한 방식으로, ‘쿨’ 하지 않은 방식으로 계속 하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무의식적 삶이다. ‘디폴트 세팅’에 의해 돌아가는 삶이다. ‘다람쥐 쳇바퀴’의 삶이다.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뭔가 가졌었는데 이제는 잃어버린 영원한 무엇에 대한 갈망이다.
안다. 재미없다. 생동감도 없다. 영감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에 대한 얘기는 내가 보기에, 모든 수사학적 개똥들을 닦아낸 후에 남는 순수한 진리이다. 물론 네 생각은 너에게 달려있다.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건 네 자유이다. 다만, 내 말을 어느 자기계발 연설가의 쓰레기 같은 설교로 치부하지는 말아달라. 종교나 도덕, 도그마나 사후세계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유일한 ‘진리’는 죽음 전의 삶이다. 네 대가리에 총알을 먹이지 않고도 서른 살, 아니면 쉰 살까지도 살자는 얘기다. 아주 단순한 자각. 정말로 실체인 것. 정말로 필수적인 것. 우리 둘레 어디에나 널려있는, 그러나 잘 찾아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 그래서 끊임없이, 자꾸자꾸 스스로에게, ‘이게 물이야, 이게 물이야,’ 하고 상기시켜야 하는 것. 이러한 것들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게다.
매일매일 깨어 있는다는 것. 살아 있는다는 것.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