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사실의 빌런을 기억하며,
“조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위진입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해 받은 메일이었다.
위진.
이름이 낯설었다. 웬만하면 학생들의 이름을 대부분 기억하는데 이 이름은 왜 이리도 낯설게 느껴지는지…
메일을 읽으며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아, 위진.
그녀는 내 학생이 아니었다.
내가 대만에서 근무했던 학교의 복사실에서 일했던 근로 학생이었다.
그녀의 메일을 읽으며 한 때 ‘복사실의 빌런’이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연구실이 밀집한 층의 복도에는 복사기가 있었다. 특히 내가 있었던 건물에는 신형 복사기가 들어왔다. 기계와는 좀처럼 친해지기 어려워하는 나는 ‘신형’이라면 더더욱 반기지 않았을 뿐더러 백만 가지 기능이 탑재된 ‘스마트’한 복사기는 다른 기계와 다를 바 없이 모든 지시 버튼이 중국어로 되어 있었다.
초급 중국어 교재 제 10과 정도를 끝내고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쓰지도 않는 “이것은 얼마입니까(多少錢, 뚜어샤오치엔)?”을 겨우 말할 줄 아는 내가 복사기에 콩알만하게 박힌 기능어를 읽고 업무를 수행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필 내가 복사를 할 때면 그 많은 연구실에 오가는 선생 하나 없었고, 있더라도 바람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지나가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필요할 때마다 학생을 불러다 놓고 “이 버튼을 누르면 뭐가 나오니?”, 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바로 조교가 내게 중요한 정보를 하나 알려 주었다.
정문 앞에 있는 건물 2층에 가면 복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곳은 시험지 복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곳이라 학생들은 출입금지였다! 그래도 그곳에는 직원들이 있으니 물어보면 된다고 했다.
그래, 물어보면 된다. 그런데 물어보는 것도 중국어잖니.
그래, 배우면 된다.
“복사를 하려고 합니다.”
학생에게 중국어를 하나둘씩 배우는 이 외국인 선생은 조교가 알려준 이 문장을 몇 번이고 연습한 뒤 복사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곳에는 도와주는 직원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연습한 문장을 말했다.
“복사를 하려고 합니다.”
어눌한 내 중국어를 들은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복사기에 종이를 올려놓고 내가 말한 매수에 맞춰 복사를 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종이를 주면 그녀가 알아서 복사를 해 주는 줄 알았고, 계속 그녀에게 나의 ‘복사실용 중국어’를 말하며 한국어가 쓰인 A4지를 건넸다.
얼마 후,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사는 셀프였다.
선생들은 각자 알아서 복사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녀가 나를 위해 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나도 옆에 있는 선생들을 따라 ‘혼자’ 복사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복사기라는 물건은 때때로 종이를 거부하기도 하고, 종이가 없는 상태이기도 하고, 종이를 씹어먹기도 했다.
게다가 기계는 잘 되다가도 내가 손만 대면 안 돌아갔다.
나는 그렇게 복사실의 마이너스 손이자, 밉상이자, 트러블메이커이자, 빌런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복사실의 근로 학생인 그녀는 나를 도왔다. 때로는 쪼그려 앉아 기계 밑을 살펴보았고, 때로는 기계 뒤로 가서 종이를 빼내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작은 소리로, “실례지만(不好意思, 부하오이스)”이라는 말을 하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었다. 그녀는 내게 은인이었다.
복사실에 들어가면 그녀에게 가장 먼저 인사했고, 나올 때도 깍듯이 감사인사를 했고, 우연히 복도에서 만나면 굳이 아는 척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내 학교 생활에서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잘 보여야 했다. 그녀가 없다면 수업 준비가 어려웠으니 말이다.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오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로부터 메일을 받게 된 것이었다.
“조 선생님, 학기가 시작됐는데도 선생님이 복사실에 안 오셔서 너무 궁금했는데, 선생님이 한국으로 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선생님은 저를 보면 항상 밝은 얼굴로 웃어주셔서 감사했어요. 이제 복사실에서는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선생님이 복사실에 이제 안 오시니 서운해요.”
이 글을 읽으니 그녀가 복사실에 앉아 있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작은 책상은 복사실 구석에 있는 벽에 딱, 붙어 있었다.
그녀는 PC를 켜놓고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는 단순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벽을 보고 있었다. 내가 복사기 사용을 제법 능숙하게 잘해 ‘신입’ 선생들에게 복사기 사용을 알려줄 수준(?)이 되었을 때도 그녀는 벽을 보고 앉아 있었다. 복사기에 종이는 떨어졌고, 책상 위에 종이 뭉치가 보이지 않으면 그녀를 불렀다.
나는 그녀의 스승이 아니었고, 그녀는 내 학생이 아니었다.
우리 관계를 굳이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나는 그녀를 찾고, 그녀는 나를 도운 관계라고 생각했다. 상대를 기다리는 쪽은 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었는지…….
내가 특별히 친절한 사람이라 그녀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녀가 필요했고, 그때마다 그녀는 한결같이 나를 도와주었고, 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때로는 필요에 의해, 때로는 그저 고마워서 누군가를 불렀고,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 일련의 일들이 상대의 마음을 조금은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복사실의 그녀는 내게 넌지시 알려 주었다.
그날은 9월의 어느 날, 대만의 스승의 날이었다.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을 맞아 뜬금없이 9월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나를 아낌없이 도와주고, 내게 친절한 웃음을 건넸던 이들에게 잊지 말고 감사해야지, 다짐하게 되는 2021년의 스승의 날이다.
*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저에게 세상의 이치와 도리를 깨닫게 해 주신 모든 스승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브런치에서도 많은 스승님들을 만났지요. 그리고 현재 스승의 일을 하고 계신 분들께 응원의 말씀도 함께 전하고자 합니다.
** 대문사진: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