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슝에서 만난 대만 문화
2015년 7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아이와 나는 가오슝샤오강국제공항(高雄小港國際機場)에 도착했다. 새벽이었고, 예정된 일정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입국장의 자동문이 열리자 덥고 습한 새벽 바람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위칭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내가 일할 학교의 교직원이자 친구이다. 현지인이 나를 맞이하고 있다는 안도감에 환하게 웃었을 것이다.
교직원 기숙사에 들어가 대충 짐을 정리하고 씻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새벽의 고요가 낯설게 느껴졌다. 집에 아닌 이국땅에 누워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노래를 틀었다.
다들 그렇게들 떠나나요 / 이미 저 너머 멀리에 가있네 / 여기에는 아무도 안 올 테니 / 그냥 집으로 돌아갈래
노래 마지막에 혁오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데 예전에 미처 듣지 못했던 그의 숨소리가 그날따라 크게 빈방에 울렸다. 노래는 혁오의 <와리가리(Comes And Goes)>였다,
와리가리.
대만 남부의 도시인 가오슝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낯선 곳을 ‘와리가리’ 하며 탄성을 뱉거나 한숨 짓게 되는 날들이.
오전 9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하루의 시작점에 있었고, 한국보다는 1시간 늦은 시간이었다.
본격적으로 하루가 시작되었으니 오늘을 살아야 했다.
밖으로 나갔다. 학교 후문에 버블티 가게가 보였다. 그래, 거기부터다.
대만살이 첫날 경험한 신기한 문화 체험의 현장이 열렸다.
버블티 가게 카운터에 세워진 메뉴판을 보았다. 모두 다 한자였고, 글자 하나 하나는 읽어도 그들이 모여 무슨 말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때 생각난 단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전주나이차(珍珠奶茶)’였다. 대만이 원조인 버블티는 버블티가 아니라 ‘전주나이차(珍珠奶茶[zhēnzhūnǎichá])’라고 불린다는 학생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메뉴에는 그것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용기 내어 중국어 발화를 시작했다.
“전주나이차”
점원은 반응이 없었다. 약 5초 간의 정적이 흐르자 그는 내게 물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그의 질문은 몇 잔을 마시겠냐는 말인가 싶어, 소심하게 오른손 검지를 들어 보였다. 그는 또 내게 물었다. 나는 그에게 답을 해 줄 수 없었다. 그는 또 내게 뭔가를 물었다. 나는 연신 “전주나이차”라고 했다. 결국 그는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먼저 포기하느냐의 싸움이 될 것만 같았다. 이대로 포기하고 갈까, 하다가 점포에 붙은 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그것은 전주나이차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뭐라도 말해야 했다.
“이양(一样 [yíyàng], ‘같다’의 의미)”
풀어 말하자면, “지금 내가 가리키고 있는 음료와 동일한 음료로 주세요, 제발요.”라는 의미였다. 점원은 또 다시 내게 뭔가를 물었으나 나는 일관성 있는 답변 “이양”을 외쳤다. 그는 뭔가 마뜩잖은 표정을 짓더니 음료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음료를 건넸다. 계산을 해야 했다. 지폐 한 장을 내고 동전을 여섯 개 이상 받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내 지갑은 동전으로 가득 찰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날, 대만 남부의 음료와 음식은 상당히 달다는 사실, 그리고 음료를 주문할 때에는 음료 사이즈, 설탕과 얼음의 양을 점원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대만 음료 가게의 메뉴에는 ‘전주나이차’가 보통은 나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전주’는 추가 옵션이기 때문이다(그리고 발음은 ‘전주’가 아니라 “쩐쭈”였다).
대만에서는 음료뿐만 아니라 길거리 음식을 사 먹을 때에도 점원으로부터 여러 개의 질문을 받게 된다. 잘라 드릴까요? 계란을 넣어요? 치즈를 넣어요? 소금을 뿌릴까요? 후추는요? 등등 개인의 취향을 묻는 질문이 쏟아진다. 대만에서는 새로운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에 따른 옵션을 묻는 질문도 함께 이해해야 했다.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 대만 날씨가 덥다고 익히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더울 줄은 몰랐다. 자고로 여름에는 35도가 넘는 일이 예삿일이라 폭염주의보도 내리지 않는다. 햇빛도 엄청 강하다. 그래서인지 상가 일층에는 차양이 달려 있고, 차양을 따라 남의 점포 앞을 스스럼 없이 지나가는 이들이 허다하다. 이것은 대만인들이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다. 대만인들을 따라 차양 아래로 그늘을 찾아 움직이던 아이와 나는 야구모자와 선글라스를 각각 착용했다.
이로써 우리는 외국인임이 증명되었다. 대만인들은 모자를 잘 쓰지 않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는 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양산을 쓴다. 젊고 건장한 남성들마저 양산을 쓴 모습이 낯설게 보였다. 양산을 하나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산은 어디서 사야 할까, 라는 고민은 이내 접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양산을 쓰지 않고 다닌 탓에 피부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졌고, 대만 생활 말기에는 햇빛 알러지라는 없던 증상도 생겨 피부과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양산은 대만 생활의 필수품이다. 참, 양산은 중국어로도 ‘양산(陽傘)’으로 발음한다.
줄지어 달리는 오토바이 떼를 보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오토바이는 도로 위뿐만 아니라 보도블럭 위까지도 달린다. 게다가 가게 앞에 주차된 오토바이들 때문에 보행자가 걸어갈 공간이 확보되지 않았다. 차도와 인도를 번갈아가며 걸으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걸어가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이곳은 보행자를 배려하지 않는군. 객지생활에서의 불평이 시작되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모습도 놀라웠다. 몇몇 노인들은 한쪽 다리를 바닥에 닿을까 말까 한 자세로 천천히 오토바이를 몰았다. 그들의 한쪽 다리는 브레이크 역할을 했고, 우리는 그 비틀거리는 오토바이를 피하는 ‘감각’을 키워야 했다.
오토바이는 중국어로 ‘지처(機車([jīchē])’인데, ‘오토바이’라고 해도 대만인들은 알아듣는다. 대만 남부에서 쓰는 언어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잠시 쉰 후,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밖을 나섰다. 그런데 아까 문을 나섰을 때보다 골목에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점점 몰리고 있었고, 이들은 갑자기 바쁜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몇몇 사람은 뛰어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그들을 따라 뛰었다. 골목을 벗어나자 벨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고, 사람들은 달리기를 멈췄다.
그때 우리 앞에 거대한 트럭이 한 대 멈춰 섰다.
그것은 바로 쓰레기차였다.
대만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쓰레기차가 클래식 음악을 울리며 온다. 그 시간에 맞춰 쓰레기를 버리지 않으면 (특히 저녁 시간대에) 그들은 그 다음날에 쓰레기를 버려야 하기에 그렇게 열심히, 진심을 다해 뛰어간 것이었다!
참고로, 대만에는 종량제 쓰레기 봉투는 따로 없고 마트에서 일반 쓰레기봉투를 사서 쓰면 된다. 그리고 꽉 채운 쓰레기 봉투를 밖에 세워놓으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 무덥고 습한 날씨에 쓰레기를 오랜 시간 방치하면 위생상의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더운 날씨에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무척 신기해 보였다. 마치 이들은 습관처럼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듯했다. 오고 가는 이들의 상당수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뉴스에서 기자가 야외에서 보도를 할 때 이들은 마스크를 쓰고 말하고, 인터뷰하는 이들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 오토바이, 헬멧은 하나의 세트였다. 도로를 가로지르며 달리면 매연을 들이켜니 마스크를 써야 했다. 또한 가오슝에는 공장이 많아 공기가 좋지 않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편이 좋다고 들었다. 혹은 피부 상태가 좋지 않거나 감기 기운이 있거나 피곤한 모습일 때 마스크를 쓰는 이들도 있었다.
마스크는 중국어로 ‘코짜오(口罩[kǒuzhào])'이다. 이 또한 생활 속에서 배울 수밖에 없는 중국어가 되었다. 대만에 살다 보니 나 또한 마스크 착용이 생활화되었다. 왓슨스에서 세일을 하면 나도 모르게 묶음으로 마스크를 사서 하나 쓰고 나올 때, ‘아, 나도 대만 생활에 익숙해졌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2021년 현재, 마스크 착용이 생활화되었던 대만은 코로나 방역 모범국으로 전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리고 2015년 당시 내가 신기해했던 '마스크 쓴 사람들'을 이제는 우리의 일상 어디에서나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