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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Jul 25. 2020

돌아와요, 캡틴

나를 찾는 항해 중입니다

시작은 임영웅이었다. 

임영웅의 유튜브 구독자이기도 한 나는, 그가 커버한 곡을 하나씩 들어본다. 중국어로 된 노래 제목이 있었다. 클릭,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月亮代表我的心)

영화 ‘첨밀밀’의 OST로, 대만 출신 가수 등려군(鄧麗君 )의 대표 곡이다.

시작은 임영웅의 커버곡으로 ‘노래로 배우는 중국어’를 학습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의 영상에는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 번역만 있었다. 하는 수없이 다른 영상을 찾았다. 클릭,

거기에는 임영웅이 없었지만, 원곡 가수 등려군이 있었고, 중국어도 있었다. 계획대로 ‘노래로 중국어 배우기’를 실천하려던 참이었다. 다시 클릭,

등려군의 청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울림은 노래를 따라 부르는 내 입 속에, 등려군의 우아한 몸짓을 보고 있던 내 눈에, 대만을 떠올리는 내 머릿속으로 점점 퍼져갔다. 




몇 해 전, 대만 살이 초창기였다. 

마땅히 갈 곳도, 만날 이도 없었고, 빨리 중국어를 배워 ‘제대로’ 살아야겠다라는 막연한 결심 끝에 방에서 혼자 중국어 책을 펼쳐 놓고, 등려군의 노래를 틀어 놓았다. 가오슝의 낯선 공기, 텅 빈 집에서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니까 등려군은, 그녀의 노래는, 낯선 대만 생활을 혼자 짊어져야 했던 내게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 시절의 감성을 나의 살던 고향에서 다시 떠올리며 등려군의 노래를 다시 눌렀다. 그리고 스크롤바를 아래로 내리다가 

그를 만났다.


89년 초임 항해사 시절 H사의 화물선을 타고 카오슝에 상륙나가서 시내를 돌아 다니다 우연히 듣던곡 너무나 여운이 남아 당직때 혼자서 흥얼거리던노래 그리고 지금은 중년의 나이가 되고 아직도 캡틴으로 승선하고있지만 혼자서 듣고 있으면 89년당시의 젊고 싱싱한 항해사로 돌아간 느낌이다 다시 되돌아 가고 싶은 그때 너무나도 그립다


30여 년 전, 가오슝에서 항해를 했던 분이었다.

오래 전, 혼자 가오슝 시내를 돌던 젊은 항해사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의 모습에서 5년 전, 가오슝에서 ‘기약 없는 항해’를 해버렸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거리에 스쳐가는 낯선 언어, 그리고 등려군의 목소리, 가오슝의 더운 공기와 오토바이 소리들.

391

그의 댓글에 달린 대댓글의 개수였다. 가오슝을 떠올리는 이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그들이 기억하는 가오슝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391, 클릭,

그 순간 대댓글들이 잦은 파도처럼 일렁이며 화면에 펼쳐졌다. 

그때만해도 알지 못했다. 내가 한 노인의 삶을, 외로움을, 그리움을 읽어버릴 줄은.


그렇죠 87년 12월에 범양상선에서 실기사마치고 88년도부터 H선사의 3항사로 배를탔었죠 이제는 이노래를들으면 눈물이 자꾸 납니다 ..... 89년생인 젊은이 늘 행복한하루 젊음을 최대한즐기길 바랍니다 저는 제젊음 바다에 던지고 후회는 없지만 가끔 여느 젊은이처럼 제대로 즐기지 못한점 늘 아쉽답니다 ....


캡틴은, 자신을 89년생이라고 밝힌 이에게 당신의 젊음을 꺼내 보였다. 등려군의 노래와 가오슝을 떠올리며 그 시절, ‘바다에 던졌던’ 젖어버린 젊음을 다시 건져낸 것이다. 물에 들어갔다 나온 젊음만큼이나 촉촉하고 주름진 그의 눈가가 화면에 드러났다가 지워졌다를 반복했다. 캡틴은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80년대 당시 한국보다 훨씬 발전한 대만의 모습을  바나나와 오렌지가 귀한 시절, 자식을 주려고 몰래 들고 들어오다가 세관에 걸려 내 자식 먹일 거니 좀 봐달라고 사정하던 동료들의 이야기도... 덧붙여 그는, 현재 미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자식들이 모두 잘 자랐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은 캡틴의 삶에 박수를 보냈다. 동시에 그가 짊어진 가장으로서의 무게에 공감하며 또 다른 아빠들은 먹고 사는 일의 버거움을 캡틴에게 하소연했다. 캡틴은 그들을 다독였다. 


그 이후,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댓글에 몰리기 시작했다.

해양대 출신 아버지를 둔 아들, 해양대 후배, 사업부진으로 좌절한 가장, 그리고 또 다른 89년생들, 해외 생활을 몹시 궁금해하는 젊은이들, 인생에서 돈이 갖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미래를 위해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를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캡틴은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올린, 답이 없는 질문에, 삶에서 마주한 상처에, 그리움에, 돌이킬 수 없는 일들에 하나씩 답을 달아 주었다. 


나도 그에게 묻고 싶었다. 캡틴, 나도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무엇을 위해서 가족이 떨어져 지내며 ‘항해’를 했을까요? 왜 미래에 저당 잡혀 내 젊음을 호수에, 땅바닥에, 바다에 던져버렸을까요? 대답해 주세요, 제발. 


댓글을 올려야 하나 망설이며 391개의 댓글을 절반 이상 읽어나갔다. 

시간이 흘렀다.

캡틴

캡틴 

캡틴

친구들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또한 등려군의 노래를 또 한 번 더 재생하며 댓글 ‘더 보기’ 버튼을 클릭, 또 클릭하는 동안 캡틴을 불러올 수 없었다. 


드디어 캡틴의 아이디가 나타났다.

캡틴이 아니었다.

그의 큰 아들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 말을 전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유품을 정리하며 휴대폰을 보았는데 자꾸 알람이 울려 들어와 보니 이곳에서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오랜 항해를 마치고 고국이 아닌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해온 아버지께서는 많이 외로우셨을 거라고, 고국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그리워하셨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좋은 말벗이 되어주어 고맙다고, 오히려 댓글을 올린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소식에 많은 이들이 아파하고 슬퍼했다. 다시는 캡틴을 부를 수 없고, 그에게 물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다. 


한두 시간 동안 등려군의 노래를 들으며 캡틴의 글을, 댓글들을 읽었을 뿐이었다. 한 사람의 생을 읽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와 다른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던 한 노인의 이야기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391개의 댓글에서 1989년부터 2019년까지 벌어졌던 캡틴과 댓글에 모인 이들의 삶을 조각 조각 집어 들었고, 그 중의 몇 개는 내 것처럼 생기기도 했다.



캡틴은 언제나 항해 중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어딘가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더 넓고 거친 곳을 우리보다 더 많이 다녀온 캡틴은, 삶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서 비틀거리는 우리에게 돛을 올리고 가도록 방향을 조금씩 알려주었다. 사실, 우리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하는지…

확신이 필요했고, 위로도 받고 싶었고, 공감도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나도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국 땅에서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이렇게 비틀거리며 가는 게 맞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가끔은 내 뜻대로 안 되는 일 때문에, 더운 날씨 때문에 숨이 막힌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일기 대신 브런치를 선택했다.

모르지 않았다. 내가 뭘 하고 있고, 뭘 해야 하는지 말이다. 그래도 때로는 정말 몰랐다. 내가 나를 몰랐고, 누군가가 대신 나를 알아봐 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

띵똥.

나도 어딘가에 알람을 두고 싶었다. 캡틴과 대화를 주고 받았던 이들처럼 내 이야기를 들어준 이들의 반응을 알람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등려군의 목소리를 들으며 캡틴의 이야기를 읽으며 오늘 하루, 이렇게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는 순간이 문득, 몸서리치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내 이야기를 전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들을 만나며,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이고 어깨를 다독이는 동안, 우리는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에 조금은 용기를 내어 항해를 하고 있겠지. 바다 위를 떠다니며 난데없이 들이치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누군가를 만나고 손을 흔들어주면 다시 제 갈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얻겠지, 그랬겠지, 나도, 캡틴도, 여러분도.





오늘 쓰고 있는 이 글은, 브런치의 100번째 글이다.

100개의 글로 많은 분들을 브런치에서 만났다. 대부분 일면식도 없는 분들인데 글을 열심히 읽어주셨고, 댓글로 응원해주셨다. 브런치에 100개의 글을 올리는 시간 동안, 내 삶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대만에 거주했던 4년이라는 시간이 그러했다. 낯선 도시 가오슝에서 삶을 살아내는 동안 기댈 곳이 필요했고, 이야기할 누군가가 그리웠다. 그 시간에 많은 분들이 함께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용기 내어 바다로 간다. 


캡틴의 이야기는 아래 화면의 댓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본 글은 해당 댓글의 이야기를 토대로 했음을 밝힙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Wp3a2DnkoE&list=RD9Wp3a2DnkoE&start_radio=1


무엇보다도

100번째 글을 올리는 동안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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