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미 Dec 19. 2021

공부 시간에 딴 생각하기

권창섭 시집 <고양이 게스트하우스 한국어>

국문과에 다녔지만 국어학이 싫었다. 단어를 나노급으로 나누어 형태소라는 작은 단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의미에 의문을 가지며 단어를 쪼개는 일이 쪼잔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쪼개고 쪼개는 일이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등학교 화학 시간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기호의 나열을 보며 품었던 불만을 대학 강의실에서 다시 표출할 줄은 몰랐으나, 자고로 중2병이란 공부 좀 할라치면 도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은 들었다.


국어학 시간을 지긋지긋해했던 내가, 어학이 아닌 문학을 하러 국문과에 왔다던 내가, 이걸 배워 어디다 써 먹느냐고 투덜댔던 내가, 그 일로 먹고 살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문학이 아닌 어학으로 먹고 산다. 조 선생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 버렸고, 이제 와서는 아주 가끔 나는 문학을 하러 국문과에 갔다는 알량한 자존심을 가끔 내비치기는 한다. 아무래도 시인과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고 심한 질투를 느낄 때가 아닐까 싶다. 혹은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국문과에 지원했다는 말에 이십 년이 넘도록 책임을 지지 못해서일지도.




2-3주에 한 번은 도서관을 찾는다. 신간코너에서 문학 책을 살피는 일은 어쩌면 문학을 하러 국문과에 갔다는 말에 책임을 지려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제목만으로 나를 매료시키는 시집을 꼭 찾는다. 그날 나를 사로잡은 시집은 이것이었다. 


고양이

게스트하우스

한국어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세로로 적혀있었다. 나는 고양이를 싫어하고, 게스트하우스에는 관심이 없고, 한국어는 매일 쓰는 언어이자 내 직업이다. 이 시집을 선택했고, 시를 한 편, 한 편 읽으며 이십 여 년 전 강의실에서 딴 생각을 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시인은 국문과 출신임에 분명하다. 

음성학, 음운론, 문법론이 시에 등장하고 문법 요소를 분석하는 내용이 시에 있는데 그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국어학 시간에 재미없다는 불평만 했거늘, 이 시인은 국어학 시간에 제대로 된 ‘딴생각’을 해서 시를 탄생시켰다. 


매력적인 작품을 만난 즐거움을 이 글을 읽는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졌다.


고양이 게스트하우스 한국어 – 권창섭 시집, 창비(2021)


출처: 알라딘(대문 사진과 동일)



사이시옷


적을까 지울까 고민하는 동안


사람 하나 저 멀리서 크게 소리친다


둘이 만나는 일이란 다 그런 것이라고


나는 발음된 적도 없었다고


그저 있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전문)


이월移越


‘춥다’고 하는 말은

춥다는 뜻인데, 그 뜻은

혓날을 입천장에 대었다가 떨어뜨리고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가 붙였다 떼는

그러한 동작 속에 있는 것이 아니야


말하기 전부터 이미 춥고

말한 다음에는 말을 해서 더욱 춥지

(하략)



고양이 게스트하우스 한국어


고양이가 살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이름은 한국어고요,

Cat이 살고 있는 게스타하우스 이름은 영어고요,

ねこ가 살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이름은 일본어라지만,

고양이네 동네에서도 ねこ네 공네에서도

게스트하우스를 손님집이라고

きゃく いえ라고 하지 않아요

게스트하우스는 게스트하우스

한국어에서 게스트로 지내다 가는 고양이

한국어에서 게스트를 Cat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나이키의 역사


1987-1992: 오래된 미래

 내 첫 나이키는 하얀 실내화였어. 아직 채 발 냄새가 실내화에 배어들기도 전에 우린 엄마에게 실내화 새로 사달라고 떼를 썼었지. 기억나? 반마다 한명 정도는 장인이 있었거든.

(중략)

1993-1995: 사다리 걷어차기

 이제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녀야만 했어. 모두가 같은 옷을 입게 되었지만 모두가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었지. 나처럼 안경 낀 삐쩍 마른 놈들은 피해야 할 길도 있었어.

(중략)

1996-1998: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누나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엄마는 일을 하기 시작했어. 누나는 술값이 필요했고 나는 담뱃값이 필요했지만 엄마와 아빠는 등록금과 공휴일이 필요했지. 일 마치고 돌아온 엄마의 어깨를 주무르면 엄마는 문제집 살 돈이랑 학원 다닐 돈은 걱정 말라고 하셨어. 내가 문제집을 한권 한권 살 때마다 엄마의 어깨는 더욱 단단해졌네. 문제집의 권장소비자가격은 칠천원이었지만 권창섭이자가격은 만원이었지. (중략) 두 마이클은 목욕탕에서 마지막으로 일대일을 겨뤘고, 승리한 나는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되었지. 나이와 키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날부터. 난 다시는 나이키를 사지 않았어.

매거진의 이전글 누구도 벼랑 끝에 서지 않도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