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자전거 사고
아주 오래전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아파트 단지 안의 경사진 길을 자전거로 내려오던 아이가 브레이크를 잡지 못하고 인도에 서 있던 나를 덮쳤다. 그 사고로 병원에 꽤 오랫동안 입원했다. 그 이후로는 자전거를 보기만 해도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았으니 자전거에 올라 탈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살아왔다.
해외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전거가 새롭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연히 자전거로 세계 일주 여행을 하는 글을 읽은 후엔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는 지인에게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고 아이처럼 팔짝팔짝 뛰어가며 좋아했다. 그것이 벌써 5년 전. 아주 천천히 자전거에 오르는 연습을 시작으로 한강 자전거 길에서 자유롭게 타게 되었다. 팔당대교와 인천까지 다녀올 만큼 능숙해졌다. 자전거로 해외여행을 도전해보고 싶다는 소망에 조금씩 가까이 가고 있었다.
커브를 돌면서 자전거가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면서 발이 뒤틀리면서 발목이 하늘로 날아가는 고통을 느꼈다. 아기를 낳는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X-Ray 촬영을 하니 왼쪽 종아리뼈가 부러져있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했지만 5개의 병원을 전전하며 수술을 하지 않을 방법을 찾았다. 다행히 두 곳의 병원에서는 수술하지 않아도 뼈는 붙을 거라는 희망적인 진단을 했다. 깁스를 하고 뼈가 붙을 때까지 최대한 활동을 자제하라고 했다. 자연치유를 선택했다. 꽤나 긴 시간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산에도 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불편했다. 매일 정형외과에 갔다. 물리치료가 아니라 부러진 다리 부분의 신경 부분을 치유하기 위해 척추 부분에 엄청나게 큰 침을 맞았다.
4개월 가까운 치료와 관리 덕분에 다리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자전거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나와 자전거의 인연은 이제 끝났다. 거의 1년이 될 때까지도 산에 다녀온 날이면 다리는 더 아팠지만 산에 다닐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고 있었다.
작년 여름, 내가 참가하고 있는 모임에서 몇 분이 모두 같은 브랜드의 작은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바퀴가 아주 작았다. 마치 아이들이 타는 자전거 같았다. 보는 순간 저 정도면 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몸은 밀쳐내도 마음은 자전거에서 떠나지 못했음이다.
“한 번 타보실래요?
남궁박사님의 조용한 권유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작은 자전거에 다리를 걸쳤지만 안장에는 앉지도 못했다. 온몸이 굳어졌다. 자전거를 타기엔 트라우마가 너무 깊었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자전거에서 내려섰다.
”다시 올라가 보세요. “
”안장을 가운데로 하고 양쪽으로 다리를 놓은 다음 자전거 핸들을 잡고 걸어보세요 “
자전거 주인인 남궁박사님의 조언에 따라 자전거와 함께 걸었다. 다리 가운데 자전거를 놓고 걷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내가 자전거를 붙잡고 있으니 이젠 안장에 앉기만 하고 페달은 돌리지 마세요. “
남궁박사님께서 자전거를 붙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장에 앉았다. 잠시 후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갔다. 자전거가 구르니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무서웠다. 세상이 나를 향해 돌진했다. 5년 만에 자전거에 올랐던 날, 두려움 속에는 실낱같은 기대감이 스며들었다.
며칠 후 자전거 샵에서 데모용 자전거를 빌렸다. 몇 날 며칠을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지 않고 끌었다. 자전거를 향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두려움을 조금씩 지워갔다.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날, 페달에 발을 올렸다.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갔다. 불과 몇 m 앞으로 나아갔을 뿐인데 손에서는 진땀이 나고 온 몸이 굳어졌다. 회전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만 나가는 연습만을 반복했다. 나이 육십에 끌다시피 하면서 자전거를 타는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참 딱하게 생각하겠지만 나는 내 모습이 신기하다 못해 대견했다.
”오늘도 연습하러 가? “
아이들의 아침인사였다. 아이들은 자전거 연습을 한다며 매일 한강으로 나가는 엄마가 포기하기를 내심 기다리는 눈치였다. 스트레스받지 말고 즐겁게 살자는 엄마가 너무나 힘들게 자전거를 타겠다고 고군분투를 하고 있으니 아이들에겐 엄청난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큰딸아이는 굳이 힘들게 극복하려고 애쓰냐고 했지만 난 그 언덕을 넘어서고 싶었다. 언덕 너머로 펼쳐지는 세상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를 이미 알고 있기에 극복하는 과정 또한 내가 기꺼이 마주해야 할 숙제 같은 것이었다.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탔다. 서울에서 만족하지 않고 대전, 대구, 부산, 제주, 목포, 김천 그리고 신안 앞바다의 섬에서까지. 나의 자전거 일상은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일본으로 해외 원정을 다녀왔다. 그러나 트마우마는 완전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가 일어나면 어김없이 나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트라우마는 마치 휴화산의 용암처럼 불끈 솟아올랐고 페달을 돌리던 나의 두발을 멈추게 했다. 그럴 때마다 호흡을 깊게 몰아쉬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툴툴 털고 다시 페달을 돌렸다.
”달린 만큼, 꿈꾼 만큼, 행복해지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