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들은 '존엄'을 위해 싸워왔다
한국에는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차기 여당 대표가 있다. 나는 이준석 대표가 올리는 글보다 그 밑에 달리는 댓글에 더 절망했다. 장애인을 향한 온갖 욕설과 비하들로 도배가 됐다. 여당 대표가 힘을 실어준 혐오란 얼마나 그 위세가 등등할까 싶었다.
이준석 대표는 합리와 객관을 교묘하게 가장한 발언을 하고 있다. 과도한 행위처럼 보이니 멈춰야 하고, 타인의 권리는 손톱만큼도 침해하면 안 된다는 논리는 얼핏보면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과도한’의 기준을 누가 정했는지, 애초에 약자들은 강자들의 권리를 아예 누리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간과되고 있다.
사실 그가 내세우는 합리성은 지극히 권위적이기도 하다. 그는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가 배려받는 것에 대해서 동의한다. 물론 ‘실력있는' 자신과 기득권 세력의 시혜적 인정에 기반해서 말이다. 그에게 약자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고 권리를 요구하는 건 효과적이지 못한 일이다. 소위 엘리트 집단의 결정이 더 합리적이고 혼란이 덜 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책 <공정한 경쟁>에서 "'실력'으로 과학고를 갔고, 사람들이 저의 사회 활동의 이력에 주목하기보다는 실력에 관심을 보였다"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실력'의 상징은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과 미국의 오바마,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그에겐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곧 실력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껍데기만) 공정한 룰'을 적용해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거나 성공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권리를 요구하기 전에 자신의 실력 없음을 탓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 역시 그가 보기엔 실력이 없는 존재들이며, 약자들의 항의는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 실력이 있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대우해달라는 ‘부당요구’처럼 여겨질 뿐일 것이다.
문제는 그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 수 있게 만드는 ‘존엄’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 장애인, 소수자등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외주 주고 남이 ‘적당히’ 그것을 챙겨주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권리를 쟁취하고 그들을 둘러싼 장벽을 걷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동기에서 일어나는 저항들은 제 아무리 비이성적이고 과도하다고 누군가가 이야기해봐야 멈춰질리가 없다. 그게 바로 천부인권이 있는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니까.
3월 28일, 나는 일찍 경복궁역에 가서, 시각장애인인 김예지 의원이 안내견 조이와 함께 경복궁역 역사 안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봤다. 조이도 함께 몸을 엎드렸고, 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차마 보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이형숙 대표는 눈물을 훔쳤다.
남성 비장애인 당 대표가 아무렇지 않게 페이스북에 다른 당 정치인 조롱이나 할 때, 여성 장애인 정치인은 그를 대신해서 찬바닥에서 “죄송하다 사과드린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혹자는 ‘쇼’라고 하겠지만, 그럼 더 나은 정치인의 행동이 무엇인지부터 말해줬으면 좋겠다. 지난 금요일에 이준석 대표의 ‘이동권 시위 폄하 발언’이 나온 직후 바로 국회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던 것도 척수장애인인 민주당 최혜영 의원과 발달장애인 동생을 둔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오히려 김예지 의원의 연대는 초당적인 ‘반 혐오 연대’(하지만 남성 비장애인 정치인의 존재감은 없는)에 가깝다.
요즘 비참했던 기분이 그나마 수많은 시민들의 연대를 보면서 나아지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곳에서, 그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정과 실력을 내세우는 가운데 혐오를 내재하고 있는, 그런 정치는 무관심과 냉소를 먹고 클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