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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Apr 18. 2022

모욕에 맞서는 방법

폭력은 나쁘다, 그러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윌 스미스가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린 것은 부적절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타인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옹호하긴 어렵다. 그와 아내인 제이다 핑킷 스미스가 크리스 록의 말을 '모욕적'이라고 느꼈다고 해도, 그들에겐 물리적 폭력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반박하고 맞설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었다. 다만 내겐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대응했어야 할까?


모욕감을 느꼈을 때 능숙하게 대응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특히나 농담이나 유머를 가장한 모욕일 때 더더욱 그렇다. 남들이 다 웃고 넘어갈 때, 우리는 그 분위기를 망치기 두려워한다. SNS 상에는 무례한 농담에 대응하는 온갖 '사이다' 썰이 쏟아지지만, 슬프게 그 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농담'이나 '장난'을 가장한 모욕들에 정색하고 달려들어봤자 손해 보는 것은 나다. 그건 어릴 적부터 내가 느껴왔던 감정들이기도 하다.


살이 쪄서 이런저런 놀림을 받아온 나는 꽤 소심한 아이였다. 중학교 시절에는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도시락이나 가방을 일부러 숨긴다든가, 앉으려는데 뒤에서 의자를 뺀다든가 등등. 그밖에 농담을 가장한 언어적 모욕들. 이건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중2때 1학기 동안 한 남자아이에게 유독 괴롭힘을 당했다. 그는 나를 때리지 않았다. 하지만 놀리고 괴롭혔다. 나를 화나게 만들고, 화를 내면 '장난이야'라며 무안하게 만들었다. 이건 일종의 굴레다. 화를 내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화를 안 내고 가만히 있으면 더 자극을 한다. 정중한 사과 요구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수학 기말고사를 보는 날 아침에 작정하고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수학 성적이 잘 안나와서 고민인 상황이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로서는 그것만이 현재의 힘든 상황을 벗어날 유일한 해결책으로 여겨졌다. 그는 힘이 셌고 내가 먼저 때렸지만 더 맞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는 시험이 끝난 뒤에 사과했고,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2학기에는 아주 편하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세상에 '맞을만했다' '맞을만한 일'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행위는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특히나 비물리적 폭력에 물리적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안 된다'라는 말은 의문이 든다. 어쩌면 개인에게는 오로지 그런 선택지밖에 안 남은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모욕적인 말이나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항상 그런 상황은 우연히 갑작스럽게 다가오고, 나의 경우 대부분 가까스로 웃고 넘어갔다. 나는 젊고 덩치가 있는 남성이며, 직업적으로도 무례한 농담에 노출될 일이 드문 편이다. 그럼에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하물며, 약자라는 위치가 두드러질 수록 이런 모욕은 일상적일 가능성이 높다. 록산 게이가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쓴 것처럼 사회는 끊임없이 개인에게 '무던해지고 참아내길' 요구한다. 그건 고작해야 권력을 갖고 있는자들의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위해서다. "무슨 말을 못 한다"라는 불평은 모욕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보다 훨신 크다. 'When they low, we go high'라는 구호는 이상하게 변형되어서, 인내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쓰인다.


몇 달 전에 반려자와 함께 아버지의 지인을 만났다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두 번째 책이 나오기 전이었는데, 내가 책을 낸다고 하니까 갑자기 그는 내게 "박원순처럼 되지 말고"라고 했다. 그전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 정황상 그는 농담으로 그 말을 한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뭐라 답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자리가 끝나기까지 나는 내 기분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고, 나중에 반려자와 구시렁거렸을 뿐이었다. 


어떻게 했어야 할까. 솔직히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더라도 화를 내거나 바로 반박하는 걸 상상하긴 힘들다. 그리고 다른 모욕적이고 기분 나쁜 상황을 되돌아보더라도 내가 곧바로 대응한 경우는 드물었다. 


'나쁜 농담'에 맞서서 '뺨'을 때리면 안 된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또한 당사자도 아닌 아내를 대신해서 복수하듯 때리고, "내 아내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마"라고 한 것은 마초 가부장의 행태에 가깝다. 그걸 두둔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슬프게도 더 나은 형태의 반박과 대응이 무엇일지도 역시 모르겠다. 정중하게 품위 있게 반응하는 것? 또 다른 '조롱'으로 받아치는 것? 말만 쉽다. 농담이 너무 맥락없이 허용되는 반면에, 그에 맞서 화를 내는 것에 대한 반응은 관대하지 못하다. 예민하고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처럼 여겨질 뿐이다.


누군가를 조롱하면서, 특히나 질병이나 신체적 약점을 언급하면서 웃음을 주는 방식을 우리는 꽤 익숙하게 들어왔다. 화자와 나 이외의 청자들이 모두 '와하하' 웃어주면, 혹은 화자가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 맞설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건 상당한 수준의 폭력이다. 이번 논란에서 '그래도 물리적 폭력은 안 된다' 그 너머를 논해야 하는 이유다.


'불편하다'라는 말은 여전히 매우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말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사실 '불편하다'라는 말은 매우 맥락적이고 관계에 기반해 있기도 하다.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라는',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사이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편하다'라는 말은 언제나 쉽게 기각되는 단어다. 누군가의 '불편하다'라는 표현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온갖 농담과 장난과 성희롱에 왁자지껄 웃는 것이 '도리'처럼 여겨진다면, 그런 세상이 누가 더 살기 좋은지는 명백하다. '불편하다'라는 말을 무시할 수 있는,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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