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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Sep 19. 2018

백래시의 대리인을 찾습니다: 오세라비는 어떻게 탄생했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에 들어맞았다


점입가경이다. 페미니즘 명저인 <백래시>의 저자 수잔 팔루디가 기조 연설을 하는 '이데일리w페스타'(전 세계여성경제포럼)에 오세라비씨도 토론 연사로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최측의 의도가 무엇이었든간에, <백래시>의 저자와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로 페미니즘 열풍을 비판하고 있는 오세라비씨가 함께 초대된 것은 상징적이다. (정정: 17일 저녁에 이 사실이 알려졌고, 18일 저녁에는 패널 명단에서 오세라비씨가 제외됐다) 오세라비씨가 누구이며, 어떤 주장을 펼치는지는 이 글을 참고 (http://workers-zine.net/29344).


여성학계나 여성단체 활동가들 사이에서 무명에 가까운 인물인 오세라비(이영희)씨는 어떻게 책 한 권을 낸 지 두 달만에 주목받는 '여성운동가'가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책이 학문적으로 뛰어나거나 논쟁적이기 때문일까? 당연히 아니다. 다만 그의 생각이 '오빠가 허락하는 페미니즘'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니, 심지어 성별임금격차 같이 명백한 차별마저 없는양 말하면서 '할배가 허락하는 페미니즘' 수준으로 나아가버렸다. 최근 페미니즘 조류가 마뜩잖은 남성들 입장에서는 '다른 여성들은 이렇게 생각한다더라, 너희는 극단적이야'라고 말할 레퍼런스가 생겼으니 그야말로 대환영일수밖에 없다.


오세라비씨는 이례적으로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이슈를 만들고 싶어하는 미디어 입장에서는 '현재의 페미니즘 조류를 비판하는 여성(사회)운동가'라는 캐릭터나 그의 목소리가 흥미로울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서 그의 이야기가 특정 독자층이나 언론사 내부의 요구와도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8월 초까지만 해도 서울신문과 매일신문 정도가 책을 소개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세계일보가 8월 7일 인터뷰 기사를 내고, 9일엔 오세라비씨가 직접 tbs fm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서 '워마드=요즘 페미니즘'으로 싸잡아 비난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오세라비씨의 뉴스공장 인터뷰에 관해 총 18건(네이버 검색 기준)의 인용보도가 있었고, 그중 1건(오마이뉴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받아쓰기 보도였다. 오씨는 한동안 잠잠했다가 8월 31일 이데일리 인터뷰, 9월 3일 시사위크 인터뷰, 15일 뉴시스 인터뷰를 진행하며 주가를 올렸다. 심지어 16일에는 아시아경제에서는  오씨의 활동을 근거로 <극단적 페미니즘에 반격 나선 여성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이 기사는 포털사이트에서 20대가 가장 많이 본 기사로 오르기도 했다. ('들'이 아닐텐데)


오세라비씨는 페미니스트들 입장에서는 논쟁에서의 최소한의 전제를 깨트린 사람이나 다름이 없다. '여성이 극심하게 차별받고 있으니, 이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미러링 전략의 실효성을 논하는 수준의 토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애초에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을 '1그램의 이론에 1톤의 피해의식'(뉴시스 인터뷰)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해질수밖에.  


그런데 사실 오세라비씨의 출현은 예견돼 있었다. 요 몇년간 이어지는 페미니즘 흐름에 불편함을 느낀 남성들이 많았다. 특히 '진보 아재'들은 당황함을 감추지를 못했다. 그분들의 반응은 대체로 '나도 페미니즘 지지하지만 이건 아니지'였다. 여성들의 과격한 언어 사용, 공격적인 메시지, 끊임없는 문제제기 등에 대해 진보 아재들은 '비이성적'이라고 여긴듯했다. 점잖으신 분들은 대놓고 페미니즘을 비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종종 워마드의 혐오발언 문제를 지적한 기사나 여성들이 '과도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칼럼을 공유하며 위안을 삼는것처럼 보였다. 즉 오세라비씨에 대한 주목은 수요가 공급을 만든 경우다. 


자신이 파악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흐름이 있다면, 적어도 '왜 그럴까'라고 의문을 가져야 하는데, 진보 아재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까내리기에 바빴다. 이 점에 문제의식을 느낀 강준만 교수는 최근에 낸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에서 스스로를 '진보적 남성'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얼마나 페미니즘에 해악을 끼쳤는지 시간의 순서대로 보여준다.



강 교수는 "진보는 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을 내세워 페미니즘을 관리하려 들었기에 맞짱을 뜨기엔 좀 주저되는 상대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보수보다는 진보가 고약한 페미니즘의 적일 수도 있는게 아닐까?"(219p)라며 한 예로 탁현민 행정관 논란과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 사건으로 인한 페미니즘과 진영논리의 충돌을 든다. 실제로 진보 아재들은 까다로운 상대다. 진보 아재들 중 소위 '네임드'들은 인권의식이 높고 성폭력 성차별에 대한 경각심도 상당하고, 그러기에 페미니즘도 어느정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 대다수가 유독 메갈리아 이후의 페미니즘에 대해선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서 더 이성적인 페미니즘, 더 생산적인 페미니즘, '진정한' 페미니즘을 찾는다.


그런데 말입니다. 애초에 그들이 말하는 '이성적'이라는 개념은 남성으로 상징되는 국가와 가부장제가 만든 질서와 상식에 부합하는게 아닐까? 이재용 판결에 분노하던 사람들이, 안희정 판결에 대해선 '어쩔 수 없다'며 되레 분노하는 사람들을 비웃을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이성'이 취사선택에 가깝다는 것을 실감했다. 생산적이지 못하고 남혐만 일으킨다는 주장도 있지만, 메갈리아 이후의 페미니즘이 만든 이 변화들을 보고도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할 건가. 그래서 남혐 현상이 생겨서 남성을 향한 채용성차별이 일어나거나 남성 대상 성범죄가 급증했나?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결국 '나=보편'으로 생각하고, 나와 내 주변이 거슬리지 않아야 하는 '남성중심적 페미니즘(?)'이 아닐까. 


나 또한 '페미니즘 조류'를 비판한 적도 있었고, 미러링을 넘어선 폭력적인 언어들을 접할 때마다 거북할 때가 종종 있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은 언제나 그 유혹이 강력하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어떤 단면만 보고 비난하거나 '과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종종 '아재 천국'인 다음 뉴스의 댓글을 보면서 메갈리아 이전 여성들이 인터넷을 하면서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상상해보기도 한다. 남성들이 폭력적이고 과도하다며 길길이 날뛰던 그 말들이 여성들에겐 일상이었다.


미투는 잊혀가고 있으며, 반격으로 인해 왜곡되고 있다. 가부장적 남성들은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망원경은 꼭꼭 숨긴 채 페미니즘의 흠을 잡기 위해 현미경을 들이대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다. 점잖은 사람들은 혐오와 싸움은 좋지 않다며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사람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강요하고 있다.(353~354p)


강 교수가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에서 정확하게 짚은 현재의 상황이다. 남성들은 반격을 위해서 현미경을 들이대며 흠을 잡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 '생물학적 여성'을 호명해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무명에 가까웠던 오세라비씨를 확실히 띄워준 사람이 '나꼼수 비키니 응원',  '미투 음모론', '정봉주 옹호'등으로 논란이 된 김어준씨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측면이 있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를 촉발한 '나페미' 이후로 3년 반이 지났다. 적어도 이제 남성들은 본인이 '옳고 그른 페미니즘'을 규정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페미니즘의 구호가 불편하게 느껴질 때, 단순히 '불편하네'가 아니라 '왜 불편할까'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중립', '이성적',  '온건한 페미니즘' 등의 유혹적인 말들 속에서, 남성들은 조금만 느슨해지면 백래시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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