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훈 Oct 19. 2018

이창동이 말하는 '청년'에 여성은 없다

<버닝>은 이창동이 생각하는 남성청년들의 이야기일뿐

이창동은 <버닝>을 '젊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혔다. 어떤 젊은 사람? 바로 종수(유아인 분)와 해미(전종서 분)같은 사람의 이야기다. 종수와 해미는 미래가 없는 청년들이다. 자본주의가 주변부로 밀어낸 사람들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인용하자면 이 사회에서 이들의 존재는 '여분의', '불필요한', '쓸모 없는 것, 한마디로 '쓰레기'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인물들이다. 바우만은 "설계가 있는 곳에 쓰레기가 있다"고 말한다. 집이 풍비박산나고 소설을 못 쓰는 있는 소설가 지망생 종수, 카드빚이 있는데도 아프리카 여행을 가는 해미는 자본주의적 설계에 맞는 인간형으로 포함되지 못한다.  


"이들 남녀들은 직업, 계획, 지향점, 자기 삶을 틀어쥐고 있다는 자신감을 잃었을 뿐 아니라 노동자로서의 존엄, 자존심, 자기가 쓸모있는 사람이며 자신만의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박탈당했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35p>"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신용이 높고 세금을 잘 내고 제대로 '소비'하는 인간을 원한다. 그 반대의 인간은 체제의 안전과 정상적 작동을 위해  '처리'해도 된다고 믿는다.  


"종수가 사는 공간은 곧 없어질 공간이다"라는 감독의 말을 보면 파주 역시 '쓰레기'의 공간이다. 바우만이 이 책에서 제시한 '유동성'의 개념에 따르면 경제적 진보는 농업 등 기존의 삶의 방식을 박탈하고 '바람직한 것'을 재정의했다. 한때 설계의 과정에서 바람직한 것이었던 농업이나 농촌공동체는 이제 설계를 통해 잉여가 되어버렸다.  


벤(스티븐연)이 (농촌에 주로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했던 것은 정상/비정상, 쓸모있음/쓸모없음을 구획한 설계자, 즉 시스템의 목소리다. 그는 '낡고 쓸모없는 것'을 태운다고 말하면서도, '낡고 쓸모 없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낡고 쓸모없는 것'을 구획하는 것은 사회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벤이 상징하는 시스템은 보기엔 매우 풍요롭고 배려가 넘쳐보인다. 언제든지 쓸모있는 것들의 세계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시스템은 공정하게 설계되었고, 당신들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위장이다.  


그러나 종수는 그 시스템이 인정하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벤이 자신을 부르거나 도발하면 거기에 속절없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서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벤을 보면서 깨닫고 무력감을 느낀다. 무력하고 불확실한 삶은 공포스러울수밖에 없다. 


반면 삶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들에 관심이 있는 해미는 이 사회의 설계를 위협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는 일몰이라는 '경계'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며 시스템이 자신에게 부여한 분명한 선을 부순다. 그리고 그 이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그는 종수에게 두 가지 수수께끼를 남긴다. 우물의 존재와 자신이 기른다고 주장하던 고양이 보일의 존재가 그것이다. 둘 다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결국 스스로 우물과 고양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면서 일종의 '믿음'을 서서히 갖게 된다. 믿음은 무력감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상하차로 추측되는 알바를 갔다가 관리자의 권위적 태도를 못 이기고 뛰쳐나온 것은 그의 변화를 상징한다. 


특히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 소설을 못 쓰고 있었던 그는, 우물에 대해 믿게 된 이후 이어서 벤의 집 주차장에서 본 고양이가 보일이라고 믿게 된 후 소설을 쓰게 쓴다. '소설 쓰기'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재정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의 버닝이 소설의 내용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종수가 무엇이든간에 '믿음'이 생겼고, 그것이 설계자를 죽이고, 설계를 통해 찍힌 자신의 낙인을 벗어던지는 동력이 된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을 일종의 복수 서사나 민중 서사로 볼 순 없다. 종수는 애초에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고, 혹은 복수하겠다고 '버닝'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쓰레기'를 벗어나, 욕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인간으로. 


이런 결말이나 전체적인 메시지를 보면 해미의 캐릭터 설정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꿈(그는 아무데서나 잘 잔다)과 현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오가며 "필요할 때는 거짓말까지 한다는" 평을 듣는 '욕망하는 청년'이다. 앞서 말했듯 그는 시스템이 쳐놓은 구획을 경계를 거닐며 비웃는다.  


그런데 이런 해미가 갑자기 "벤 오빠는 나같은 사람이 마음에 든대"라며 자연스럽게 시스템의 유혹에 빠진다. 너무 손쉽게 시스템의 정상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욕망'을 잃고 저 '위장'에 넘어간다는 것부터 내겐 설득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순교'를 하느냐? 천만에. 결과적으로 그는 주인공을 각성시킬 '단서'만 제공한채로 사라지는 '도구'가 된다.  


물론 그는 현실 속의 여성을 상징하는 것일수도 있다. 누구보다도 쓰레기를 만드는 시스템의 '설계'에서 쓰레기로 전락할 위험이 큰 것은 분명 남성보다도 여성이니까. 그러나 적어도 해미의 희생을 그릴려면, 해미가 왜 희생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그렸어야 한다. 영화를 보면 그저 '여자여서' '주제넘게 카드빚이 많아서' 죽었다는 걸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여성 청년들은 실제로 '이유없이' 많이 죽는다. 생면부지의 사람에 의해 혹은 가장 친한 사람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성차별을 통해 구조적으로 배제당해 사회적 죽음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그런데 <버닝>에서는 이런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는 없을뿐더러, 해미의 모든 행동이나 말이 일관성도 없는 '미스터리'의 상징으로서만 그려진다. 대체 어떤 여성 청년이 이 영화를 '내 이야기'라고 공감할 수 있을까?  


얼마전 '성판매여성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에 실린 글들을 모은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를 봤다. 이소희씨의 글은 우리 사회가 시스템 밖으로 몰아내 성판매를 하게 되는 여성들이 처하는 현실을 그렸다. 성판매를 하는 여성들은 모든 종류의 폭력에 노출되며, '그 폭력에 맞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여성을 착취하는 공고한 구조 대신 '개인'을 비난하기에 급급하다. 비참한 상황에 처한, 시스템이 배제한 남성은 적어도 동정의 대상이 되거나, 분노의 주체로 호명될 수 있다. 이해해주려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 여성은 삶의 맥락이 조명받지 못하고 모든 행위의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된다. 배우자 살인 사건에서 남성과 여성의 형량차이만 봐도 알 수 있다. 여자친구를 죽인 남성에게 집행유예를 내리면서 재판부는 "다른 남자가 생긴 사실을 확인하고자 다그치는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창동이 여성 청년이 처한 현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폄하할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종수의 '버닝'에 집중한 영화이니만큼 해미를 입체적으로 그리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쓰레기가 되기 싫어' 끊임없이 욕망했던 한 청년이 사라지는 것에, 아무 이유도 제시하지 않는 서사가 어떻게 '청년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 청년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창동이 생각하는 남성청년'의 이야기일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성비하’ 없이는 예술 못하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