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훈 Oct 20. 2018

남성들이 함께 부끄러워했으면 좋겠습니다

1. 2015년부터 일어난 거대한 페미니즘 물결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가 한참을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예전부터 젠더감수성 떨어지는 '진보 남성'들을 비판해오긴 했지만, 그간 여성들의 고통과 분노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만 접근한 것도 사실이다. 나의 페미니즘도 '업데이트'가 필요했다. 


일상속에서도 페미니즘이 쟁점이 되기 시작하면서, 나의 실천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전처럼 내가 점잖게 당위만을 이야기 하는것은 오히려 주제넘는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안티페미나 성범죄자 등등에 대한 분노도 그렇다. 물론 같이 공분하는 것도 연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성들의 강한 분노 표출은 결과적으로 '나와 저들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분노하기 이전에, 이 구조를 만드는데 나와 같은 남성들이 얼마나 기여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2. 그래서 나의 페미니즘 글쓰기의 주된 주제는 '반성'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글을 쓰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글 속에서 비판하고 공격했던 남성들의 생각과 행동들은, 나 자신과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의, 어쩌면 현재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던 적이 많았다. 여혐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도 내면화했고, 남성으로서의 편리를 당연시 여기며 살았다. 여전히 남성에게는 '숨쉬듯 당연하지만', 여성은 얻기 힘든 부당이득을 누리고 있기도 하다. 이런 사람이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며 "여혐하지 마시오"라며 준엄하게 누군가를 꾸짖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스웠다.


매번 이런 생각을 갖고 글을 쓴다. '나도 부끄러우니, 당신도 조금은 부끄러웠으면 좋겠다'. 결국 '남자'가 문제고, 남자들이 변화해야 하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어느 나쁜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우리가 공유하고 방조한 그 문화가 더 큰 문제라고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반성이 면죄부는 되지 않지만, 적어도 앞으로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경각심은 끊임없이 줄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강남역 여성살인사건의 살인범은 화장실에 들어온 6명의 남성들을 그냥 보내고 여성에게 범죄를 저질렀다 . 그런데도 많은 남자들은 그것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말했다. 부끄럽다.


3. 소위 '남페미 논란'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발화권력이 있는 남성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뉘앙스만 풍겨도 온갖 찬양을 받는데, 그 반대는 오히려 배척당한다는 이야기.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남자는 닥치고 있으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해는 한다. 실제로 진보적인 남성들이 '의도와는 다르게 묘하게 '맨스플레인' 스러운 글을 쓰는 경우도 많으니까.


하지만 여성들이 이만큼 판을 만들어줬는데, 남성들이 가만히 있는 것 역시 문제라고 본다.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이야말로 현 체제를 지키기 위한 묵인 내지는 동조라고 본다. 되도록 많은 남자들이 이 페미니즘 흐름에 조응을 해줘야한다. 그래야 남성집단 내부에 균열이 나서, 쿰쿰한 남성연대의 냄새가 빠지고 신선한 바람이 들어갈 수 있다. 여성들이 계속 성평등 여론을 만들며 제도를 바꿔나가고 있으니, 나도 발맞춰 '남성집단'이 왜 문제인지를 '남성들에게' 계속 이야기할 생각이다 .


모든 젊은 남성들이 백래시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을 지지하지만 티를 못 내기도 하고, '성평등'이 맞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실천방법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함께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향해 글을 쓴다. 제발 우리 예전처럼 살진 말자고.


4.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놀란다. 의외로 내가 '페미니즘' 관련 글을 페이스북(브런치)에 써왔다는 사실을 많은 친구들이 알고 있어서다. 좋아요나 공유도 안 눌러주는 친구들은 내가 뭘 하는지조차 모르는 줄 알았는데, 글을 잘 보고 있다는 그들의 격려를 듣고 기뻤다. 또 어떤 친구(남자)는 페북 훔쳐보는 '애독자'라며 안부를 물어오기도 했는데, 그게 참 힘이 많이 됐다.


공유하고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들도 꽤 많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독자들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내 글의 '쓰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의외로 많은 남자들을 '찔리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한남'이라는 말을 안 쓰고 과도한 조롱투를 지양하는 것도, 어떤 한 명의 남성이라도 더 읽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좋아요를 누르거나 공유하지 않더라도,  독자 중에 단 한명의 사람만이라도 설득시킬 수 있다면, 아니 조금 부끄럽게만 할 수 있어도 그 글은 성공한 것이라 믿는다. 


5. 흔히 남성이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수용하며 해방감을 느낀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나는 페미니즘이 끊임없이 나로 하여금 '폭력'과 '혐오'에 대해 경계하게 만들수 있게 했다는 점이 좋았다. 또한 항상 보편과 정상의 위치에서 사회를 바라보던 내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면서 비교적 다양한 시각을 수용할 수 있게 됐다.


2015년 이후의 나는 분명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보는 남성인 당신도 그러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창동이 말하는 '청년'에 여성은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