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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Oct 27. 2018

황교익은 왜 모성신화에 집착하나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황교익이 시대착오적인 이유

"젖 맛 같은 음식을 먹고 싶다"


황교익은 2009년 1월에 쓴 <다시 한번, 음식은 사랑이다>라는 글의 서두에, 자신의 책에 쓴 '젖 맛 같은 음식을 먹고싶다'는 말을 인용한다. "인간이 태어나 처음 먹는 것은, 그것도 2~3년간 줄창 먹어대는 것은 '사랑"이라면서 말이다.


그가 2008년 1월에 쓴 <슬로푸드와 한국음식>이라는 글에서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 '슬로푸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황교익이 생각하는 슬로푸드의 정의 역시 '엄마'와 맞닿아있다.


"집에서 먹어온, 우리 할머니 어머니가 손끝 정성으로 만든,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음식. 이게 한국의 슬로푸드일 것이다."


지난 18일 방송된 EBS <질문 있는 특강쇼>를 보자. 그는 방청객이 '한국의 맛이다'라고 추천할 게 있냐고 묻자 또 다시 '엄마'를 언급한다.


"인간이 태어나서 젖 떼고 처음 먹는 음식들은 거의 다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다. (엄마의 손맛?) 그렇죠. 아마 엄마가 해준 음식 그건 아마 죽기 전에 먹어야 할 음식..."


EBS <질문 있는 특강쇼> 의 한 부분

이렇듯 황교익은 모유와 엄마가 해주는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집밥을 음식의 '이데아'로 여긴다. 식생활에서 엄마의 행위를 절대시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황교익이 백종원을 비판하는 이유 또한, '음식 포드주의자' 백종원이 사회적으로 '엄마 자리'를 차지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황교익의 분석(질문있는 특강쇼)에서 백종원은 '모유'가 아닌 '분유'에 길들여져 '단 맛'에 익숙한 80~90년생에게 단맛을 무비판적으로 허용해서 팬덤을 만든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2015년 7월 <문화일보> 칼럼에선 "백종원을 ‘백주부’라고 한다"며 "('백주부'를 '백종원 엄마'라고 풀면) 대중이 백종원을 통해 얻으려는 건 '엄마의 사랑" 이라고 지적했다. 젊은이들에게 백종원이 '대체 엄마'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황교익은 '80~90년대 맞벌이가 늘어나면서 엄마의 부재가 발생했고, 거기서 생기는 문제 혹은 결핍에 대해 백종원이 '해결사 역할을 하므로 인기가 있다' 고 여긴다. 그런데 그의 비판이 단순히 백종원만을 향한다면 별 일이 아닐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황교익의 말과 글이 결과적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황교익은 <문화일보> 칼럼에서 부모가 사랑을 못 줬다고 말하지 않는다. 정확히 엄마를 지적한다. "1980∼1990년대생에게 발견되는 결핍은 엄마다. 엄마의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이후 비판이 들어오니 블로그에 "맞벌이부부의 심중을 아프게 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며 "그러나 이건 사실이다. 우리 안의 결핍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 그 결핍을 가지고 장난하는 자본에게 당하지 않게 된다."라고 쓰기도 했다.


또한 황교익은 '질문있는 특강쇼'에서 모유 수유률이 떨어지는 부분을 문제 삼는다.  '단' 분유나 공장제 이유식을 먹던 아이들이 성장해서 갑자기 (달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이 자리에서 '쓴 맛' '신 맛'등은 원래 본능적으로 못 먹는 맛이라고 지적하며 "엄마가 쾌락을 복사시키면서 먹을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엄마의 부재가 결국 아이의  '결핍'을 만들며, 이는 잘못된 식습관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황교익의 발언은 그 의도가 어떻든 모성신화의 반복에 불과하다. 여성, 특히 젖을 줄 수 있는 엄마만이 적절한 양육자라며, 아이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엄마에게 있다고 외치는 꼴이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평론가의 음식관이 '엄마' 본질로 두고 있다면, 과거처럼 전업주부가 줄어드는 사회는 식생활에서 결국 엄청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그런데 황교익은 딱히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백종원이 그런 '문제 있는 사회' 이용하는 자본가라고 비판할 뿐이다. 이러니 '여자는 집에서 애나 봐야지'라는 생각을 가진 성차별주의자가 아닌 이상, 그의 의견에 반발할 수박에 없는 것이다.


수많은 비난에도 황교익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말했다시피 '그래도 이것은 사실이다'라고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떤 말은 근거가 없고, 어떤 말은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그가 '백종원 열풍'의 근거로 제시하는 80~90년대생 '설탕중독'은 근거가 있을까? 2012년 식약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1인당 하루 평균 당 섭취량'을 보자. 만30~49세는 66.7g, 만19세~29세는 65.7g, 만12~18세는 66.2g이었다. 중장년층 섭취량이 가장 많다.  2014년 식약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총 당류 섭취실태 평가'는 약간 다르다. 만12세~18세는 69.6g, 만19세~29세는 68.4g, 만 30세~49세는 65.3g이다. 청소년 섭취량이 가장 높다. 전자는 말할 것도 없고, 후자를 보더라도 3~4g의 차이를 '설탕중독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물며 이것을 80~90년대 어머니의 결핍과 분유 섭취의 문제로 치환시킬 근거가 대체 어디있는지 모르겠다.


맞벌이 부부 자녀들이, 혹은 분유를 먹은 아이들이 설탕을 유독 많이 먹는다는 근거조차 없다.

더 큰 문제는 황교익이 근거도 불분명한 '설탕중독'의 극복 방법으로 '모유 수유'와 '엄마가 책임지는 육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아비가 대리어미 노릇을 할 수는 있어도 '아비에게는 젖이 없다'는 생물적 조건으로 인한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덧붙이자면, 그래서, 나는 탁아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보육정책에 반대한다. 국가는 적어도 7세까지 아기와 어미가 충분한 애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하여야 한다."(2016년 4월 페이스북)


그러나 이 역시 '명백한 사실'을 근거로 한 발언이 아니다. 유명한 할로우의 붉은털원숭이 실험 ('헝겊엄마'-젖병이 있는 '철사엄마' 중 헝겊엄마를 더 좋아했다는 것)을 예를 들어  "수유가 애착 형성에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다(교육심리학, 학이시습)"라는 의견도 있다. 아동상담 전문가 이보연은 "아기가 낳은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나 양부모가 키웠을때에도 안정적인 애착이 형성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외려 꼬박꼬박 모유 수유를 하는 것만으로는 안정적인 애착을 보장할 수 없다"(0~5세 애착 육아의 기적)고 밝힌다.


황교익은 자신의 이론적 토양을 '존 볼비의 애착이론'에 있다며 자신의 말을 '반여성주의적 시각'이라고 공격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혹시 알고 있는가? 볼비가 1977년 케임브리지에서 명예학위를 받을 때 페미니스트들이 시위를 했다는 것을. 볼비 개인뿐만 아니라 애착이론의 근거로 삼은 진화생물학은 아주 오래전부터 여성주의와 큰 갈등을 빚어왔다.  최소한 볼비의 이론이 어떤 비판을 받아왔는지는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진화생물학을 받아들이면서도 내부에서 다른 시각을 제시한 '다윈주의 페미니스트 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는 볼비의 애착이론이 '일하는 여성'들에게 '딜레마'였다며 "점점 더 많은 수의 여성이 애착 이론을 일종의 저주로 여기고 있었다(...) 유전학적 부모 중 오직 한 성별만이 다음 세대로 전수되는 '불행'을 막기 위해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야 했다"고 지적한다. (책 <어머니의 탄생> 중)


허디는 학자로서 볼비의 이론을 수용했지만, "모델의 일부 측면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허디는 '대안적인 아이 보기 체계'가 인류학적으로 흔했으며, 협동적 보살핌의 결과도 좋았다고 말한다. 또한 '대행어머니'가 '어머니'보다 헌신적이면 그 애착이 더 우월할 수 있다고도 강조한다.

쉽지 않은 책. 하지만 진화생물학의 남성중심적 시각을 보완해준다.


이어 허디는 "이 분야에 있는 모든 연구자는 '무관심한 보육시설 조차 가정에서의 아동 방치에 비해서는 낫다고 말한다"며 "자신의 아기를 돌보는 것에 대한 어머니의 대안은 그(볼비)가 깨달았던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그는 "애착은 젖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영아는 젖가슴보다 젖을 빨리 전달해주는 고무 젖가슴을 쉽게 가려낸다. 아기는 우윳병을 젖가슴보다 더 선호하는 학습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허디 정도는 아니더라도 황교익이 자신의 말처럼 "국민들이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면 존 볼비를 현 한국사회에 맞게 재해석하는 정도의 노력은 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지 않고서 자꾸 자신의 음식관을 설파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여성혐오적 목소리를 하나 더하는것밖엔 안 된다.


반면 그가 그렇게 비판하는 백종원은 무엇을 했는가. 백종원은 "난 대중이 뭘 좋아할지 아는 게 전부" (2016.11 한겨레 인터뷰) 라는 말처럼 시대의 흐름에 맞춰갔다.적어도 황교익보다는 '건강한 식생활'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집에 황교익이 생각하는 '요리 잘하는 엄마'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직접 요리한 음식'이 편의점 음식이나 레트로트보다 건강에 좋고 설탕 역시 덜 섭취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1인가구나 속칭 '밥줘충'에 가까운 평범한 남성들에게 "직접 해봐, 쉬워유"라는 메시지를 주고 분위기를 만들어준 것은 큰 공이다. (참고: 집밥 이데아를 건드리는 것이 못마땅한 사람들)백종원 레시피의 경쟁자는 '엄마의 집밥'이 아니다. 편의점 도시락이다.

 

엄마의 집밥은 황교익 생각처럼 '궁극의 것'이 아니다. 사실 가공식품의 생산이 늘어나면서 전업주부가 있는 집에서도 햄이나 공장제 음식을 먹고 아이들이 자란다. 요리를 못하거나 어려운 부모들에게 백종원 레시피는 '구세주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백종원이 한 명이라도 더 요리를 하게 만드는 동안 황교익은 현실은 고려하지 않고 계속 '엄마의 맛'을 외쳤다. 더불어 '일하는 여성'에게 죄책감만 씌웠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백종원이 남성의 요리 참여 유도, '간단한 레시피'(일하는 여성을 위한) 등으로 페미니즘'에 조응해 나갔다면, 황교익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들이 듣기 싫은 '바른 말'을 해서 황교익을 비난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tvn <집밥 백선생>의 한 장면


2010년에 홍대에 있는 '홍콩반점'에 가서 엄청 맛있는 짬뽕을 먹었고, 그즈음에 '미식'에 관심이 생겨 황교익의 블로그 역시 구독해서 보기 시작했다. 8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그때에 비해서 상상할수 없을만큼 유명해졌고, 성공했다. 한 명은 외식 사업가이자 엔터테이너로 주목받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남북정상회담 만찬을 기획하는 음식평론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두 명에 대한 평가는 다들 알다시피 굉장히 판이하다. 나는 그것이 단순히 긍정과 부정의 태도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페미니즘', '1인가구' 등 사회의 흐름에 맞춰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대중의 평가라고 본다.


황교익이 진정으로 '국민의 건강한 식생활'과 미식의 대중화를 꿈꾼다면 '설탕수저론' 대신 '올바른 식재료 활용법'에 대해 설파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그는 무엇보다 '식재료'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기자 출신으로 전국을 돌아다닌 덕분일테다. 천일염이나 활어회 등 식재료에 대한 문제제기는 사회적으로 유의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디 그가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길이 무엇인지 조금 더 고민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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