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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Jun 07. 2019

가부장의 시대는 끝났고, ’땐뽀걸즈’는 떠날 것이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하게 일하고 싶다

- 2002년 울산

조주은(현 여성가족부장관 정책보좌관)씨가 쓴 <현대가족 이야기>는 가부장제와 자본의 공조로 이뤄지는 가족 형태를 진단하고, 그 안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어떻게 규정되고 제한되는지 보여준 역작이다.


실제 한때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자의 아내로 살았던 저자는 여성학을 서울에서 공부하고 다시 울산으로 내려왔고, 연구를 위해 현대차 남성 생산직 노동자와 결혼한 전업주부 18명을 만났다. 2001년부터 2002년 사이, 약 6개월에 거친 인터뷰와 현장연구를 통해 그는 정규직 노동자가족의 '가정중심성'(가부장제)과 이를 뒷받침하는 대자본의 전략을 설명한다.


당시 현대차 노동자의 아내들에게 결혼은 자신을 괴롭히거나 혹은 부양의무를 져야하는 원가족으로부터의 탈출임과 동시에,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시장을 벗어나는 가장 좋은 길이었다. 즉, 결혼은 이들에게 일종의 '기회'였다. 


하지만 현대차 생산직노동자와의 결혼은 동시에 사회 활동의 기회를 빼앗기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 주-야 교대라는 극도로 피곤한 노동현장에 있는 현대차 노동자들이 아내의 온전한 '내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 첫번째,  현대차 노동자들이 4인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상대적 고임금을 받으면서 아내가 굳이 돈을 벌 절실한 필요를 없게 만드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동시에 남성노동자들은 아내가 경제활동을 하는 와중에 다른 남성들과 어울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야간근무를 했으므로 그 시간동안의 '섹슈얼리티 통제' 욕구가 더 강화됐다는 것이다. 또한 집단적 남성문화 속에서 '일하는 여성'이 성적인 대상으로 의미화되고, 회식하면 '삐삐 아짐매'(노래방 도우미)를 부르는 것이 일상화되는 문화 역시 '아내 통제'의 심리적 기제가 된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내 아내는 집에서 집안일이나 하고 애나 돌봤으면 좋겠다'는 성별분업이데올로기가 아주 노골적으로 작동할만한 환경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은 남편의 근무 일정에 따라 움직인다. 철저한 '보조자'가 되는 것이다. 아침밥 차려주는 것이 하루중 가장 중요한 일이 되고, 야간 근무때는 남편의 수면을 위해 아이를 데리고 바깥을 전전하기 일쑤다. '문을 열어줘야 집에 들어오는' 사례까지 있을만큼 철저하게 남편에게 맞추는 것이 '아내됨'의 큰 덕목으로 부각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현대차 역시 남성노동자 관리 전략으로 아내를 '현모양처'로 묶어두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공장 견학을 통해 '가장'의 고생을 눈으로 보게하고, 회사라는 더 큰 '부계 권력'을 인지하게 만든다. 동시에 아내들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행복한 가정 만들기 교육'을 통해  주부의 몸가짐 등을 가르친다. 저자가 언급한 <현대자동차> 직원부인 교육과정 평가보고에서는 해당 교육의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가정에서 불만 없이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의 교육에 충실함게 함'으로써 남성들의 노동력을 효과적이고 안정적으로 재생산시켜 <현대자동차>의 생산력과 직결되는 회사 이윤을 향상시켜 '2010년 글로벌 톱5 도약'이라는 기업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적어도 노사는 '남성 중심의', '남성 지배의' 체제를 유지하자는 것에는 뜻을 함께 했다. 현대차는 98년 정리해고 당시 144명 급식 여성노동자 모두를 해고했다(원래는 여성 급식노동자 276, 남성 1이 정리해고 명단, 132명은 위로금 받고 퇴사). 그런데 이후 여성노동자들의 강력하고 긴 복직투쟁에서, 황당하게도 남성 중심의 노조는 별다른 지원을 안하고 무시로 일관한다. 영화 <밥.꽃.양>이 기록한 당시 급식여성노동자 정리해고와 투쟁의 역사는, 노사 불문 현대차의 남성들이 여성 구성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기록 아닐까.


- 2010년대 거제

<현대가족 이야기>의 맥을 잇는 책은 올해 1월에 출간된 양승훈 경남대 교수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다. 울산에서 거제로 배경이 이동했지만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현대차와 마찬가지로 거제의 생산직 가족들 한때는 '대우(조선해양) 가족', '삼성(중공업) 가족'으로 정의되면서, 남편 혹은 아버지의 직장에 따라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해왔다. 더불어 남편의 회사를 중심으로 한 '여성 전업주부' 커뮤니티가 유지되며, 이들은 가사와 양육에서 더 나아가 회사의 갖가지 '정보'를 공유하고 전달하면서 내조에 힘을 썼다고 한다. 분명 ''현대 가족 이야기'에서 나오는 가족들과 비슷한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이 책을 보면 2002년의 울산과 2010년대의 거제가 다른 점은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을 기반으로 한 '중공업 가족 프로젝트'의 균열 조짐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먼저 거제는 전업주부를 선택하지 않은 여성은 살기 힘든 곳이다.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제에 있던 여성들은 떠날수밖에 없다. 더 이상 장래희망을 '현모양처'로 말하지 않는 세상에서, 자기 일자리가 없는 곳으로 여성들이 올 가능성은 줄어든다. 가족 구성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중공업 가족 프로젝트를 위협하는 또 한가지 문제는 직영/외주 문제다. 99년부터 사내하청이 급격히 증가했고, 1:1 비율의 사내하청화가 관행이 됐다고 한다 (90년대엔 직영 8 외주 2). 더불어 '해양플랜트' 분야가 조선회사의 주요 사업이 되면서부터는 80% 가까운 생산 공장을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맡았다고 한다.



이들 하청노동자들은 저숙련공들이 아니며, '물량팀'으로 투입돼 일당 30~50만원을 버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점은 조선산업이 어려워질 경우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건 이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니 이들은 '남성 생계부양자'가 표준인 거제의 결혼과 연애 시장에서 매우 저평가받을수밖에 없다.


"부모의 후원이 없는 상황이라면 하청 노동자들의 결혼과 연애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호황기에는 열심히만 하면 직영으로 전환되거나 괜찮은 하청 회사의 '에이스'로 임금을 높을 기회라도 있었지만, 경기 침체 이후 하청 노동자들은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저평가되었다." <106p>


여기에 수도권 대학 출신 엔지니어나 사무직들이 '대우 가족' '삼성 가족'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개인주의적 생활양식과 거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산업이 위기에 맞자 이들이 가장 먼저 이탈한다. 


양 교수는 "중공업 가족은 하청 노동자들을 배제했고, 여성들과 딸들의 공간을 결혼 생활에 영역에 한정 지었다. 무엇보다도 중공업 가족은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젊은 세대들에게 그 약점을 남김 없이 드러냈다"고 말하며 중공업 가족 프로젝트의 실패를 고한다.



- 2019년, 땐뽀걸즈

거제를 비롯한 중공업 도시가 꿈꾸던 '가족 프로젝트'의 실패는 다큐멘터리 <땐뽀걸즈>가 일부 증명한다. <땐뽀걸즈>는 거제여상에서 '댄스스포츠'를 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다큐멘터리다. 이들 하나하나의 삶 속에서 거제의 현실이 잘 묻어난다. 


지현의 아버지는 삼성중공업 하청업체에 다니다가 퇴직해서 버스를 운전한다. 시영의 아버지는 대우조선 1차 희망퇴직의 대상자가 되어, 창업을 위해 요리 기술을 배우러 서울로 올라간다. 은정의 아버지는 다섯 동생을 돌보면서 아버지의 횟집 일도 돕지만, 횟집이 예전만큼 잘 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현빈은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고기집에서 알바를 하며 스스로 생계를 유지한다.  


종신고용 직장에서 든든하게 생계를 책임지는 가부장의 신화는 무너져버렸다. 땐뽀걸즈에 나오는 학생들은 직감했을 것이다. 더 이상 거제에서 남편이 온전히 생계를 책임지고, 아내가 가정일만 하는 '4인 정상가족'으로 살기 쉽지 않다는 것을.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 양 교수의 지인들은 댄스스포츠가 이 여성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추억'이 되지 않겠냐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이들이 조선소에 경리 등으로 취업하게 될 것이고, 그 이후에 커리어 면에서 특별한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양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상고를 나온 여성들은 용역회사를 통해 조선소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고, 파견직으로 일하다가 인정받으면 직영계약직-무기계약직 등으로 일한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혼과 출산을 하면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구조조정 대상 1순위이기도 하다. 이들은 2016년 구조조정 당시 '숫자'를 맞추기 위한 희생양이 됐다. 앞서 이야기한 98년 현차 구조조정과 비슷한 경우다. '여성은 생계부양자가 아니니까 너네가 나가야지'.

그런데 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결국 '땐뽀걸즈'는 대부분 거제를 떠날 것이라고 본다. 이제 여성이 갈 수 있는 일자리가 없어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상황을 현재의 젊은 여성들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자의 경제적 능력을 믿고, 전업주부를 할 수도 없다. 정규직이 줄어들었을 뿐더러, 정규직도 불안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거제에서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오마이뉴스 윤성효

지난 3월 경향신문과 인터뷰한 <땐뽀걸즈>의 주인공 지현은 현재 경리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다른 목표가 있었다. "20학번이나 21학번을 꿈꾼다"며 부산에 있는 대학에 가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이제 여성들은 남성의 일의 '보조자'로 머물 생각이 없어보인다.


20~24세 기준 울산의 성비는 125.7:1(4월 기준)이고, 거제의 성비는 127.0(지난해 12월 기준)이다. 15~19세 인구랑 비교해보면 울산은 여성 유입이 남성 유입에 비해 현저히 적어서, 거제는 여성들이 많이 빠져나가서 성비가 벌어졌다. 앞으로 이 두 도시에서 '가족'이 만들어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것이다. 고용은 불안정하고, 여성들도 양질의 일자리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 교수는 거제라는 도시의 미래를 위해선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을 극복하는 '젠더 관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설계 엔지니어는 여성 엔지니어의 채용 비율을 늘릴 수 있는 분야임에도 남성 엔지니어 비율이 과도하게 높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래서 제조업 엔지니어 자리를 일단 창출하고, 숙련도 높은 사무보조 노동자들의 노하우도 활용해볼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기존의 중공업 가족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형태의 공동체를 모색하는", "딸들이 돌아오고 싶은 도시가 되어야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나는 중공업 도시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과 더불어 '남자 일'이라는 개념도 폐기해야 한다고 본다. 여성이 '언젠가는 '결혼해서 아이를 키울' 혹은 '반찬값 버는' 노동자가 아니라 남성과 동등한 노동자가 되려면 도시의 주요 산업에 여성들이 많이 종사해야 하지 않을까.


<현대가족 이야기>에서 전업주부 인터뷰이었던 이진자씨는 과거에는 현차 하청업체 생산직으로 5년 동안 일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공업 생산직이 왜 남성의 전유물이 되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남자들 사이에 껴서 같이 일하는 게 멋진 거야. 막 기계 만지면서, 기계도 내 손으로 고쳐 가며 막... 여자 일은 아니에요. 기계 만지고 프레스 찍고 이랬거든요. 마, 땀을 흘려가며 일하거든. 우리는 뭐 방울방울 이게 아니야. 마, 그냥 흘러, 쫙쫙 흘러.(...) 여자들은 마 술이 떡이 되든 떡이 안 되든, 가며는 아침에 상쾌하고 씻고 화장까지 해서 산뜻한 마음으로 오잖아"(119p)


그는 심지어 학창시절 내내 원인 불명의 신경성 질환을 앓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학교보다 병원에 있던 시간이 더 길었던 그가 현차 하청 생산직 노동자로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엄청난 물리적 힘을 요하는 극소수의 일을 제외하고는, '남자 일', '여자 일'을 구분하는 게 필요한지도 의문이 든다. 사실 성별분업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생계부양제 논리 때문에 여성과 비슷한 일을 함에도 '차별대우'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엔지니어는 물론, 용접공 등 기술직군에도 못 갈 이유가 없다. 


또한 남성에게 과노동이나 회식을 종용하며, 육아나 가사일을 여성의 전담으로 두는 문화도 바꿔야 한다. 산업 구조상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워라밸을 보장되거나 가사와 양육의 분담이 정착되지 않는 이상 결국 여성들이 일도 하고 가족도 돌보는 이중 노동의 고통은 해소될수 없다.


남성이 돈을 벌어오고, 여성이 전업주부로서 가장이자 생계부양자의 일과와 회사에 철저히 맞추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그런 시절의 모델로 기업을, 나아가 사회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현대 가족 이야기'는 옛말이 됐고, '중공업 가족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여성들은 '현모양처'로 살지 않고 자신의 커리어를 묵묵히 쌓아나가며 경력단절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홀로 가사와 양육을 책임지며 눈물짓지도 않을 것이다. 동시에 남성들 역시 가부장으로서의 막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거부할 것이며, 회사를 매개로 한 '남성들끼리의 집단의식'도 피할 것이다.


사실 중공업뿐만이 아니다. 야근이나 극심한 강도의 노동을 요구하는 기업문화는, 사실상 그 노동자가 '남성' 혹은 '싱글 여성'이며 양육이나 여타 가사일에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업의 분위기는 철저하게 기혼 여성 배제적일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가부장제를 공고화시키는 주 원인이 되어왔다. 


두 책을 보면서 도시의 산업, 노동자들의 근무환경, 기업문화 등이 가부장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돼있다고 느꼈다. 근본적으로 성평등 사회로 가기 위해선 결국 '노동'의 미래에 대해 계속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2002년대 울산, 2010년대 거제 부분은 하나하나 인용은 하지 않았으나, 대부분 저자의 서술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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