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훈 May 30. 2019

경찰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여성들의 공포는 '망상'이 아닙니다

자신의 원룸에 들어가는 여성을 한 남성이 바로 뒤따라온다. 다행히 문은 금세 잠겼고, 남성은 아쉬운듯 문고리를 자꾸 흔든다. 문이 닫힌 시간과 남성이 문고리를 잡은 시간의 간격은 2~3초 정도에 불과했다. 어제 SNS를 통해 공개된 일명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 영상에 나오는 '아찔한' 장면이다.


엄밀히 말하면 '강간 미수'가 아니다. '주거침입'이 맞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강간 미수'라고 부르는 건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 아닐까. 낯선 남자가 자신을 스토킹하다가 집에 무단으로 들어오는 끔찍한 순간을 상상하면, 객관적인 혹은 법적으로 엄밀한 언어로 그 순간을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경찰은 무엇을 했을까. 자세한 수사 과정은 모르겠으나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엔 범인을 잡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두 차례 신고를 받았다. 먼저 피해자가 가해자의 '주거침입 미수' 당시에 신고를 했다. "피해자는 CCTV를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출동한 경찰은 "피해자가 직접 건물주에게 연락해서 확보한 뒤 경찰에 알려달라"고 말했다. 피해자와 대화를 나눈 뒤 주변을 둘러본 경찰은 출동 3분만에 돌아갔다. 두 번째 신고는 피해자가 건물주에게 부탁해 직접 CCTV 영상을 확보한 상태에서 이뤄졌다. 사실상 수사를 피해자에게 위임한 셈이다.


'누군가가 벨을 누르거나 문고리를 흔드는 일', 경찰은 물리적인 폭력이 직접적으로 벌어지지 않았으므로 별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듯하다. 또 명확한 피해의 증거도 없으므로 그저 '피곤한' 사건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스토킹 행위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는 엄청나다. 밤길에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거나 위협한 경험을 상당수의 여성들이 갖고 있으며, 이러한 행위가 자신이 피해자인 '중대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언제든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KBS가 여성 대상 살인-살인미수 사건 381건의 판결문은 분석한 결과, 사건 전 30%(56명, 가해자는 1명 빼고 전부 남자)는 가해자가 스토킹을 저질렀다. 스토킹은 일종의 '살인 전조' 현상인 것이다. 그만큼 스토킹은 위험한 범죄임에도 경찰을 포함해 사회 전반적으로 그 심각성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처벌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 사건이 영상을 통해서 알려지지 않았다면 가해자가 체포되었을지도 의문인 이유다.


한 예로 '진주 아파트 방화 살인사건'을 저지른 안인득은 이전부터 이번 방화살인의 피해자 중 한 명인 위층에 사는 고등학생을 괴롭혀왔다고 한다. 하교하는 피해학생을 따라오다가 학생이 급하게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벨을 누르거나 나오기를 기다렸던 적도 있다. 신림동의 상황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위층에 사는 고등학생을 스토킹해왔던 안인득 ⓒKBS 뉴스 


스토킹범에 대한 강력한 처벌법안이 없으므로, 스토킹범을 경범죄 처벌법(범칙금 8만원)으로 다스려야 하는 한계가 분명 있다. 하지만 그전에 경찰이 안인득 같은 스토킹범을 처벌할 의지가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 최소한 안인득에게도 신림동 사건처럼 '주거침입 '혐의 정도는 적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파트 복도에서 머문 것 역시 판례상 주거침입으로 인정된다) 그렇다고 해서 스토킹 피해여성에 대한 '신변 보호'나 '핫라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쯤되면 지난해 10월에 경찰이 발표한 '스토킹 대응 TF 설치방안'은 허울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올해 주민들이 안인득을 7번이나 경찰에 신고했음에도 어떤 조치도 없었던 것은, 경찰이 안인득에 대해 동네에 '미친 사람' 하나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간 것이라고밖엔 볼 수가 없다.


지난 24일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의 사례는 더 기가 막히다. 바닥에 락카칠을 하고 소리를 지르는 여성 노인이 있어서 동네 주민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상 그는 지속적인 괴롭힘의 피해자였다. 앞집 사는 남성이 몇년 간 그에게 달걀이나 소주병을 던지고, 오물을 집에 묻혔다고 한다. 심지어 "네 아버지 xx나 쭉쭉 xxx" 같은 성적인 희롱을 지속했으며,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때리기까지 했다. 알고보니 락카칠은 그가 계란을 던진 장소나 시간을 기록해 둔 흔적이었다.


피해 여성 노인은 너무 무섭고 고통스러워 폐지를 모은 돈으로 CCTV를 주변에 설치해놓았고, 밥 먹을때는 계속 그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너무 많이 힘드니까 우리집에 괴한이 와서 나쁜 짓을 안할까, 또 뭐 안 던질까, 그것만 생각해"라며 제작진에 제발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또다시 의문이 드는 점은, 대체 이 지경이 되도록 경찰이 무엇을 했냐는 것이다.


평택경찰서는 2년 전부터 가해 남성에 대한 24건의 신고 접수를 받았는데, 이중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것이 7건에 구속영장까지 신청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단 한번도 혐의가 인정된 적이 없다. 의아했다. 기소의견 송치를 했음에도 검찰이 단 한 건도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 또 피해가 얼마나 극심한지 경찰이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여성 노인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남성의 모습, 노인에게 성적인 욕을 하면서 지나가고 있다. ⓒSBS


현행법을 적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경찰이 소극적으로 수사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남성중심의 조직인 경찰은 '여성이 당하는 범죄'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 뿐더러, 여성들이 겪는 위협들을 사소화하고 있다. 특히나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 사건에서는 꾸준히 '안일한 대처'가 비판받아 왔다. 


경찰이 남성의 시각에서 '범죄'를 바라보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이다. '건장한 비장애인 남성'이 다수인 집단에서 약자를 대상으로 이뤄지는 은근하고 '사소해보이는' 범죄를 다룰 감수성을 갖고 있을리 만무하다. 또 스토킹과 데이트폭력을 '개인의 일', 혹은 '남성의 과도한 행동' 수준으로 치부하는 폭력적인 남성문화에서 '남초 조직'인 경찰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스토킹방지법, 데이트폭력방지법이 만들어져서 법이 인식을 선도하면 좋다. 그러나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경찰의 인식이 현재 수준이라면 법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여성이 어떤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지도 모르는, 그래서 여성의 증언에 공감하기는커녕 예민하다고 비웃는 경찰은 언제쯤 '반쪽짜리 민중의 지팡이'를 면할 수 있을까.


* 여자경찰의 증원이 필요하다. 일단 많이 뽑고, 일선 지구대에도 많이 투입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경찰 조직의 민감도는 훨씬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백날 젠더의식 교육해봤자 옆에 있는 동료들이 남성뿐이면 변할 수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화장실이 남자들 차지가 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