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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Aug 14. 2019

여자들을 '리얼돌' 취급했던 한국 남자들

몇 년 전, 한 남초커뮤니티에 '아내가 성관계를 거부해서 화가난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는데, 여기 달린 베스트 댓글에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잘 때 침대에 묶고 하세요. 저 이 방법으로 여친에게 차임"


댓글을 단 이는 '개그'랍시고 올렸겠지만, 이는 명백한 강간이다. 만약 실제로 저런 행동을 했다면, 차이는 게 끝이 아니라, '감옥'에 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남초 사이트 회원들은 이런 댓글을 비난하기는커녕  '베스트 댓글'로 올려줬다. 데이트강간에 대한 경각심이 얼마나 없으면, 저걸 보고 '추천'을 누를 수 있을까.


최근의 리얼돌 논란에서 가장 의아했던 부분은 남성들이 리얼돌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잘 때 침대에 묶어놓고' 라고 말하거나, 그 말에 웃는 사람들에겐 리얼돌이 별로 이상한 물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얼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리얼돌을 쓰기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마라" "리얼돌에게 질투하냐" 등의 댓글을 다는 것은 아니다. 리얼돌은 가격도 비싸고 보관장소도 마땅치 않으며, 무엇보다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반발심이 남성들이 리얼돌을 옹호하게 된 1차적 원인일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이들이 여전히 "리얼돌 쓰는게 뭐 어떠냐"는 식으로 나서는 결정적 이유는, 리얼돌과의 '섹스'를 생각할 때 위화감이 못 느꼈기때문이 아닐까. 이름이 '리얼'돌인만큼 리얼돌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자위행위라고 할 수 없다. 이들은 외로우면, 심심하면 혹은 성욕을 '풀기 위해' 리얼돌과 섹스를 하고 쾌감을 얻는 모습을 '가능한 섹스의 형태'로 본 것이다.


섹스의 한국말인 '성관계'는 이름부터 '관계'라는 말이 들어간다. 단순히 성기의 삽입이나 사정이 중요한 행위는 아님을 뜻한다. 그런데 상대방이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섹스를 하는 것에서 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상상을 할까. 그것은 이전부터 주류 남성문화가 어떤 교감도 없는 섹스를 자연스럽게 여겨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삽입에 이은 사정으로서 섹스가 완성된다는 남성중심적 성인식은 섹스에서 상대방, 즉 여성을 배제시켜버렸다. 상대방의 자유의사는 중요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섹스에서 걸리적거리는 요소가 된다. 그러니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약물강간을 모의하며, 돼지발정제를 사니마니 한다. 이런 행위는 비단 '흉악범'들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어떤 남성들은 몸도 가누지 못하는 여성을 속칭 '골뱅이'라고 부르며 섹스하려 했고, 심지어 그것을 영상으로 유포시키기까지 했다. 사람을 '리얼돌'처럼 만드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약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러 만취를 유도해서 섹스를 할 것이라는 음담패설은 남자들 사이에서 흔히 도는 이야기 아닌가.


한국 남성의 50%가 했다는 성구매도 여성을 사실상 '인형'처럼 여긴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성구매자는 섹스를 하면서(사실 이것이 섹스인지조차 모르겠다) 별다른 소통이나 교감이 필요없다. 성구매 자체가 구매자의 성적 만족이 가장 중요하고, 판매자의 말이나 행동등은 철저히 구매자의 만족을 위해 맞춰지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청소년 시절 성판매를 경험한 한 여성이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성판매 당시 "자신은 도구"였다며 "나는 인형이다. 인형일 뿐이다. 나는 기계고,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람이 된다고 다짐을 했다"고 말했을까.


그리고 일상에서 자신의 여자친구나 아내 또한 '리얼돌'처럼 여기는 남성들도 있다. 그들은 여성이  섹스를 거부하면 폭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포털에 '성관계 거부'로 검색하면 셀 수 없이 많은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 사건들이 나온다. 이 남성들은 자신과 동일한 감정을 가진 상대방을 원하는게 아니다. 언제든지 삽입하고, 사정할 수 있는 인형을 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여성이 인형처럼 행동하기를, 혹은 인형이 아닌 것 같으면 인형처럼 만들고 싶어하는 남성들은 특이한 부류거나 루저들이 아니다. 약칭 '장학썬'이 잘 보여주지 않았나. 여성이 어떤 기분을 느끼든간에 상관없이 제 멋대로 온몸을 만지고, 폭력을 통해 정복감을 느꼈던 이들은 사회 주류층이었다. '그렇게 해도 된다'고, '다 그렇게 한다'고 말해준 남자들은 곳곳에 있었다.


이런 문화속에서 자라난 남성들이 '내가 사용하진 않지만, 개인의 성적 자유 아니냐'며 리얼돌을 옹호하는 게 이상한 일일까. 실제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일어나는 성관계에서도 여성의 주체성이 실종되어왔으니, 리얼돌과의 섹스를 사람과의 섹스와 비슷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이미지 자체로만 보면 유사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리얼돌은 단순한 인형으로 볼 수 없다. 여전히 남성들이 리얼돌과 같은 여성상을 원하는 상황에서, 또 리얼돌이 완전히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종속된 여성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포르노'도 남성중심적 성적 판타지지만, 그것을 통해서 남성들이 왜곡된 성관념을 배우듯, 리얼돌이 용인되는 사회에선 오로지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의 모습이 정당화될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은 '평등한 섹스'에 대해 이야기 할 때다. 섹스를 서로의 몸을 알아가면서 교감하는, 하나의 '소통방식'으로 재규정해나가야 한다. 더 이상 남성의 성욕과 남성의 성기가 섹스의 중심이 되어선 안된다. '관계의 혁명'을 고민해야 할 시기에 대체 웬 리얼돌이란 말인가.  


지금의 젊은 남성들이 부디 한 걸음 내디뎠으면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등한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이지, 남성중심적 욕망이 형성화된 리얼돌을 지켜내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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