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준비자(현재 휴직 6개월째,, 11월 말 퇴사 예정)인 나는, 남편과 아이가 각자의 터전으로 떠난 아침 8시 30분 이후 자유의 몸이 된다.
회사 다니던 시절의 8시 30분은, 막히는 도로와 씨름하는 남편 차 옆좌석에서 꼬박꼬박 졸면서 오늘 닥칠 일에 대해 긴장하던 시간이었다. 하루 중 썩 즐거운 기억이 남는 한 때 일리 없다. 그러나 회사에 가지 않는 사람의 아침은 참 여유롭다. (개인차가 물론 있겠지만). 라디오에서는 "여유로운 아침"을 기대하며 "기분 좋은 시작"을 응원하는 멘트들이 흘러나오는데, 나처럼 시간 있는 사람들만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집중해서 들을 수 있으므로, 아침 시간 라디오의 멘트는 가끔 어불성설 같다. 정말로 여유와 파이팅이 필요한 사람은 직장인이나 학생들일 텐데 그들이 이 시간에 여유롭게 라디오를 청취할 리가 없잖아.
퇴직자의 생활은 매 순간 새롭다. 나 같은 비자발적 퇴직자는(아이의 급작스런 건강 악화가 주된 퇴사 이유이므로) 대부분 느닷없이 퇴직의 순간을 맞게 되므로 넘치는 시간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년 전부터 퇴사 D-Day를 어렴풋이 정해 놓고 머릿속으로 퇴직 후 일상을 시뮬레이션해보곤 했었다. 지금 회사 안 나간 지 6개월째 되지만, 스스로 세운 일상에 대한 규칙을 지키고 다양한 강좌들들 들으며 내 평일 오전을 충만하게 보내고 있다.
오늘은 첫 한글서예 시간이었다. 서예는 초등학교 시절 2~3년 배웠는데, 근처에 강좌가 있어 합류하게 되었다. 처음 만나는 선생님과 오전 2시간을 붓글씨 쓰기에 온전히 집중하고 나니, 주말 내 시끄러웠던 기분이 정리되는 듯했다.
수업 후 하늘을 우연히 보니, 가을이네. 이 하늘을 두고 집으로 갈 순 없지. 차에는 좋아하는 브람스 음악이 흘러나오고, 커피도 한잔 테이크 아웃 했잖아. 직장 다녔다면 빠듯한 점심시간일 12시~1시에, 나는 근교에서 드라이브하며 음악을 듣는다. 경제활동 좀 안 하면 어때. 지금까지 충분히 해왔잖아. 이제는 내 몸과 마음에 물을 주어도 좋아.
느린 속도로 드라이브하고, 아파트 마당에서 하염없이 가을색 나무를 바라보다 집으로 들어왔다. 가끔 이런 날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