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모습 그대로 내 나이 십 년만 어렸어도…
더할 나위 없이 진취적이고 고무적인 젊은이였다면서.. 그 시절 유행했던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았던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되뇌며 지지부진한 바람에 사로 잡혀있다.
성적순이 아닌 행복을 찾을 거라며 수능에서의 실패를 거창하게 포장하고 내 삶의 방식의 당위성을 찾으러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건들고 다니기를 십여 년…
거추장스러운 포장을 걷어내고 나니 나의 20대는 달랑 이 두 글자로 정의되었다.
미래의 계획이나 적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목적 없이 들어간 학교는 무엇을 배웠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모두 남김없이 기억에서 사라졌고 꾸역꾸역 의미를 부여해 시간과 돈을 주고 학위를 샀다고 하기에도 딱히 내세울만한 이름도 아니었기에 사실상 졸업을 하고도 해야 할 것이 있거나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 수능 직후부터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온 까닭에 돈이 나올 구멍은 있었지만 대학생이던 동료들은 적당히 즐겁게 일하며 각자의 전공에 맞게 각자의 길을 찾아가고, 나이는 계속 먹는 와중에 어린 직원들 사이에서 나 혼자 여전히 '그냥 아르바이트생' 으로 남아있는 것이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입사 5년 만에 퇴직을 결심하고 나온 퇴직금 400만 원으로 같이 퇴직한 언니와 난생처음 만져보는 목돈으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결정을 하자고 다짐한다.
고심 끝에 그 언니는 성형을 하기로 하고 나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결정.
호주에서의 2년 동안의 워홀 생활은 재미있고 나름 젊은이스러웠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는 외국에서 지내봤다는 겉멋만 들었을 뿐 이력서에 채울 만한 것은 딱히 없었다. 내가 세상 경험한답시고 외국물 시원하게 들이켤 동안 친구들은 자신의 꿈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고 돌아온 나는 다시 ‘무스펙’ 구직자가 되었다.
호기롭게 떠나더니 얼굴만 타고 나이만 먹고 돌아온 나는 가족들의 환영을 받을 리 만무했고 당장 생활비를 위해서 병원 연구소, 영어학원, 극장 알바 등 되는대로 일을 했다. (일을 하는 동안 방송작가 학원도 다녀보고 승무원 학원도 다녀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의 어두운 면만 경험했을 뿐..)
학창 시절, 나름 임원도 자주 했고 그 덕에 어른들의 예쁨 받는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어울리다 보니 내 실력에 비해 주위의 많은 기대를 받으며 자라온 나로서는 점점 스스로 내세울 것이 바닥에 다다른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다.
자꾸만 작아지는 나를 못 견디고 다시 한국을 떠나 온 공기 좋고 물 좋은 뉴질랜드에서 3년 동안 4성급 호텔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나는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호텔에서 계속 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3년 동안 열 번 생각하고 한번 사 먹는 김치를 새끼손톱만큼씩 잘라먹으며 모아 온 돈을 보고 나는 다시 미래를 설계하게 되었다.
공부를 해야겠다…
그렇게 다시 호주로 와서 2년제 호스피탈리티 학교에 입학을 하고 또다시 호텔경영으로 유명하다는 일반 대학교로 편입을 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제 마지막 학기… 이 공부들을 진작에, 한국어로 했으면 얼마나 재미있게, 잘한다 소리 들으면서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과제할 때마다, 시험 때마다 들었다.
어쨌든 이제 마지막 학기.
나는 서른일곱에 사회 초년생이 된다.
내공 없이 내 방식대로 살아가겠다는 오만함에 빠져 냉혹한 현실에 처참히 무너져 내리기를 십여 년,
이제 조심스럽게 다시 시작해보려고 한다. 꿈꾸고 계획하는 대학 졸업반 학생들처럼…
반짝이던 어린 시절에 많은 기대를 안겨주던 작은 딸에서 점점 스스로를 잃어가는 딸내미를 보며 끊임없이 부정하고 많은 것을 내려놓으셨을 어머니께서 꼬깃꼬깃 접어 두셨던 희망을 다시 꺼내시며 말씀하신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가는 거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