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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앤지 Jun 07. 2021

자연의 나라에서 나는 그냥 간장 종지가 되기로 했다.


 더 큰 그릇이 되기 위해 이런 시련을 겪는 거야


라는 말을 위로랍시고 힘겨운 시간을 견뎌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나이를 먹고 생활 반경이 넓어지면서 시련은 진화하고 트렌디 해져 다양한 방법으로 나에게 닥쳐왔지만 그럴 때마다 변함없이 들리는 저 발전 없는 위로의 말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매번 닥치는 시련에 나는 발전하지도, 성장하지도 못한 채 분노와 억울함만 축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큰 그릇이 되고자 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바란 적도 없는데 왜 나는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시험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던 것일까…


수능 실패 이후 인생이 피곤해졌다는 피해 의식에 사로 잡혀 살아왔지만 객관적으로 수능 실패는 공부를 안 한 내 잘못이니까 대놓고 억울해하지는 못하겠고 그 이후에 벌어진 크고 작은 일들은 큰 그릇은커녕 점점 나를 인생에 대해 무기력하게 만들 뿐이었다.  




최근에 경험한 100% 상대방 과실이었던 연이어 생긴 교통사고들은 정말 내가 살아서는 안 되는 운명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주유를 하다가  주차를 마친 앞차가 난데없이 후진을 하는 바람에 내 차를 박았는데 호주인 남편을 둔 개념 없는 중국인이 내리면서  


“이거 내 잘못이야?”


이러고 있네… 후진하는데 같이 후진 안 하고 뭐 하고 있었냐면서…

방귀 같은 말을 하는 그 사람들과 이 심플한 상황에 비디오 판독과 경찰까지 동원하여 겨우 정리하고 그들 보험으로 차를 수리하고 막 찾아오는 길에... 바로  그 길에 당한 4중 추돌사고…  




길거리 주차를 하는 앞차를 기다리고 있는 나와 내 뒤에 차들을 버스가 다 박아버렸다. 뒤에서부터 쾅 쾅 소리를 내며 차가 밀려서 오는데 영화 ‘여고괴담’의 유명한 장면처럼 성큼성큼 다가오던 뒷 차 운전자의 공포에 질린 얼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교통사고로 인한 차 수리를 막 마친 차를 찾아오는 바로 그 길에 또 당한 4중 추돌 사고라... 내가 사는 것 자체가 잘못인 것처럼 느껴졌었다.


호주는 우리나라처럼 보험회사가 찾아 와주는 서비스가 아니라 내가 보험회사와 경찰에 전화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는 시스템인데 처음 겪는 교통사고를 처리하는 과정들을 다들 남편에, 친구에, 아버지에 각자 한두명씩 옆에 끼고 든든한 다독임을 받으며 처리 하는데 나만 초보 운전이기까지 한 상황에 다 혼자서 하려니 너무 버거웠다.  그리고 다 정리가 되고 난 후에는 나만 잘한다고 될 일이 아닌 운전에 자신감을 잃었다.


도대체 큰 그릇은 왜, 무엇 때문에 되어야 하는 거야…






본격적인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선택하고 난 뒤, 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한 이중적인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무표정한 모습보다 웃는 모습이 타고난 내 얼굴에서는 호감 형이라고 판단, 생존의 방법으로 나는 밝고 맑은 yes girl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외국 생활 초반에  일하는 곳 외에 딱히 친구도 없고 할 일도 없어서 일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 대타를 도맡아 하던 것을 시작으로, 어렵게 구한 직장에서 일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지내다 보니 딱히 불평불만이 없는 그저 맘 좋은 직원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 무턱대고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음식이든 사람이든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불평불만이 티가 나는 내 주장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할 때 밝고 맑기만 한 나의 모습은 나에게 스스로를 가두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어떤 사안이나 사람에 불평을 갖는 나를 반성하게 되고 나 역시 힘들어서 못할 것 같은 순간에도 거절을 못하게 되었으며 기분 나빠해야 할 언행에도 불쾌한 티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후에, 스스로가 아무렇지 않으면 상관이 없는데 본디 뼛속부터 착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다 보니 표출하지 못한 표현들이 혼자 있는 시간의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또 일할 때 점점 인위적은 밝음을 끌어오다 보니 일에서 벗어난 후의 나는 급격하게 말수가 줄었고 어두워졌으며 당시 남자 친구는 극명하게 다른 나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착하고 너그러워서 나 혼자 묵묵히 일하면 와서 알아봐 주고 챙겨주고 하면 억울할 것도 없는데 현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영악한 기회주의자들이 사방팔방에 득실거리니 점점 나의 피로도가 극심해지기 시작하였다.


점점 나이가 들고 체력도 예전만 못하고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본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횟수와 기간이 길어지니 더 이상 그렇게 지내는 것이 대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꺼려하는 업무를 다들 하기 싫다고 피력해서 피하고 결국 별 말 안 하는 나만 계속 그 업무를 맡게 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하기 꺼려하는 트러블 메이커와 같이 일하다 상처 받아서 일하러 가는 의욕을 상실하게 되기도 하고, 알아줄 때까지 참고하다가 몸살이 나기도 하였다.


여러 국가의 다양한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배우는 계기가 될 거라는 생각도 하며 참고 견뎌 내기도 했지만 이제는 ….


내가 지금 당장이 불행한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래서 그냥 이제는 싫으면 싫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렇게 방실거려도 날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했고 이용할 사람은 이용했거든. 알아줄 때까지 버티다가 내가 몸 져 눕게 생겼다.





애초에 되고 싶지도 않았던 큰 그릇, 정중히  사양할 테니  그냥 인생 좀 이제 순탄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는 …



자연의 나라, 공기 좋고 물 좋은 청정지역에서 그냥, 한낱 간장 종지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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