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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란 Feb 23. 2021

이해하는 척하지 않을 용기

#아침에는일기를

지난주와 이번 주 기온이 널을 뛴다. 하루 이틀 간의 고온은 개구리와 바다거북에게 이제 밖에 나가서 좀 뛰어놀아 볼까, 하는 충동을. 사람에게는 주말 나들이를 위해 헤어 스타일을 좀 바꿔볼까, 하는 마음의 자극을 불러 모아놓고 잠든 사이 북극 한파를 몰고 왔다. 기온은 뚝 떨어져 내리던 비마저 얼렸다. 즐거이 마실 나온 개구리는 생의 위협을 바다거북은 기절을, 미용실을 예약한 나는 노쇼의 유혹에 직면한다.


이른 아침, 친구가 출연하는 라디오를 듣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집을 나선다. 엔딩곡이 <걱정 말아요 그대>라서 였을까. 아니다. 내가 다니는 미용실은 100% 예약제 인 데다가 오랜 단골이라 사실상 노쇼가 불가능했다. 전날 밤 메시지로 '저 내일 히피펌 하려고요' 말해두었으니 적어도 4시간은 빼놓았을 텐데. 어제와 다르게 오늘 보니 히피펌 하기에는 머리가 덜 긴 것 같기도 하고... 취소할까? 아니야, 아니지.


미용실 도착. 가운을 입혀주던 실장님은 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보며 말한다. "우리 최근에 언제 머리 했었죠? 아무래도 오늘 펌은 못 할 것 같은데요?" 나는 옳다구나 하며 맞장구를 친다. "그러니까요. 머리 한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펌 하기엔 길이도 좀 짧은 거 같고요" 실장은 매번 같은 말을 하고 "아니요. 너무 상해서요 흑흑" 나는 매번 같은 대답을 한다. "관리가 쉽지 않네요..." 실장은  샴푸를 해서 머릿결을 다시 확인해보고 결정하자고 했고, 나는 다시 조마조마 해졌다. 샴푸 했는데 상태가 덜 심각하면 어떡하지? 장사하려고 일부러 괜찮다고, 펌 하자고 하면 어떡하지(이렇게 또 호구가...)?


다행히(?) 모발의 손상 정도가 심각해 히피펌은 다음 기회로 돌아갔다. 두 세 달 정도 케어를 하면서 모발을 살려달라고 했고, 내친김에 오늘 1시간짜리 케어를 받고 가라고. 나는 순순히 그의 말을 따라 케어 룸으로 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케어) 지출이 있었지만 전혀 당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간도 마음의 불안도 반으로 절약한 오전을 보냈다. 


이상의 짧은 이야기는 어제저녁부터 오늘 오전까지, 반나절 사이에 (나라는) 생명체가 얼마나 충동적인지, 책임과 직업윤리 지키기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음을 인지하려고 적어 본 것이다. 미용실의 사례는 반나절 사이에 겪은 나머지 두 사례에 비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살만 하구나'라는 온기를 주었다.


사례 1

며칠 전, 인터넷 TV와 와이파이를 다른 업체로 바꾸면 사은품으로 몇십만 원을 준다는 전화에 꼼꼼하게 그러나 충동적으로 계약을 했다. 신규 약정 기간이나 (기존 약정이 남아있는 상황에서의) 위약금 등에 대해 꼼꼼히 묻기는 하였으나, 모든 것이 유선으로 진행되었고 녹음이나 문서 전달 같은 건 없었다. 충동적 계약의 결과는 어제저녁 이렇게 돌아왔다. "안 OO 담당님이 그만두셔서요. 저희는 (기존) 계약 해지 위약금 관련해서는 들은 게 없어요, 고객님"

 

사례 2

또 한 가지는 갑질과 관련된 사례. 이 년째 콘텐츠를 만들어 공급하고 있는 거래처가 있다. 올해 제작비 인상과 제작 건수 계약을 위해 협상 테이블을 요청했는데 지난해 11월부터 코로나 19를 이유로 계속 미뤄왔다. 첫 번째 핑계는 실무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었고, 우리는 순순히 받아들여 두 달간 추가 인력을 투자하며 제기한 문제를 해결했다. 두 번째 핑계는 무조건적인 회피. 대표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메시지로 내일 연락드릴게요, 해놓고 계속 부재중이다. 나는 틈틈이 대표를 종용하고, 대표는 거래처 팀장에게 주 1-2회씩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남긴 끝에 오늘 오전 연락이 닿았는데 팀장이 아니라 그 아래 팀원이었다. "팀장님이 이번 달에 휴가 셔서요... 아무래도 다음 달에 다시 이야기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대표는 곧바로 우리에게 공유해줬고, 나는 화를 냈다. "우리가 너무 순순히 다 들어줘서 그래요. 쥐고 있는 패가 하나도 없잖아요!!"


사례 1과 2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건 아주 중요하다. 물론 그들의 윤리과 책임에 관해서 내가 가르칠 생각은 없다. 내 윤리를 지키는 일에 관한 것이다. 사례 1 이후, 대리점에 전화해 위약금을 물더라도 해지하겠다고 했더니, (전 담당자가) 주겠다고 한 위약금 절반 정도를 당장 줄 테니 해지는 하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는 본사 고객센터에 전화에 사정이 이러이러해 해지해달라고 했더니 상품권을 추가로 줄 수 있다고... 블랙 컨슈머가 되어야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자 어제보다 세상이 두려워졌다. 더 이상의 협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해지해주세요."


사례 2는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표는 잘 될 거니까 걱정 말라고 했지만 나의 화는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계약이 되면 이런저런 소심한 복수를 하겠어(예를 들면 계약을 미루고 미루다가 장기 휴가를 떠나버린 팀장에게 인형의 저주를 걸어서 찔러줄 거야 같은)!! 물론 그마저도 내게 독이 될 것 같아서(괜히 소심한 복수를 했다가 전전긍긍하는 타입) 결국 관뒀지만. 


움베르토 에코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는 알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른다'


라고. 과연 그런 것인가. 남의 입에 안 좋은 단어를 섞어가며 오르내리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타인의 시간을 갈취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에코의 말대로 원하지 않는 것을 안다면, (아무리 회사가 책임을 진다지만)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왜 반복하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모른다고 할 밖에는...


이상은 움베르토 에코의 책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을 읽고 있기에 가능한 문장들이다. 그는 오늘의 내게 이해하는 척하지 않을 용기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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