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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tacura Jan 17. 2022

이력서 지원 상황

20년이 지나도 어려운 일

살면서 살이 급격히 쪘을 때가 한 번, 급격히 빠졌을 때가 한 번 있었다. 기름에 튀기고 볶고 부친 음식을 하루 세끼, 아니 양로추알에 맥주까지 하루 네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던 중국 유학 시절 지금보다 10kg쯤 찐 상태까지 몸무게를 확인한 이후 귀국할 때까지 체중계에 다시는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으나 어디 하나 붙지 못한 상태로 졸업을 맞으면서 고등학생이 된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40kg 대 몸무게를 갖게 되었다.

거절당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내가 제출한 이력서에 그 회사는 답을 하지 않은 것뿐인데, '이런 쓸모없고 한심한 인간아,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넌 아무것도 못할 거야.'라고 누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취업난이 본격화되기 전에 입학한 세대다 보니 대학이라는 게 놀고 즐기는 곳이었기에 딱히 열심히 살았다라고도 말할 수 없어서 스스로 더 부끄러웠다.

지금은 무지개다리를 건너버린 애완견 구름이만이 내게 위로가 되어 주던 암울했던 시절, 그 시간을 거치고, 이런저런 경력을 쌓으면서 원하던 곳에 취업을 했고,  좌충우돌 헤매고 고생한 것치곤 비교적 잘 골랐다고 흡족해했던 첫 번째 직업으로 10년쯤 일했다.

그리고 요즘 나는 다시 이력서를 쓰고 있다. 현실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첫 번째 직업을 포기하고, 나이 마흔을 얼마 앞둔 30대 후반에 두 번째 직업을 갖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고, 가사와 육아로 인한 5년의 공백기를 포함해 8년 만에 드디어 두 번째 직업에 도전하게 되었다. 번역은 휴학 기간에도 틈틈이 해왔지만, 이젠 진짜 전문 통번역사로서 사회에 다시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난 12월부터 부지런히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다.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게 된 지금까지도 공식 루트도 없고, 검증된 업체도 알 수 없는 이 바닥에서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건 좀 당황스럽고 슬픈 일이지만, 업종 자체가 그러하니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방향은 온갖 영세업체와 불량업체가 난무한 번역의 경우, 일단 내가 실력에 자신이 있고, 번역료를 떼이거나 착취를 당할 리스크를 부담할 필요는 없으므로 최대한 검색을 통해 규모가 크고 평판이 좋은 업체들 위주로 이력서를 넣어 보는 것이었다. 어디에 정해진 업체 리스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러 번역사 카페(네이버 '주간 번역가', 다음 '번역 사랑')에서 평판도 찾아보고, 번역 수주 규모나 홈페이지에 번역사에 대한 배려가 느껴질 만한 곳을 추려서 이력서를 넣었다.

통역은 눈에 보이는 곳엔 다 넣었다. 통역은 수십 군데를 넣어도 초짜 통역사는 일 년에 통역 몇 번 의뢰받기도 힘들다는 말을 들어서 일단 기회라도 잡아볼 요량으로 업체 규모와 상관없이 다 지원했다. 사실 그래 봐야 통역사를 모집하는 업체가 몇 개 되질 않았다. 통역은 나 같아도 거래했던 사람, 거래했던 검증된 업체와 할 것 같으니, 신규 통역사가 설 자리가 거의 없을 건 당연할 것 같다.

그리고 이제 한 달이 지났다. 총 몇 군데나 지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중 5군데에서 연락이 왔고, 2군데와는 계약을 맺었다. (그게 왜 비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을 받을 때까지 번역료 수준을 알 수 없어서 내게 어느 정도나 만족도를 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규모가 되고 번역사를 배려할 것만 같은 업체들과는 아직 샘플 테스트를 받을 예정이거나 샘플 테스트 평가가 진행 중이다. 회사가 얼마나 크길래...(나도 정말 큰 회사 다녀봤단말이다...ㅠ.ㅠ) 서류 심사하는 데 27일 걸리는 업체도 있고, 도착어에 따라 샘플 테스트를 두 달째 진행하는 업체에, 샘플 테스트를 보냈는데 3주째 회신이 없는 업체도 있다. 서류 낸 다음날 합격 통보하고 계약서 쓰자는 업체도 있었다. 이 바닥은 정녕 중간이란 게 없는 데란 말인가.

어쨌든 전부터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으로부터 오늘 아침 서류 합격 통보와 함께 샘플 테스트를 해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나이가 많아서 또 안 된 건가 생각했는데, 연락을 받게 되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최근 이력서를 더 넣을 데도 없고, 연락 오는 데도 없어서 안 그래도 잔뜩 쪼그라든 자신감이 먼지가 되어 사라질 판이었는데, 다시 반짝 살아났다.

통역은 프리랜서 등록해주어 내게 감사한 <사람인>이 보내준 커피 쿠폰 한 장 받은 게 받은 회신의 전부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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