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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tacura Jan 10. 2022

첫 번째 영상 번역

TOOL 쓸 줄 압니다

자격지심이란 게 어떻게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것이긴 하다. 젊었을 땐 대학 졸업한 것 말고는 이력서에 쓸 만한 게 너무 없어서 슬펐는데, 이젠 지면이 넘치게 써넣은 경력사항이 그만큼 먹은 나이를 써넣은 것 같아 부끄럽다. 젊으나 늙으나 나는 자격지심 속에서 산다.

대학원 휴학 기간에도 문서 번역은 꾸준히 해 왔는데, 영상 번역은 기회도 없었고, 자신도 없어서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영상 번역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툴을 사용해야 가능한 것이니 10년을 전자회사에 다니면서도 기계치를 벗어나지 못했던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끝까지 거둘 수가 없었다. 모든 번역 요율이 (번역가 입장에선) 매우 처참한 수준이지만, 영상 번역은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더욱 그러한 편이다. 그래도 얼마를 받든 돈을 받고 하는 일인데 툴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서 할 수 있다고 덥석 일을 받을 수도 없고, 미숙함에 어떤 실수라도 해 버리면 이해받기도 힘든 나이인 것 같아 그간 영상 번역은 미루어 왔다.

그러다 대학원에서 국가사업으로 시행하는 MOOC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학 강의 중 일부를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하여 자막을 입히는 작업인데, 통번역대학원 재학생에게 참여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학생들에게 주어진 기회이니 조금 더 배우면서 작업할 수 있을 것 같아 용기를 내어 참여해 보았다.

여러 주제의 강의가 있었는데 나는 영화학 강의에 배정이 되었다. 재미있는 과목을 맡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줌으로 간단한 사업 소개와 주의사항을 전달받고 작업이 시작되었다.

'잉? 그냥 이렇게? '

그냥 그렇게 시작되었다. 영상 번역 툴인 Subtitle Edit 은 인터넷에서 다운 받고, 유튜브에서 사용법을 익혀서 하면 된다고 했다. 새로운 디지털 문물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밀려왔다. 5년 만에 복학을 한 터라, 게다가 동기들과는 나이 차이도 너~~~무 많이 나는 터라 막힐 때마다 편하게 물어볼 동기도 없는데, 제대로 된 트레이닝도 없이 이런 디지털 툴을 나 혼자서 독학으로 익혀 사용하라는 말인가. 괜히 신청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작업도 제대로 못해 망신당하고, 다른 번역사들에게 피해만 주게 되는 것은 아닌지... 나이를 먹으면 더 용감해지고 뻔뻔해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더 소심해지고 겁도 더 많아진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니 일단 유튜브를 열었다. 요즘 유튜브에는 없는 게 없다. Subtitle Edit와 여기에 필요한 다른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 설치하는 전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었다. 이런 동영상이 보통 초보자들을 위해서 제작된 것이라 매우 자세한 편이긴 한데, 나 같이 툴 사용 초보자이자 디지털 문맹자인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아 그냥 넘어간 부분에서 나는 매번 막혔다. srt 파일을 툴에서 불러올 때 그랬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툴에서 파일을 불러오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그때 난 왜 그랬는지 srt 파일을 열어 복사를 해서 툴에 붙일 생각을 했다. srt 파일이 뭔지 모르니 할 수 있는 발상이었다. 세상에 없는 발상이니 유튜브에 설명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작업시간이 빠듯하다고 했는데, 자막 파일도 불러오질 못하고 있으니 입이 탔다. 꼭 필요한 질문을 하려면 쓸데없는 질문은 아껴두어야 하는데, 이번 작업 PM을 맡은 동기에게 어쩔 수 없이 도움을 구했다. 그리고 다 번역한 내용은 어떻게 저장하느냐는 말 같지도 않은 질문도 했더랬지...

우여곡절 끝에 작업을 시작했다. 영상은 30분짜리 단편영화로 시작되었다. 운 좋게도 대사가 많지 않은 영화였다. 대사의 양으로 본인의 영화를 평가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감독이 슬퍼하겠지... 영화가 끝나고 교수님이 영화를 분석한 내용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영화 대사가 일반 문서의 텍스트와 다르긴 하지만, 매우 정제된 텍스트라는 점에선 같다. 어떻게 보면 영화 대사가 훨씬 더 정제된 글이기도 하다. 그래서 번역하는 데 큰 어려움이나 이전과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진정한 영상 번역은 교수님 강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강의를 맡으신 교수님이 특별히 중언부언하시거나 말을 조리 있게 못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누구든 입으로 내뱉은 말을 문서화하면 이 정도의 군더더기는 다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텍스트는 통역 연습만 해 봐서 번역을 하는 것이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곧 적응이 되고 예상과는 달리 수월하게 느껴졌다. 생각할 시간이 없는 통역의 경우 기본적인 언어 실력과 순발력이 모두 필요한데, 번역에선 순발력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나이가 많은 내게는 매우 좋은 조건이다. 걱정이 되는 건 오로지 자연스러운 중국어이냐인데, 최대한 꾸미지 않고 정직하게 의미 전달에 초점을 두고 번역했다.

영상 번역의 어려움은 글자 수를 맞추는 데 있다. 한 줄에 보통 7~8자씩, 최대 14자를 넘기면 안 된다. 자막이 표시되는 시간도 5~6초 정도가 적당하고 그 범위를 크게 넘어서지 않도록 조정해야 한다. 자막 한 줄에 글자 수가 적은 건 상관없는데 너무 많은 건 줄이거나 생략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문제이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자막이 나갈 수밖에 없도록 발화량이 너무 빠르고 많은 경우가 있는데 이를 처리하려면 선택을 해야 한다. 문제는 내가 선택한 생략 혹은 압축이 감수자 혹은 대상 관객에게는 자연스럽지 않거나 오역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작업을 하는 동안 이 점이 가장 걱정되었다.

피드백이 걱정되긴 하지만 예상보다는 수월하게 작업일 4일 만에 82분짜리 영상 번역을 마쳤다. 영상 번역이 처음이라 이 정도 작업일이 적당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학교에서 하는 작업이라 타임코드 찍을 일도 없고, 번역료도 높은 편이라 그렇지 외부에서 수주받은 일이었다면 이 정도 작업 속도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직 모르겠다. 조금 더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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