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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tacura Apr 06. 2022

Cedre와 雪松

외국어를 대하는 두 가지 자세 


국내 굴지의 생활용품업체의 샴푸를 소개하는 마케팅 자료를 번역했다. 제품명이 자그마치 14글자나 하는 제품이었는데 영단어를 한글로 그대로 옮겨 부르다보니 생긴 참사였다. 패션, 뷰티 분야에 특히 만연한 이러한 현상은 (아주 오래 전이지만) 국문과를 졸업한 사람으로썬 퍽 슬프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이 고집스레 하고 있는 외국어/외래어의 현지화 노력은 일면 답답하고 우스꽝스러울 때도 있지만, 진심으로 칭찬할만하고 싶고 부러울 때도 많다.

번역 자료는 길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않게 번역시간을 초과하게 만든 복병이 있었다. 해당 제품을 소개하면서 예로 든 해외 인기 제품 리스트가 그것인데, 하....... 품이 많이 드는 단순작업이었다. 예를 들면 향수 브랜드 祖·玛珑의 제품 英国梨与小苍兰을 번역하려면, 브랜드 혹은 제품명을 Baidu 에 넣어 영문 브랜드명 혹은 제품명을 검색하여 Jo Malon English pear & Freesia 를 찾고, 이것을 다시 한국 검색 사이트에 넣어 브랜드 공식 홈페이지에서 쓰이는 공식 한국 제품명, 이것이 없으면 쇼핑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한국 제품명을 검색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영문 그대로 쓰는 경우도 많지만, 이런 경우에도 국문에 영문 병기를 해주는 경우가 많아 꼼꼼하게 번역하려면 모두 찾아주는 것이 좋다(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으면 다 해주는 게 맞는 것 같다). 국문명은 조 말론의 잉글리쉬 페어 앤 프리지아였다.

사실 어렵지 않은 단순작업인데, 문제는 양이었다. 이 제품리스트는 PPT 슬라이드의 겨우 1/4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자그마치 10개 브랜드에 제품 각 5개씩 총 50개 제품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50개를 찾으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한국은 영문을 너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언어 간 경계를 넘어선 수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들여오는 것 같다. 검색했던 10개 브랜드, 50개 제품의 국문명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영문명을 그대로 읽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조 말론의 향수 중 'CEDRE ATLAS'의 국문 제품명은 '세드르 아틀라'이다. 향수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굉장이 많이 팔렸거나, 굉장히 오래 팔린 제품이 아니라면) 한 두번 듣고 그 많은 제품의 이름을 다 기억하기 힘들 것이다. 뜻도 알 수 없는 여섯 음절의 제품명을 무슨 수로 기억하겠는가. 이 제품의 중국명은 '雪松之恋이다. 향수 이름이 '설송의 사랑'이라니 좀처럼 잊기 힘든 낭만적인 제품명이다. CEDRE는 삼나무를 뜻한다. 중국어로는 雪松, 한국어로는 히말라야 삼나무 혹은 설송이다. '세드르 아틀라'에서는 짐작해 낼 수 없는 의미이다. 결국 CEDRE ATLAS라는 같은 제품을 구매하는 것인데, 뜻모를 이국적인 제품명에 이끌려 구매하는 한국의 소비자와 삼나무 향이 나는 낭만적인 사랑을 상상하며 구매하는 중국의 소비자는 완전히 소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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