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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Aug 18. 2019

김원봉, 그의 삶이 차라리 짧았더라면...

그 숱한 독립운동가들처럼 김원봉도 해방 전에 옥사하거나 피살되거나 병사하거나 했다면 오히려 더 낫지 않았을까...


최근 그에 대한 서훈 논란, 그리고 해방 이후 그의 삶을 바라볼 때 문득 그런 헛된 생각이 떠오른다.


일제에게 조국을 강탈당한 뒤 1919년, 비분강개한 20살 안팎의 젊은이 13명이 만주 길림에 모여 죽음으로 폭력으로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한다.


조선의열단의 탄생이다.


신채호에게 ‘의열단 선언’을 부탁해 받아 든 것이 ‘조선혁명선언’이고, 구구절절 비장함과 분노와 척살 의지로 가득한 ‘의열단의 방향성’은 마지막을 이렇게 다짐하고 있다.


...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실제로 끊임없이 그들은 국내로 들어가서 (의열단은 만주나 중국에 있는 목표물이 아니라 조선 내 목표물을 우선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경찰서장을 죽이고 총독부와 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그래서 붙잡히고 감옥에 가고 고문받고 죽어나갔다.


그 비타협적인 적개심과 과감한 실행이, 해방 조국의 정당성과 자부심을 만드는데 큰 힘이 된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김원봉이 해방을 맞아 임정의 일원으로 서울로 귀국한 뒤 분단 정국의 혼돈 속에서 이북으로 올라가, 결국 한국전쟁에서 동족을 겨눠 그의 능력을 사용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의 서훈을 도저히 못 받아들이는 정서와 논리는 결코 쉽게 정리되기 어려운 단단한 응어리이고, 아마도 한반도에 통일에 준하는 평화체제가 이뤄진 다음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북한 체제에 기여한 그가, 그렇다고 북한의 권력자로서 풍요로운(?) 삶을 누린 것도 아니다. 1958년 그는 국제 스파이 혐의로 숙청됐다. 그의 마지막이 처형인지 독살인지 병사인지 자살인지... 완벽한 미스터리로 남아있고 젊은 시절 조국해방에 온몸을 바친 인물에게 이런 미스터리 자체가 어쩌면 영원한 형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차라리... 해방 전에 삶을 마감했다면,,, 아니면 아예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헛된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랬다면 후손들의 가슴에 뜨거운 신화로서 영원히 추앙받지 않았을까...


굳이 부질없는 상상을 하는 이유를 대자면, 김원봉 곁에 그런 동지들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 출신으로 가장 가까운 동지 중 한 명인 윤세주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조선의용대 창립 당시(1938년) 김원봉(깃발 가운데) 윤세주 (앞줄 맨 왼쪽) (출처 위키피디아)


의열단, 민족혁명당 그리고 조선의용대로 이어지는 김원봉의 활동과 궤를 같이해온 윤세주는, 타고난 반일의 화신이라 할 만했다. 1901년생인 그는 31 운동을 고향에서 주도한 혐의로 일제가 검거에 나서자 만주로 간다. 길림에서 김원봉과 의열단을 만들고 국내에 잠입했다 검거돼 5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뒤 기어코 다시 중국으로 가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에 가담한다.


1940년대 들어 조선의용대 중 일부는 조선의용군으로 중국 공산당 군에 편입됐고,  윤세주는 조선의용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1942년 태항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윤세주는 엄밀히 보자면 조선의용군 계열로 중국 공산당과 결합 내지 통제 하에 싸웠지만 (더구나 무정처럼 조선의용군은 북한군으로 이어졌지만), 좌우의 논란을 뛰어넘는 그의 헌신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반일 항쟁의 정수로 인정받았다.


대한민국은 그래서, 1982년 그에게 독립훈장 애족장을 수여한다.


의열단원 유자명 (출처:국가보훈처)

유자명은 충주에서 농업학교 교사를 하다 31 운동 이후 역시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의열단 창립 멤버는 아니었으나 1922년경 김원봉을 만나 합류한 뒤 투쟁을 이끌었고 무정부주의에 기반해 ‘폭력의 의열단’을 정당화하는 이론가로 활약했다. 조선혁명선언도 그가 신채호를 도와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임정 계열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 국민당 정부의 요청으로 푸젠성에서 농촌 개발 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즉, 중경 임정 본류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로 인해 그는 귀국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일단 대만으로 가서 1950년 홍콩을 거치는 귀국길에 올랐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홍콩에서 발이 묶이게 된다. 그에겐 방법이 없었고 중국으로 다시 건너간 뒤 영영 귀국길은 막혀버렸다.


그는 중국에서 평생 농업 학자로 살았다. 항일운동 이력뿐 아니라 뛰어난 학자로서 그리고 고매한 인품으로 중국에서는 지금도 그를 칭송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냉전기를 거치면서도 남과 북 모두로부터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유자명이 받은 북 훈장 (출처:뉴스1)

북한은 1978년 3급 국기훈장을 수여했고, 한국 정부도 1968년 대통령 표창을,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이념을 뛰어넘어 남한 북한 중국 모두 그의 업적을 인정했으며 3국 모두에서 존경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김원봉은 귀국한 뒤 예상 못한 복잡하고 잔인하고 해결불능의 혼돈에 휘말리게 된다. 이승만 주도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 환멸을 느꼈을 수도,, 혹은 개인적인 입지의 불안을 느꼈을 수도 있다. 친일경찰인 노덕술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말처럼 친일파의 득세에 본능적으로 견디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는 북한으로 갔고, 한국전쟁에서 책임론을 피할 수 없는 처지가 됐고, 북한 정권에 의해 숙청됐다. 그는 남과 북 모두로부터 버림받는 위치로 내몰린 것이다.


차라리 윤세주처럼 비장한 최후를 맞았더라면,,, 차라리 유자명처럼 귀국길이 막혔더라면,,,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그 고통과 혼돈을 모두 아우르고 이겨내는 조망은 언제 가능할까...

선조들의 모든 분투를 현명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언제 가능할까...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그런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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