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19>>
1992년 1월 21일,
각 대학들은 분주함과 긴장감 속에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날은 후기대학 수험생 예비소집일, 바로 다음날이 학력고사 시험일이었다.
지금의 수능시험 격인 학력고사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각 대학에서 치르던 시절.
별 탈 없이 시험을 무사히 끝내는 건 대학마다 큰일이었고,
특히 전날 배달된 시험지를 이틀 동안 잘 지키는 건 거의 군사 작전 수준이라 할만했다.
경기도 부천의 서울신학대학 경비원 44살 정 모 씨는
숙직을 한 뒤 아침 일찍 순찰을 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본관 전산실, 바로 시험지를 보관 중인 사무실에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전산실 출입문 위 유리창이 깨져있는 것 아닌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시험지를 담아둔 상자들이 훼손돼 있었고, 찢어진 포장지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 봉인을 뜯고 시험지를 훔쳐간 게 분명했다.
시험 전날, 시험지 도난이라니,,,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학력고사가 전격 연기됐고, 급히 문제를 다시 출제해야 했고,
혼란의 책임을 지고 교육부 장관이 사퇴했다.
이 대범한 시험지 탈취범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시험지가 학교에 도착한 20일 정오부터, 도난 사실을 발견한 21일 오전 7시 반까지..
약 20시간 안에 범행이 이뤄진 것은 추정 가능,
그 20시간 동안 본관을 드나든 사람을 최대한 확인했지만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전산실 앞에 아무도 없는 심야시간(시험지 관리 책임자인 교육청 파견 직원이 자리를 비운 사실이 확인됐다)에 사건이 벌어진 게 틀림없으니,,, 그렇다면 그때 학교에 남아있던 사람은 누구인가?
경찰은 신고자인 경비원 정 씨를 지목했고, 정 씨는 범행 일체를 ‘싱겁게’(?) 자백한다.
정 씨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지인의 딸인 황 모양이 이 학교에 응시한 것을 알고 황 양의 합격을 돕고 신입생 장학금을 받게 하려고 시험지를 훔쳤다고 했다.
심야에 각목으로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전산실에 있던 칼로 시험지 상자와 포장지를 뜯어내고 과목당 한부씩 훔쳤지만, 당황한 나머지 황 양에게 전달하지는 못하고 태워버렸다고 진술했다.
전국을 혼란에 빠뜨린 사건 치고는 의외로 쉽게 마무리되는가 싶었지만,,,
정 씨는 자백 이틀 뒤부터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부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황 양 모녀도 자신들을 위해
정 씨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되고 부탁한 적도 없다고 황당해했다.
이미 다른 전기 대학에 합격한 황 양의 실력은 이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부정행위를 할 필요도 없으며(실제로 황양은 10여 일 뒤 실시한 학력고사를 통해 이 학교에 합격했다), 더구나 이 학교에는 신입생 장학금이 없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가장 이상한 점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고 시험지를 훔쳤다면 도난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할 텐데 마치 모든 사람들 보란 듯이 현장을 과장되게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자백도 번복하고, 증거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하고, 사건 현장도 이해하기 힘든 사건...
그럼에도 검찰은 정 씨가 범인이 맞는데, 다만 우리가 모르는 학교 내 암투와 갈등, 즉 배후가 있을 것이라며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증거는 너무 없고 심증은 너무 많은 ‘불일치’의 하루하루가 흘러갔고 정 씨 구속 기간인 20일이 다 지나갔다.
자, 이제 검찰은 선택해야 한다.
증거가 없으니 풀어주든가 아니면 시험지 훔친 혐의로 기소하든가....
이 기로에서 검찰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전혀 다른 카드를 내밀었다. ‘횡령’ 혐의 기소....
정 씨가 몇 년 전 다니던 회사에서 회사 차량 판 돈을 가로챈 혐의를 찾아내 기소한 것이다. 그러면서 공언했다. 일단 횡령으로 기소한 뒤 차차 시험지 훔친 증거를 찾아내 추가로 기소할 것이라고.....
그런데 자신만만한 공언과 달리 검찰은 증거를 끝내 찾지 못했다. 시험지 훔친 범인으로 추가 기소도 못했음은 물론이다.
정 씨는 결국 1992년 7월 10일 횡령 혐의만으로 재판을 받고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바로 풀려났다.
정 씨가 시험지 훔친 혐의로 재판받는 것으로 생각해 왜 풀려났는지 놀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람들 뇌리에 정 씨는 이미 시험지 탈취범이기 때문이다.
결과만으로 보자면 정 씨는 비교적 경미한 횡령 혐의로 6개월 동안이나 갇혀있었고, 그 ‘덕분’에(?) 시험지 도난 사건은 완벽한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돌아보면 너무나 뻔한 ‘비정상’을 당연하게 행동하고 받아들였다.
정 씨가 시험지 탈취범이 맞으니 일단 다른 건으로 붙잡아두고 천천히 시험지 도난 증거를 찾겠다는 이른바 '별건수사'를 검찰은 ‘당당하게’ 말했고,
검찰이 그렇게 하는 게 이해된다는 듯 검찰의 방침을 언론은 ‘담담하게’ 보도했고,
검찰의 의도와 달리 추가 기소가 이뤄지지 않자 법원은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아 횡령 부분에 대해서만 판결하게 됐다”라고 ‘아쉬운’듯 판결을 내렸다.
세월이 흘러 지금 검찰 개혁 논의가 활발하다. 공수처를 얘기하기도 하고, 검찰과 경찰의 권한 조정을 얘기하기도 하고, 검찰의 인지 수사권 축소를 얘기하기도 한다. 다 의미 있고 차분히 논의하면 될 일들이다.
다만 ‘저놈이 범인이 맞다’고 지목하면 이후 검찰의 어떤 방식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온 우리 사회의 무감각 무신경이야말로 무소불위 검찰 권력을 만들어온 한 축일 지도 모른다.
비상식적인 행태를 견제하고 진정시키는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제도 개선 물론 중요하지만,
'그런가보다 하고 결코 둔감하게 넘어가지는 않겠다'는 ‘부릅뜸’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비상식에 대한 정당한 '불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검찰 개혁, 아니 모든 개혁의 시작은 시민의 깨어있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