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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Oct 19. 2019

개구리 소년 - 빈약한 수사력과 위험한 상상력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18>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이 밝혀지면서 그럼 다음은?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린 미제사건은 개구리 소년 사건일 테다.  


경찰청장이 다시 현장을 방문하고 국정감사에서도 의원들이 환기하고,,,

화성 사건에 이어 또다시 과학 수사 힘을 느끼게 될까, 정의의 실현을 보고픈 마음들이 모이고 있다.


그런데, 그토록 갈망했던 진실임에도 착잡한 느낌 또한 어쩔 수 없다.


화성 사건의 진범과 함께 수십 년 누명 쓴 가짜 범인이 밝혀지고,

공권력의 무능과 부도덕이 드러나고,  

결국 지난 세월은 피해자와 유가족, 누명 쓴 이에 대한 2차 가해의 시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개구리 소년 사건의 진실로 가는 길, 과연 진실에 도달할지 아직 모르지만  

그전에 우리가 저지른 수많은 무능과 난폭을 먼저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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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26일

그날은 사상 처음 실시하는 지방선거 투표일, 임시 휴일이었다.


대구 달서구 한 동네에 사는 아이들 5명은

아침부터 모여 마을 뒤편 와룡산으로, 들뜬 마음으로 도롱뇽 알을 찾아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성서초등학교 6학년 우철원, 5학년 조호연, 4학년 김영규, 3학년 박찬인 김종식


이른바 개구리 소년 5명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표현은 한마디로 ‘증발’이었다.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 이후 아이들을 본 사람은 없다.


이 황당한 증발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건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당시 경찰의 능력은 이런 유례없는 증발을 따라가기에 솔직히 역부족이었는지 모른다.


난감함의 시작은 현장인 와룡산에서 시작됐다. 비록 산이라 하지만 아무리 봐도 조난을 당할 만큼 높지도 깊지도 울창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개구리 소년이 실종된 대구 와룡산


해발 300미터의 동네 야산 규모고,

대부분 지점에서 마을의 불빛이 보일 만큼 무난한 산세였다.


아이들이라 해도, 5명이 함께인데, 더구나 늘 뛰어놀던 동네 놀이터 같은 곳인데,,,


게다가 산속 저수지의 물을 다 빼내고 수많은 인원이 철저히 수색했는데도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길을 잃거나 혹은 다쳐서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그런 조난 사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아이들이 스스로 다른 곳으로 갔거나 즉 가출했거나,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 것 아닐까... 일반인들의 상상력 수준에서 경찰 또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경찰은 아이들이 앵벌이로 끌려가 껌팔이 구두닦이 등에

내몰려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리하고 있었고, 당시 포스터에 그대로 반영됐다.


개구리 소년 찾기 포스터


어떤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게 유일하게 이 수수께끼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다시 말하면 전문적이지 않은) 상상력에 근거한 판단이

당시 공권력의 현주소였고 이후 수많은 2차 피해를 낳은 근본 배경이기도 했다.


기대와 달리 개구리 소년은 앵벌이로 발견되지 않았다.


사건은 암흑 속으로 흘러들어 갔고,

그러자 사람들의 무책임한 상상력이 본격적으로 쇄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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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8월 20일, 아이들이 사라진 뒤 1년 반이 지났다.


경기도 안양 지방 노동사무소에 40대 남자가 전화를 걸어 느닷없이 개구리 소년 제보를 한다. 경북 칠곡군 한센병 환자 거주촌에 아이들이 암매장돼 있으니 파보라는 것.


충격적인 제보였으나 아무런 근거도 없었고 엉뚱하게도 노동사무소에 제보했다는 것부터 미심쩍었다. 그래도 전화를 받은 직원은 경찰에 신고했고, 이를 접수한 경기 경찰은 곧바로 대구 수사본부에 연락했다.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편견에 근거한 엽기 소설 같은 제보였으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경찰은 바로 움직인다.


주민들의 항의로 일단 철수했다가 다음날 정식으로 영장을 발부받아

20여 명이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물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한센병 환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격렬한 항의와 감금, 폭력 사태가 벌어진다.

경찰에 가장 불만이 많았지만 특히 언론에 분노했다.


“칠곡 나환자촌 건물 지하실에 실종 성서국교생 암매장”


대구의 한 석간신문이 이런 제목으로 성급하고 선정적인 기사를 게재한 것이다.  


개구리 소년 암매장 신문기사


주민들의 분노는 치솟았고 압수수색에 동행한 기자들과 운전기사 등 10여 명을 감금하고선

이 신문사를 찾아가 사무실 기기를 파손하고 편집국 간부를 승용차에 태워 정착촌으로 끌고 간다.


인근 한 방송국에도 몰려가 기자 등 5명을 구타하고 보도부장을 역시 정착촌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가뜩이나 사회의 냉대에 피해의식을 품어온 우리들에게 흉악한 살인범 혐의까지 덮어 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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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더 흘러 1996년 1월 12일 오후,


실종 소년 중 한 명인 김종식 군 집에서 황당한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실종 아이들이 이 집에 암매장돼 있을지 모른다며 경찰이 화장실과 부엌의 바닥을

1시간 반 동안 굴착기 곡괭이 등으로 파헤친 것이다.


김종식 군 집 발굴 보도 화면


김 군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살해해 자신의 집에 파묻었다는, 정말 한센병 환자 제보보다 더욱 엽기적인 추리였다. 물론 근거가 있으면 얼마든지 확인을 해야겠지만, 역시 아무런 팩트가 없는 누군가의 주장일 뿐이었다.


이 주장을 한 사람은 범죄심리학을 전공한 교수.


그는 경찰에 김 군 아버지가 범인이라는 얘기를 줄기차게 해왔는데 그가 주장한 근거는 글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것들이었다.


자신이 이 집을 방문했을 때 김 군 아버지가 화장실까지 따라오며 경계와 감시를 했다는 것, 김 군 집에 협박 전화가 왔었는데(이 전화는 정말 협박 전화인지 장난전화인지 모른다) 그 대화 내용을 볼 때 김 군 아버지가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등이다.


김 군 아버지는 화를 억지로 참고 발굴 동의서를 써준다. 아들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누명을 풀기 위해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교수는 명예훼손 혐의로 벌금형에 처해졌고, 김 군 아버지는 그로부터 5년 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들의 유골을 보지 못한 건 물론이고 실종 아이들 살해범이라는 터무니없는 혐의까지 경험하고 아들의 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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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5월, 한 주간지는 전문가 기고의 형식을 빌어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개구리 소년들이 북한에 끌려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여튼 이후 이런 주장은 꽤 퍼져나갔다.


북한 전문가라는 기고자는 남조선 어린이들이 수령님을 흠모해 자진 월북했다고 선전할 목적으로 아이들을 유괴 납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고정간첩이 개구리를 많이 잡아주겠다고 아이들을 유인한 뒤 승용차로 영일만으로 데려가 공작선에 태워 납북했을 것이란 구체적 이동경로도 제시했다.


어떤 근거도 없다. 다만 이해 불가한 일을 설명하는데 북한을 끌어들이면 누구도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그래서 감히 비판도 할 수 없는 묘한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자식들이 북한에 납치됐다면, 정말 그렇다면, 부모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유족들은 이렇게 말했다.


“어디서든 아이들이 살아만 있어주면 고맙겠다”


불안 기대 그리고 답답함과 궁금함이 교차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것이다. 누군가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럴듯한 가설을 제시했고, 누군가는 지옥인지 천당인지 모를 뒤죽박죽으로 빠져들었다. 사기꾼 점장이의 모습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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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이들은 2002년 와룡산에서 유골로 발견됐다.

증발 11년 만에 사라진 그 산에서 유골로 돌아온 것이다.


2002년 개구리 소년 유골 발견


도대체 어떻게 수색을 했길래 실종 당시 못 찾았는지 분통과 질타가 쏟아진 건 물론이고, 더욱 맥 빠지는 일은 유골이 된 아이들이 말하는 진실들이다.


아이들은 살해됐고 치아 상태 등을 볼 때 실종된 지 얼마 안 돼 살해됐으며

살해 뒤 곧바로 매장된 것으로 추정됐다.


결국 실종 직후 와룡산에서 살해돼(혹은 다른 곳에서 살해된뒤) 와룡산에 바로 매장됐다고 보는 게 현재로선 가장 합리적이다. 


우리 경찰은 우리 공권력은 우리 사회는, 아이들이 사라지고 살해되고 묻힌 그 현장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수사하고 무엇을 알아냈단 말인가.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벌어졌고 공권력은 빈약한 수사력을 보였고 그 틈을 일반인의 위험한 상상력으로 채운 사건, 그래서 지금까지 미제인 사건, 개구리 소년 사건이다.


경찰이 휘둘린 일반인들의 상상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본 게 없고 들은 게 없는 일반인의 제보는 일종의 공상이다. 한없이 무력해진 공권력은 제보 같지 않은 제보에 우왕좌왕했다. 근거 없는 오지랖에 휘청거렸다.


누군가 고통에 힘겨워하고 있다면 때로는 지켜보고 같이 아파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상상과 공상으로 나서는 건 도와주는 게 결코 아니었을 텐데.. 우리는 개구리 소년의 아픔에 진정 공감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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