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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Sep 28. 2019

추락사 여인.. 누가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 - 17>>

1991년 6월 28일 새벽, 


부산 영도구의 한 건물 옆 주자창에서  

43살 여성 백영옥 씨가 숨진 채 발견된다.


쿵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주변인의 진술,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발견 당시 상태...


그녀가 추락해 숨진 건 틀림없어 보였다.


건물 4층은 불교자비원이라는 복지시설 겸 백 씨의 자택이 있었고 

그녀는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밖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와 

집에서 신경안정제와 맥주를 마신 뒤 잠들었다는 양녀의 진술이 더해져,


경찰은 백 씨가 심야에 화장실에 가다 베란다에서 실족해

떨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정황상 불의의 사고로 본 경찰의 판단에 별달리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정말 단순 추락사고일까, 아니 자살 아닐까, 

아니 혹시 누군가에 의한 타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세운, 거대한 폭력과 잔인한 공기를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은 12년 전인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녀의 남편은 육군 장교, 그것도 엘리트 장교였다.

육사를 졸업한 동기 중에서도 이른바 선두주자인 김오랑 당시 소령은 

유능하고 군인정신이 투철하고 신망이 두터웠고 당연히 장래가 유망했다.


비극의 날,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 정치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그날

그는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다.


쿠데타 군인들은 상급자인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를 연행하고 

쿠데타에 저항할 정상적인 지휘라인의 핵심 인물 체포에 착수했다.


그 라인에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있었다. 


이미 상당수 특전사 간부들이 반란군 편에 가담해 있었고 

정병주 사령관 체포에 나선 사람은 특전사 대대장 박종규 중령이었다.


사령관실에는 정병주 사령관과 

지휘관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오직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한 

김오랑 비서실장이 있었다. 


박종규 중령이 인솔한 무장 병력이  

사령관실 문 앞에서 M16을 난사했고

김오랑 소령은 권총을 빼들어 응사했지만 

반란군들의 총탄 6발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정병주 사령관은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된다. (그는 1989년 자살한다)


김오랑을 공격한 박종규 중령은 같은 관사에 사는 육사 선배였으며 

불과 며칠 전에도 가족 동반 식사를 했던 사이라고 한다.


백영옥은 31살의 나이에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방식으로 남편을 잃었고,  

세상은 남편을 살해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뒤흔드는 잔인한 ‘무엇’이 돼버렸다. 


한 여인을 옥죄는 이 엄청난 변화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백영옥은 실명해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됐고, 

부산의 자비원에 가서 이웃을 돕는 활동을 통해 

어떻게든 삶의 끈만은 놓지 않으려 사력을 다했다. 


그렇게 침묵과 두려움과 암흑을 살아오던 백영옥은 

1989년 

남편을 복권시키는, 남편을 세상에 알리는 활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게 된다. 


진정과 호소를 통해 이듬해 남편의 중령 추서를 이끌어냈고 

이어 12 12 쿠데타 주역들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했다. 


사나운 총칼로 권력을 틀어쥔 세력들이 

힘없는 여인의 놀라운 항거를 과연 어떻게 바라봤을까.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더 가소로운 무모함이라고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른다. 


예상대로 정보기관의 공작으로 매우 강력하게 의심되는 

일련의 ‘괴이한’ 일들이 끊이지 않고 그녀를 공격했다.


남편의 지인을 통해 들어온 소송 포기 압력, 

그녀가 소송 포기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괴소문, 

그녀의 남자관계에 대한 수상한 폭로까지... 


그녀는 자신을 타락하고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가는

이 상황을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이제 그들이 추문으로 날 굴복시키려 하지만 나는 결코 무릎 꿇지 않고 곧 또다시 손배소를 제기할 것이다” 


굴복하지 않았고 더욱 투지를 불태우던 중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그녀가 떨어진 것인지 뛰어내린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민 것인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추락사라는 결과만 남았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분명한 것은 

그녀의 죽음이 무도한 권력과 거기에 영합한 사회가 

만들어낸 ‘사회적 타살’ 임은 부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추락과 죽음은

1991년 6월 28일 새벽이 아니라

1979년 12월 12일부터 줄곧 진행돼 왔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 지 11년 만에 중령으로 추서된 다음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사태 당시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다만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고 그것이 국가에 대한 충성의 전부였다” 


옳고 정의로운 거창한 가치 이전에 

자신의 직무와 역할에 충실했다는 이유로 

비극을 맞이한 사람들...


정도를 포기하지 않은, 

알려진 혹은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없는 존경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백영옥은 12 12 반란 주역들이 재판받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재판으로 가해자들이 큰 징벌을 받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반란자들이 법정에 선 장면을 보고 갔더라면, 


하늘에서 만난 남편 김오랑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둘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위안의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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