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추리 Sep 18. 2019

살인마는 왜 현상금을 올려달라 했나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16>>

1990년 3월 9일 오후

서울 시경에 형사과장을 연결해달라는 한 남성의 전화가 걸려온다.


5명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던, 중요 수배자 22살 김태화였다.


그는 형사과장에게 자수를 하려고 하는데 조건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선처를 약속할 것, 둘째 이미 검거된 공범 24살 조경수와 통화하게 해 줄 것,

형사과장은 두 조건 모두 약속한다고 했지만,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좀 황당했다.


자신에게 걸려있는 천만 원 현상금을 3천만 원으로 올려,

그중 2천만 원은 인천 소년 교도소에 천만 원은 광주 소년원에 기부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김태화는 이날 한 신문기자를 만나 자신의 공익적(?)인 요구를 널리 알리려 하다

경찰에 검거됐다.


방치되고 소외된 청소년들을 걱정하는 듯한 살인범의 호소에

경찰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김태화는 10대 청소년을 4명이나 살해한

미성년자 살인범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아이들의 목숨을 끊었다.


살인극은 한 달여 전인 1월 28일 밤,

서울 구로동의 샛별 룸살롱이라는 술집에서 벌어졌다.


조경수와 김태화가 손님으로 찾아와 여종업원 강 모 양의 접대를 받으며 술을 마셨다.

이들은 이 술집에 가끔 와 안면이 있었고 양주와 맥주를 마시고는 밤 10시쯤 나갔다가

밤 11시 40분경 다시 술집에 나타난다.


다시 온 이들은 같이 술을 마신 강 양에게 외박, 이른바 '2차'를 요구했고 강 양이 거절하자 강 양의 뺨을 때리며 협박을 한 뒤 술집을 떠났다는 게 룸살롱 주인의 진술이다. 이후 주인은 집으로 갔고, 가게에는 종업원들만 남았다고 했다.  


룸살롱 종업원 17살 김 모 군과 근처 당구장 아르바이트생 17살 유 모 군,

그리고 여자 종업원인 16살 강 모 양과 18살 김 모 양 등 10대 네 명만 있었다.


흉기를 들고 침입한 조경수와 김태화에 의해

많게는 10여 군데나 찔린 채 어린 남녀는 쓰러져 있었다.

     

네 명 모두 사망했고 그들이 흘린 피로 룸살롱 바닥은 질퍽질퍽할 정도로 흥건했다.  


특별한 원한이 없는데도 잔인하게 난자한 두 사람은

이미 광주의 술집에서도 불쾌하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여종업원을 살해하고 여주인을 중태에 빠뜨린 전력이 있었다.


그런 광기의 살인마가 내뱉는

소년원 기부 운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들과 직접 통화한 고 최중락 당시 서울시경 형사과장은

이렇게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 조경수 김태화가 감옥살이하던 1980년대 말에는 시국사범들이 많았어요. 노역을 같이 할 수 있고 세면장에서 만날 수도 있고 그 만나는 순간순간에 보이지 않는 '이념화'가 이뤄진 거죠...”

 (고 최중락 전 서울시경 형사과장)     


교도소에서 정치적 수감자들을 많이 본 탓에 터무니없는 흉내를 내면서 자신들의 범행을 사회적 책임으로 돌리고 자신들을 포장하려 했다는 해석이다.

   

범인을 직접 접한 노련한 수사관의 통찰은 정확하다.


광주 술집과 샛별 룸살롱 말고도 그들은 수십 차례에 걸쳐 폭행 강도 강간을 일삼았는데

범행 장소는 철저히 여성들만 있는 미용실이었다. 범행 뒤에는 여성들을 발가벗겨 수치심을 안기고

신속한 신고를 못하게 만들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쉽게 억누를 '약한' 대상을 독사 같은'촉'으로 찾아내고 노렸던 것이다.     


샛별 룸살롱에서도 청소년 네 명이 자신들에게 저항 못할 약한 '먹잇감'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행동했을 뿐이다.


룸살롱 종업원인 17살 김 모군과 여종업원 16살 강 모양은 사귀는 사이였다. 어린 연인은 밤거리 유흥가 술집에서 함께 일자리를 구한 것이다. 강 양은 접대 여성으로 김 군은 술 나르는 웨이터로...    

 

강 양과 또 다른 여종업원 18살 김 모양은 갈 데가 없어 이 술집에서 먹고 자면서 '술집 아가씨' 일을 했다.  

사건이 벌어진 1월 28일은 설날 바로 다음 날이었는데,  

설 사흘 연휴 가운데 설날 당일만 쉬고 바로 다음날부터 다시 접대에 내몰린 미성년자였다.


잔혹한 살인범들은 '만만한' 무방비 미성년자들을 마음 놓고 도륙했다.


약자들에게 더욱 잔인해지는 살인범들의 광기는 즉흥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치밀한 계산의 결과인 셈이다.  


누군가는 미성년자들을 어른들에게 내몰아 돈을 벌고,

또 누군가는 그런 취약한 10대들을 상대로 맘놓고 살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샛별 룸살롱이 드러낸 우리 사회의 엄연한 단면이다.


김태화의 터무니없는 '기부 요구'는 그래서

취약한 계층을 유린해온 살인범의 마지막 '조롱'으로만,

어둠의 거리에 방치된 청소년들을 노린 살인마의 마지막 '이죽거림'으로만 들린다.


조경수와 김태화는 이듬해인 1991년 사형집행으로 우리 사회에서 지워졌지만,

어둡고 뒤틀린 이면은 그 이후 바로잡혀 왔을까.... 아니면 그냥 그대로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17층 추락사 여대생, 그녀의 절망과 분노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