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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Aug 10. 2019

17층 추락사 여대생, 그녀의 절망과 분노는...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15>>


1971년 7월 30일 밤,


당시 서울의 대표적 고층 호텔인 대연각 호텔에서 한 여인이 추락해 숨졌다. 사고 직후 17층 객실에 투숙해 있던 26살 이 모 씨가 경찰에 신고해 이렇게 말한다.


“자신과 함께 투숙한 21살 유 모 양이 갑자기 방에서 뛰어내렸다, 자신이 잠시 물을 가지러 간 사이에... 손 쓸 틈도 없었다”


유양을 호텔 방으로 데려와 결혼하자고 요구했으나 계속 거절해 다툼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흥분한 유양이 돌연 뛰어내렸다는 게, 유일한 목격자이자 신고자인 이 씨의 진술이었다.


추락으로 인한 골절과 출혈이 사망 원인으로 파악되면서, 경찰도 처음에는 이 씨의 말대로 갑작스레 벌어진 자살로 판단했다.


그러나 뭔가 석연치 않은 설명이었고 유양의 가족들이 타살이 분명하다며 강력한 수사를 요구하던 중, 국과수의 부검 결과가 도착한다.


국과수의 소견은, 질식사의 가능성도 있다는 것, 목 조른 흔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유양의 허벅지에 찔린 듯한 상처가 있다는 것 등이었다.


이 씨를 추궁한 경찰은 사건의 전모를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 씨가 결혼해달라고 협박해도 유양이 받아들이지 않자 성폭행하려 했고, 유양이 강하게 저항하자 잭나이프로 유양의 허벅지를 찌르고 목을 졸랐다. 실신한 유양을 (아니면 이미 사망한 유양을) 창밖으로 던졌다”


1심 강간치사죄로 무기 선고.


그러나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된다.


허벅지 상처가 칼에 찔린 게 아니라 찢어진 상처, 즉 추락 과정에서 생겼을 수 있다는 전문가 의견에다 문제의 잭나이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방에서는 혈흔도 발견되지 않았다.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들만 쏙 빠져 있었던 것이다.


대법원은 2심의 무죄 선고를 파기 환송한다. 즉 유죄가 맞는데 고법이 무죄로 잘못 재판했으니 다시 재판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고법은 또다시 무죄를 선고하고 대법원은 또다시 파기 환송한다.


유례없는 두 차례 파기 환송.  


결국 두 번째 파기 환송 심에서 고법은 무기를 선고했고 대법원이 징역 10년으로 최종 결론짓는다.


과연 그가 칼로 찌르고 목을 조른 뒤 유양을 던진 것인지 아니면 유양 스스로 뛰어내린 것인지, 결정적 진실은 묻힌 채 10년형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그런데...


그날 밤 17층 호텔방에서 유양이 살해된 것인지 뛰어내렸는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됐지만, 그래서 재판의 핵심 쟁점이 됐지만,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보다 본질적인 질문은 따로 있었다.


그녀가 그 방에 오게 된 이유, 그리고 그녀가 죽음 직전 처한 상황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두고두고 주목해야 할 불편함이자 풀어야 할 숙제였다.


숨진 유양은 당시 서울 모 여대 4학년으로 이른바 메이퀸, 5월의 여왕으로 뽑힌 미모의 여대생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 대학가에선 메이퀸이라는 일종의 미인대회가 유행이었고, 1970년대 초는 메이퀸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동경이 가장 컸던 시절이었다.


유양과 함께 묵은 이 씨는 양화점을 운영하는 젊은 사업가였고, 유양 오빠와 동업관계였다. 동업자의 동생인 유양을 알게 됐고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이 씨는 유양이 첫눈에 반할 정도로 이상형이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그러나 유양은 이 씨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양은 남편감으로 외교관이나 교수를 생각한다고 이 씨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녀의 진심인지 이 씨를 단념시키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녀가 이 씨에게 호감이 없었음은 분명했다. 그러던 중 유양에게 사귀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 씨는 마음을 접는 대신 집착하고 집요해진다.


친구 두 명과 양화점 직원에게 돈을 주고 유양을 납치하도록 한 것이다.


17층 그 방에서 그날 밤 이 씨가 유양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는 그가 법정에서 진술한 답에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그날 밤 (유양과) 같이 지내 이 사실을 그 사람(유양이 사귀는 사람)에게 알려 내 사람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납치와 협박과 성폭행이라는 일련의 순서로 작전을 진행했고 그 끝에는 짝사랑하는 여인과 행복한 결혼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가 믿었다는 게,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 말하는 진실이다.


이 씨가 유양을 살해했다면 물론 분노할 일이지만, 만약 공포 속에서 유양이 자살한 것이라면, 이 씨가 유양을 납치한 그 순간 살인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여성을 굴복시켜 포기하게 만들고 결혼이란 결과만 있으면 범죄도 ‘사랑을 향한 남자다움’으로 포장되는 뒤틀림은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퍼져있었다.


1989년 12월

같은 학원에서 근무하는 동료 강사를 성폭행한 혐의로 31살 이 모 씨가 구속됐다. 그런데 이 씨를 구속한 검사는 매우 희한한 해법을 피해자에게 제시한다.


피의자 이 씨가 재판받으면 틀림없이 2년 이상 선고받을 텐데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니 그렇게 하지 말고 둘이 결혼하는 게 어떠냐고 말이다.


놀랍게도 이 괴상한 제안은 실제로 이행돼 둘은 혼인신고를 하고 피해자는 고소를 취하해 피의자는 풀려났다.


내막에 다른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성폭행범과 성폭행 피해자라도 결혼으로 엮으면 범죄를 따지지 않을 명분이 만들어진다고 우리 사회가 동의하고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납치해도 감금해도 성폭행해도 구타해도... 그렇게 해서 하여튼 결혼을 하면 굳이 처벌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비상식이 결국 은밀한 범죄를 양산해 왔다는 사실이다.



"부인을 2년간 따라다녔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차에 태워 납치했다 "


"19살 때 남편을 만나 성폭행에 가까운 일을 당하고 2개월 만에 결혼했다 "


최근 중년 이상 연예인 부부들의 결혼에 관한 이런저런 고백은 그 시절 낭만과 열정의 이름으로 도대체 무슨 일을 벌여왔는지 짐작하게 만든다.  


사회적 묵인 속에 범죄를 동원해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실현한 이런 결혼을 ‘납치혼’이라는 표현 말고 달리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상 성폭행을 당하고 결혼하게 됐음을 이제야 알게 됐다는, 한 여성의 글은 꺾이고 순응하게 되는 여성의 심리를 냉철히 하지만 아프게 기록하고 있다.



“... 결혼은 승낙이 아니라 체념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못했어요.


저도 당시의 제가 답답하고 한심하고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당시 그 상황에서 저는 살았다는 것만으로 그나마 다행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당일 날 저는 집을 가지 못했고 다음날도 집에 가지 못하고 함께 있었습니다.


선녀의 옷이 아닌 선녀의 날개라도 부러뜨린 듯 도망(?) 가거나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옆에 있는 모습에 안심이 됐는지 정말 잘해주더군요.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결혼뿐이었어요... "



이런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여성들의 한과 분노와 원망이 그냥 사라질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과거와 우리는 확실히 절연하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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