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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Jul 18. 2019

이 씨 부부의 분신.. 범인은 미개한 사회?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14>>

1981년 3월 5일 밤 서울 봉천동의 한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단순 화재가 아니라 부부싸움에 이은 끔찍한 방화였다. 남편 34살 이 모 씨가 아내 31살 이 모 씨와 다툼 끝에 자신과 아내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는 불을 붙인 것이다. 아내는 숨지고 생존한 남편은 살인 방화 혐의로 구속된다. 생활고에 따른 부부싸움 그리고 남편의 망동으로 설명되는 사건인가 했는데, 경찰 수사 결과 뜻밖의 배경이 등장한다. 


부부는 둘 다 ‘전주 이 씨’, 이른바 동성동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동성동본 사이의 결혼이 금지된 나라였다. 시골에서 상경한 두 젊은이는 어린 나이에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11년 전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혼인신고를 하려 했는데, 동성동본이라 불가능하다고 거절된다. 부부로서 권한과 법적인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동거인 관계로 10년 넘게 살아왔고 둘 사이에 태어난 네 명의 아이들도 제대로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는 처지에 몰렸다. 


먹고살기도 하루하루 힘겨운 가난한 부부가 이 문제로 얼마나 심리적 고통을 받았을지, 또 얼마나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을지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동성동본의 혈족 사이에는 혼인할 수 없다’ 


이 민법 조항은 우리 사회를 아주 오랫동안 짓눌러왔다. 수많은 이들을 좌절과 갈등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동성동본 금혼 법률은,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뜨거웠던 2002년, 활기찬 개방의 시대인 그때도 대한민국에서 엄연히 존재했었다. 비록 1997년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긴 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진 건 놀라울 정도로 최근인 2005년 호주제 폐지와 함께였다. 


동성동본 금혼은 우리의 전통도 아니고 미풍양속은 더더욱 아니라는 절규는 우리 사회 한편에서 계속 제기돼 왔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오랜 세월 유지돼 온 건 일종의 ‘협박’ 때문이었다. 


이른바 근친혼은 우생학적으로 매우 유해하다고 위협한 뒤, 동성동본 결혼을 근친혼으로 몰아가는 무지막지한 논리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동성동본 금혼이 폐지된 지금, 8촌내 결혼은 여전히 금지돼있다. 근친혼에 대한 우려는 이 정도로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성동본 남녀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매우 열등하고 문제 있는 아이가 태어날 거라는 협박이 안개처럼 모호하게 대신 광범위하게 유포된 것이다.


서구 사회와 일본은 물론이고 동성동본 금혼의 시발점인 중국에서조차 이미 없어진 규정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열등한 자식을 낳게 되는 근친혼이다’라는 공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터무니없다. 동성동본 결혼의 위험성이라는 게 모계 혈통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과학적 논리임이 명확한데도, 오죽했으면 8대 후손이 서로 피가 섞인 정도는 126분의 1, 20대 후손은 52만 분의 1, 30대 후손이라면 5300만 분의 1이라는 ‘알기 쉬운’ 반박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였다. 


1970년대 동성동본 금혼 폐지 서명 운동 모습 


동성동본 결혼이 근친혼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먼저 답해야 할 더 본질적인 의문이 실은 있었다. 동성동본인 너와 내가 과연 정말로 ‘특별한 연결’이 있는 그런 사이냐 하는 솔직한 질문 말이다. 


조선 중기인 1690년의 호적 분석에 따르면 노비의 비율이 43.1%라고 한다. 양민 중에도 성이 없는 이들이 태반이었지만 양민을 빼놓고 생각하더라도 조선 중기에 성도 족보도 없는 노비가 열 명 중 네 명이라는 뜻이다. 


1858년 조선 후기에 오면 노비의 비율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30.1%를 차지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대한민국에서 성과 본이 없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지금 적어도 열 명 중 세 명, 혹은 열 명 중 네 명은 자신이 갖고 있는 성과 본이 선조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원래부터 갖고 있던 게 아니고 어느 시점에 양반의 성으로 끼어 들어갔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끼어들어가는 방식, 그러니까 원래는 성이 없던 사람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남의 성에 끼어들어간 방식이 거듭된 결과, 현재 김해 김 씨 440만 명, 밀양 박 씨 310만 명, 전주 이 씨 260만 명, 경주 김 씨 180만 명이라는 거대한 성씨 집단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5500여 개의 성이 있지만, 최근 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새로 만든 특이한 성들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성은 3백 개가 채 안 된다. 


반면 이웃나라 일본은 30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 


일본은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이후 평민들에게 성을 가지라고 강제하면서 스스로 성을 만들게 했다. 반면, 우리는 기존에 양반이 가지고 있던 성에 양민과 천민이 편입해 들어갔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김해 김 씨’, ‘밀양 박 씨’라는 깃발 아래 이런저런 이유로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모여든 게 동성동본의 실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양민과 천민이, 즉 성이 없는 사람들이 왜 기존 양반의 성에 기를 쓰고 편입해 들어가려고 했는지는 아마도 상상 가능할 것이다. 성씨 연구가들이 한국의 성은 혈족의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개념이라고까지 말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놓고 동성동본 결혼을 막는 게 전통을 지키고 미풍양속을 지킨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더구나 그들이 ‘우생학적 해악’을 떠들고 다닐 때 그냥 두고 본 우리 사회 전문가들은 또 다 뭐란 말인가?  


1977년 2월 22일 22살 송 모 씨와 21살 여대생 송 모 양이 여의도의 한 호텔에 투숙한다. 그들은 프런트에서 높은 층을 요구해 10층 방에 묵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 서로의 손을 끈으로 묶고 창밖으로 함께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방에 남긴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동성동본이라고 결혼을 못하게 하지만 헤어질 수도 없다...”


2005년까지 동성동본 금혼 규정이 살아있던 그 시절은 확실히 터무니없는 코미디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그냥 웃고 넘겨버리는 코미디라면 다행이지만 누군가에게 엄청난 고통을 남긴 잔인한 코미디의 시대였다. 


서로가 솔직하지 못하고 허위와 가식이 만들어낸 사회적 타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더 세월이 흐른 뒤 우린 아마도 몹시 부끄러워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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