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13>>
1981년 9월 24일 오전, 대구 수성구 만촌동의 한 주택 안방에서 집주인인 중년 부부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계명대학교 명예교수인 59살 박희범 씨와 내과의사인 53살 채수희 씨 부부. 두 사람은 링거를 꽂은 상태로 채 씨의 조카에 의해 발견됐는데, 남편 박 교수는 이미 숨진 상태였고, 아내는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외부 침입 흔적이나 외상은 없었다. 다만 방에는 각종 약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가장 특이한 점은 두 사람 팔에 꽂혀있는 링거 병이었다.
링거 내용물을 수거해 검사한 결과, 독극물이 발견되진 않았지만, 과도한 양의 수면제와 진정제, 그리고 마약 성분 등이 검출됐다. 사인은 바로 특별히 제조된 이 약물 때문으로 파악됐다.
내과의사인 부인이 독극물을 쓰지 않고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약물을 만들어(어쩌면 가장 편안하게 죽음에 이르는 약물일지도...), 먼저 남편의 팔에 링거를 놓은 뒤 자신도 투약한, 동반자살로 검찰은 결론 내렸다.
남편 박희범 교수는 문체부 차관과 충남대 총장을 역임한 뒤 계명대 명예교수로 초빙된 당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경제학자 중 한 명이었다. 부인은 내과 전문의로 조폐공사 의무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첫 부인, 첫 남편과 사별한 뒤 재혼한 부부였다. 최고 엘리트이고 안정적인 삶이고, 금슬도 좋았다는 이 부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남편 박 교수는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는 통보를 받고는 집에서 아내의 간병을 받았다. 절망의 상황이었고, 이 상태가 매일매일 어떤 고통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내과의사인 아내 채 씨가 가장 잘 알았다. 게다가 아내 역시 심장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힘겨운 날들이 이어졌다.
부부는 고통이 커지고 희망이 사라질수록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대처가 무엇일지 고민했다.
삶을 스스로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자신들을 어디에 묻어야 할지는 물론, 신문사에 알릴 부고 문구와 비문에 새겨 넣을 내용까지 하나하나 결정하고 가족들에게 알렸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 길을 자신들의 힘으로 떠난 것이다.
안락사는 ‘소극적’ 안락사와 ‘적극적’ 안락사로 나뉜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 소극적 안락사라면, 적극적 안락사는 이 고통을 끝내는 가장 편안한 방법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구분에 따르면 이들의 죽음은 ‘적극적’ 안락사에 해당한다.
37년이나 지난 2018년에서야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즉 ‘소극적’ 안락사를 용인할 수 있는 법이 대한민국에서 비로소 시행됐다. ‘적극적’ 안락사는 여전히 불법이고 쉽지 않은 논란에 누구도 답을 내놓기 어려운 주제다.
안락사 논란 자체가 낯선 시절,,,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의료 기술에다 호스피스에 대한 고민 자체가 부족한 시절이었다. 도무지 이 고통과 절망을 어떻게 감내해야 할지 고민을 나누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 사회 시스템과 의료 수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현명한’ 엘리트 부부였기에 오히려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답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냉정히 파악하고 있었다.
부부가 던지고 간 숙제를 우린 여전히 앞에 두고 있다. 매우 중요한 논의를 우리는 거듭해야 한다고 슬픈 부부가 아주 오래전 선구적으로 알려주고 떠났다.
부인 채수희 의무실장은 남편 박희범 교수가 사별한 첫 부인과 오랜 친구 사이라고 한다. 채 씨는 친구의 마지막 병간호를 했고 그 과정에서 그녀로부터 자신의 남편과 재혼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박 교수와 채 씨는 자신들이 죽은 뒤 박 교수 첫 부인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최초의 ‘적극적’ 안락사로 기록될지도 모를 저 슬프고도 아름다운 죽음이... 우리 사회가 안락사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는지 가만히 지켜보는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