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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Jun 12. 2019

살인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다!?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12>>



1995년 6월 12일 아침 7시, 외과의사 33살 이 모씨가 출근을 위해 아파트를 나서는 모습을 경비원이 목격한다. 이 날은 이 씨가 개업한 자신의 병원으로 첫 출근하는, 그에게는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병원까지는 집에서 한 시간 거리, 예상대로 오전 8시쯤 병원에 도착했다.


집에는 치과의사인 아내 31살 최 모씨와 두 살배기 딸이 있었다. 아내의 병원은 집에서 멀지 않았다. 오전 9시쯤 집을 나서 딸을 근처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병원에 9시 반쯤 도착하는 게 그녀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8시 50분경 경비원은 이 집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발견한다. 무슨 일인가 확인하러 7층으로 올라갔고, 불이 난 걸 인지하고는 화재 신고를 했다.


소방차가 출동해 바로 진화했지만, 욕실 욕조에 물이 차 있고 그곳에 최 씨와 딸이 숨져 있었다. 모녀에게는 끈 같은 것으로 목 졸린 흔적이 있었다.


사건 발생 당시 MBC뉴스 화면


남편이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그는 혐의를 전면 부인한다.

잔인한 살인마인가 아니면 완벽한 누명인가,,, 그 중간이나 타협점은 없었다.


범행도구나 목격자 같은 명확한 직접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몇 가지 사실만이 던져진 사건, 이른바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이다.


1. 전날 밤 10시 30분 부인 최 씨는 집에서 언니와 통화했다

2. 아침 7시 남편 이 씨가 집을 나섰다.

3. 아침 8시 50분 경비원이 연기를 발견하고 이 집을 방문한 뒤 신고했다.

4. 화재는 안방 장롱 속에서 시작됐고, 자연 발화가 아닌 누군가의 방화다.


전날 밤 10시 30분에서 다음날 오전 8시 50분 사이 최 씨와 딸은 살해됐고, 범인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추론이 당연히 가능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범행시간은 남편이 집을 나선 7시 이전인가, 아니면 그 이후인가... 아내와 딸을 살해한 악마인가, 아내와 딸을 잃은 피해자인가, 남편은 극과 극의 기로에 서게 됐다.   


경찰과 검찰 그리고 1심 재판부는 시강(시신의 강직도), 시반(시신에 나타난 혈액 얼룩), 그리고 위속의 음식물 등 간접 증거를 근거로 오전 7시 이전에 범행이 이뤄졌으며 따라서 남편이 범인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변호인의 반박은 상식적이고 구체적이었다.


만약 7시 이전에 이 씨가 불을 지르고 나왔다면, 과연 8시 50분에 그러니까 1시간 50분이나 지나서 화재가 발견되는 게 가능한 일인지 반문했다. 그리고 실험을 통해, 불을 지르면 불과 몇 분 만에 외부에 드러난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그리고 세계적인 법의학자를 법정으로 불러, 물속에 담겨 있다가 이후 냉동 보관된 시신을 뒤늦게 보고 사망시간을 추정하는 건 매우 부정확하고 위험한 일이라는 증언을 받아낸다.


1심 유죄, 2심 무죄, 대법원 유죄 취지 파기 환송, 고등법원 무죄, 대법원 무죄.

이 씨는 8년 만에 살인범의 족쇄에서 완전히 풀려났다.   


진범은 누구인가, 또 하나 충격적 미제사건으로 기록되고 억울한 죽음만 남게 됐다.


그런데,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점차 사건이 잊혀갈 즈음,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이 한 언론과 인터뷰를 한다.


그는 ‘남편의 살해 동기가 너무나 명확해 너무 쉽게 생각한 게 유일한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살인사건을 쫓으면서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 바로 동기입니다. 형사들 사이에선 속된 말로 ‘죽을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치정이나 원한, 금전관계 등 누구나 수긍할 만한 살해 동기가 존재한다는 얘깁니다” (일요서울 2009년 11월 10일)


경찰과 검찰은 부인 최 씨가 결혼 뒤 어느 남성과 사귀는 사이였고, 이를 눈치챈 남편과 갈등이 생겼다고 확신했다. 검경은 남편이 딸도 친딸이 아닌 것으로 의심했다고 추정하고 실제로 유전자 검사까지 실시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검사 결과는 이 씨의 친딸로 나왔다.


남편 이 씨가 범인으로 확정됐다면 다음과 같은 검찰의 기소 내용은 그대로 인정됐을 것이다.


“... 남편 이 씨는 평소 부인 최 씨가 독단적인 성격으로 자신을 무시하고 집안의 금전관리를 도맡아 하면서 가정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이 씨의 부모형제와 심한 불화를 빚어 온 데다가, 000과 불륜관계를 맺어온 것을 눈치챘다. 이에따라 부인이 출산한 딸이 피고인의 친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됨으로써 부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던 중...”


부인은 독단적 성격이고 남편을 무시했으며 자기 마음대로 가정 일을 처리한 사람이며, 남편은 딸마저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의심한 사람이라고,,,,그래서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살다가 살인이라는 극단의 결말을 맺은 사람이라고,,, 검찰은 두 사람의 인생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부인 최 씨에게 그런 남성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최 씨 스스로 관계를 정리했으며, 사건이 벌어지기 얼마 전 부부는 해외여행을 다녀왔으며, 남편의 병원 개업에 부인이 경제적으로 큰 힘이 됐으며 두 사람은 둘째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 중이었던 면도 그들에겐 있었다.


진범은 신만이 알 것이다. 다만 누군가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다면,

징벌보다 더 가혹한 건 소설처럼 쓰여진 이른바 ‘범행 동기’가 아닐까.


억울한 가짜 범인은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왜곡되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한다.

누명을 쓴 사람들의 초점 잃은 표정은 억울함보다 자신의 삶을 난도질하는 세상에 질려버려서 아닐까.


범행의 '동기'만을 추정하면 할수록, 엉뚱한 누군가가 자꾸만 ‘범인처럼’ 보이고, 결국 '범인다운' 인생으로 재구성하게 된다는 건, 참으로 위험한 연쇄 작용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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