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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Jun 01. 2019

'미모'의 '여대생'은, 치정 사건이어야 하나?

<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11->>

1981년 9월 21일 서울 삼성동의 한 야적장에서 여대생의 시신이 발견된다. 21살 박상은 양이 목이 졸리고 얼굴과 머리에 둔기로 맞은 듯한 상처를 안고 숨져 있었다.


그녀의 집은 부산이었는데, 전국 대학생 미전에 입상해 상을 받기 위해 서울 오빠 집에 잠시 올라온 상태였다. 18일 시상식에 참석하고 그날 밤 남자 친구 장 모 군을 만난 뒤, 밤 9시경 오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잠시 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여인’이 박 양을 찾는 전화를 걸어왔다. 이를 받은 오빠가 박 양을 바꿔주자, 박 양은 친구를 만나겠다면서 9시 10분경 다시 외출했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겼고 사흘 뒤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경찰은 강도 살인도 의심했지만, ‘치정’에 얽힌 사건으로 심증을 굳혀가고 있었다. 경찰이 그렇게 본 건 시신의 뺨 부위에서 발견된 이른바 ‘치흔’, 즉 물린 흔적 때문이었다. 국과수는 그날 밤 어느 남성과 ‘관계’를 갖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로 판단했고, 경찰은 유력 용의자로 그 남성을 찾았다.


경찰은 남자 친구 장 군을 지목했다. 집요한 추궁 끝에 기어코 자백을 받아낸다. 치흔이 장 군의 치아구조와 유사(?)하다는 감정 결과도 받아 들었다. 경찰이 밝힌 스토리는 이렇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바래다준 뒤, 장 군은 다시 전화를 걸어(여자 목소리를 흉내 내) 박 양을 바꿔달라고 해서 다시 만났다. 함께 여관에 투숙하고 나오다 박 양이 자신을 책임지라고 하자, 순간적으로 화가 나 그녀의 입을 막고 밀치다가 머리와 얼굴이 벽에 부딪쳐 사망했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어설픈 스토리였다. 장 군은 강요와 협박에 의한 자백이었다며 일찌감치 번복하고 있었다.


경찰은 장 군의 구속을 검찰에 요청했지만 검찰은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뭔가 객관적인 근거를 요구한다.  범인이 맞다, 아니 뭔가 이상하다, 검경은 이례적인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검찰이 직접 신문하기로 한다. 경찰한테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선 장 군을 직접 조사한 검찰의 결론은 혐의 없음.


장 군은 석방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대체 왜 상은이를 죽이겠는가. 나도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도 나를 좋아했다. 나에게 왜 안 죽였느냐고 묻지 마라, 죽이지 않았으니까 안 죽인 거다”  


'왜 안죽였느냐고 묻지 마라'... 경찰의 추궁이 어떤 식이었을지 짐작케 하는 항변이다.

그래서 이번엔 검찰이 경찰 잘못을 만회하겠다고 호기롭게 직접 나섰다. 그런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면서도 한 가지 출발점은 놓지 않았다. 치정에 얽힌 사건이라는 대전제 말이다.


장 군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검찰은 어학연수 동기생 정 모 군에 주목한다. 어학연수 중 박 양에 호감을 가졌으나 박 양이 장 군과 가까워지면서, 정 군이 질투심과 분노를 느껴왔다는 것이다.


사건 당일, 지나가는 여성에게 부탁해 (나중에는 ‘숙모에게 부탁해’로 바뀐다) 박 양 집에 전화를 걸었고, 차 안에서 박 양을 안으려다 박 양이 화를 내며 모욕을 주자, 목을 조르고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게 해 살해했다는 것이 검찰의 발표였다.


정 군이 차량에서 사용하다 교체한 시트커버를 트렁크에 보관 중이었는데, 검찰은 그 시트커버에서 조그만 혈흔을 찾아낸다. 박 양의 혈액형인 O형의 혈흔. 범행 장소가 '차 안'임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검찰은 확신했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단지 O형이라는 이유만으로 커버의 혈흔이 피해자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특히 목받침 커버 두 개에서 모두 O형 혈흔이 나왔다는데 주목했다. 즉 바꿔 끼운 커버에서 모두 혈흔이 나왔다면 이것은 여러 날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지 범행 당일 흔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정 군은 풀려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검사가 나를 범인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죄인으로 만들 수는 없다”


경찰이 단정한 '범인' 장 군, 검찰이 단정한 '범인' 정 군 모두 풀려났고, 이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진실을 놓치는 대신 우리 사회에 왜곡된 선입견이 얼마나 깊은지 뒤늦게 알게 됐다.


장 군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무죄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상은 양을 나에게 인사까지 시켰다. 내가 결혼할 여자 아니면 인사받지 않겠다고 하자 아들은 결혼하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그런데 언론과 경찰이 마치 두 아이를 '탕아'처럼 몰아갔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나간 미모의 여대생이 숨졌다면 반드시 복잡한 남자관계로 인한 사건이었을까?

경찰은 남자 친구를 범인으로 단정했고, 검찰은 그 남자 친구를 질투한 남자를 범인으로 단정했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또 누구일까?  

왜 그녀는 '남자관계 속'에서만 이해돼야 할까?


그러고 보니 다시 물어보고 싶어진다.


치흔은 정말 누군가와 성관계 중 발생한 것이었을까.(남자친구 장 군은 박 양과 사랑하는 사이지만 ‘관계’를 가진 적은 없다고 언론에 말했고, 검찰이 추리한 정 군의 범행 과정은 치흔이 생길 틈이 없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10만 원이라는 당시 꽤 큰 현금이 없어진 것은 무엇이고 반지가 없어진 것은 또 무엇일까. 그리고 박 양의 옷에서 발견된 혈흔들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억울한 죽음이 미제로 남겨진 것은 물론이고, 20살을 갓 넘은 여성에 대해 맘대로 소설을 써대는, 엄청난 2차 피해를 결국 우리는 남기고 말았다. 원통한 죽음을 관음증과 선정적 관심거리로 결국 가둬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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