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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May 21. 2019

잔인한 조폭? 철없는 20대?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10>>

쿠데타 일으킨 군인이 대통령이던 시절이었고, 시위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고, 고문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멀쩡한 사람도 삼청교육대로 잡아가고, 해외에 나가려면 따로 교육을 받아야 하던 시절, 모든 게 억압되고 통제되던 시절이었다.


그 강력한 권력이 사회를 옴짝달싹 못하게 억누르고 있는가 했는데, 정권 지키기에만 신경을 써서일까, 범죄조직들은 오히려 번창하고 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사건이 벌어진다.


1986년 8월 14일 밤, 서울 역삼동 서진 룸살롱에서 조폭들이 벌인 영화보다 더 잔인한 살인극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진 룸살롱 17호실에는 '맘보파' 일당 7명이 조직원 출소 기념 술자리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20호실에는 '진석이파' 일당 8명이 역시 모임 중이었다.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무렵, 복도에서 맘보파의 조원섭 송재익과 진석이파의 고금석 김승길 사이에 사소한 시비가 벌어졌다.


진석이파 고금석이 소리를 치며 흥분을 참지 못하고 발목에 차고 있던 대검을 뽑아 든다. 당황한 상대 조원섭은 급히 화장실로 도망쳤지만 고금석은 뒤따라가 조원섭의 가슴과 팔다리 등 11군데를 무참히 찔렀다.


이때 진석이파 김동술 박영진 유원희 등이 복도의 소란에 잇따라 20호실에서 나온다. 이중 행동대장 김동술은 발목에 차고 있던 생선회 칼을 뽑아 들고 역시 화장실로 도망가는 맘보파 송재익을 뒤따라갔다. 김동술은 다툼이 일어난 이유도 모르면서 묻지도 않고 송재익의 가슴 팔다리를 7차례나 찔렀다.


살인의 광기에 휩싸인 채, 김동술과 고금석이 앞장선 진석이파는 아예 맘보파가 술을 마시는 17호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살육을 이어간다.


서진룸살롱 살인 현장


김동술은 야구방망이로 상대 조직원 정판기의 머리와 몸을 10여 차례 강타하고 생선회 칼로 팔을 찔렀다. 또 다른 조직원 이민석을 생선회 칼로 무수히 찌르고는 발목 아킬레스건을 잘라버렸고, 고용수의 이마 팔 허벅지 등을 11차례나 찔렀다. 이미 제정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상태에 빠져들었다.


고금석도 맘보파 장경식의 팔과 다리를 10여 차례 찌르고, 이미 김동술에 의해 거의 죽음에 이른 고용수의 양 발목 아킬레스건을 내리찍어 힘줄을 끊고 뼈를 부숴버렸다.


무섭다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지옥 같은 밤이었다.


진석이파는 장진석을 두목 삼아 당시 유도대학 졸업생들을 모아 만든 신생 조직이었던 데 반해,  맘보파는 급이 다른 기성 조직이었다. 그래서일까 맘보파가 방심했을 수 있지만 누구도 상상 못 한 끔찍하고 급작스런 공격에 맘보파는 힘 한번 쓰지 못하고 4명이 사망했다. 화장실에서 당한 조원섭과 송재익 그리고 17호실에서 숨진 장경식 고용수, 이렇게 4명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마구 사람을 찔러대고 찍어대고 끊을 수 있을까?


목숨을 내놓고 막사는 사람들인가, 조폭이란 이런 건가.. 애당초 뭔가 다른 사람들인가 하고 다들 두려워했다.


그러나 세상 무서울 거 없는 냉혈한처럼 보였던 그들이 정작 재판 과정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가장 야수 같은 행동을 했던 고금석은 1심에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한 뒤 최후 진술을 하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펑펑 울면서 말이다.


“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궂은일만 도맡아 했습니다. 그 선배들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나한테만 뒤집어 씌우고...”


대부분 20대 초중반이었지만 고금석은 그중에서도 가장 어린 22살이었다. 40대의 정요섭이 후견인 격이었고 26살 장진석이 두목 격이었다. 그런데 이 두 ‘리더’는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지만, 재판에서는 자신들은 범행과 관련이 없다고 매우 적극적으로 변명하고 있었다.


정요섭은 자신은 20호실에서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다툼이 있는 건 알아도 사태의 심각성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장진석은 뒤늦게 자신도 방을 나가보긴 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몰랐고,  게다가 이미 모든 살인극이 끝난 다음이라 범행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런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20대 초반 고금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법은 냉정했다. 8명 중 범행 가담 정도가 가장 심한 김동술 고금석 두 명만 사형이 확정됐고, 범행 3년 뒤인 1989년 8월 사형이 집행됐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세상모르고 앞장선 졸개 2명만 미쳐 날뛰다가 사형을 당한 것이다.



사형수를 만나 교화활동을 펴온 박삼중 스님은 가장 기억에 남는 사형수로 고금석을 꼽았다. 영치금을 불우 이웃을 돕는데 쓰는 그를 보면서 교도소에서 성자처럼 산 사람이었다고 스님은 회고했다.


세상에 대해 더 차근차근 알아가며 인생을 만들어가야 할 20대 초반 젊은이들을, 허세와 기만과 힘의 단맛으로 유혹해 잔인한 범죄로 몰아간 이들, 그런 사람들이 조폭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후 조폭 영화가 인기를 끌고 뒷골목 의리 문화에 혹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뭐랄까 아이러니를 넘어 우리 사회의 무신경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를 파멸로 몰아넣으면서 그들로부터 기생충처럼 빨아먹는 사람들...

조폭의 의리와 질서란 고작 이런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잔혹함과 비열함으로 뒤범벅돼 있을 뿐이라고,  조폭의 민낯을 저 충격적 살인극이 거듭 드러내고 증언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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