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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May 06. 2019

살해 도구는 빨랫줄인가 쇠망치인가

<<그 사건 뒤에는 무엇이 있나-8>>



1981년 8월 4일 서울 원효로에 사는 71살 윤 모 할머니 집에서 윤 씨와 가정부 19살 강 모양 그리고 윤 씨의 6살 난 수양딸이 숨진 채 발견됐다.


무더운 여름날 시신은 악취가 진동할 정도로 부패해 있었고, 현장은 피로 뒤범벅이었다. 윤 할머니는 당시 수 억 원대의 자산가로 알려졌는데, 직계 가족은 없었다. 경찰은 이 잔인한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윤 할머니의 조카며느리인 46살 고숙종을 지목한 뒤 열흘 만에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경찰이 발표한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고 씨는 7월 22일 밤 윤 할머니를 찾아가 집을 옮기는데 돈을 보태달라고 부탁했지만 윤 할머니는 전부 뜯어 가려만 한다고 역정을 냈다는 것. 고씨는 순간적으로 살해할 마음을 먹고, 부엌에 가서 식칼을 들고 마당으로 나가 빨랫줄 두 개를 끊어 가지고 들어오다 쌀 통 위에 있던 쇠망치를 발견한다. 고 씨는 쇠망치가 살해도구로 낫다고 보고 빨랫줄과 쇠망치를 같이 들고 가 윤 할머니를 내려친다. 비명을 듣고 2층에서 가정부 강 양이 내려오다 놀라 다시 올라가자 고 씨는 뒤따라가 망치로 가격하고, 두 사람을 방으로 옮긴 뒤 목을 졸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2층의 방에 숨어있던 수양딸도 찾아내 역시 쇠망치로 내려쳐 살해했다는 게 경찰의 발표였다.

고숙종 구속을 보도한 한국일보


평소 친며느리처럼 사이가 좋았다는 윤 할머니와 고 씨였기에 인면수심 범죄에 모두가 경악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고 씨는 경찰의 고문에 의해 허위로 자백한 것이며 자신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마구 때리는 건 물론이고 옷을 다 벗기고 수갑을 채운 뒤 욕조의 물속에 얼굴을 처박았다고 폭로했다.


재판정에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고 씨를 봤을 때 누구라도 그가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걸 의심하기 어려웠다. 검찰과 경찰은 고 씨가 원래 디스크 증세가 있어 몸이 불편하다고 했지만, 그렇다면 제대로 몸도 못 가누는 사람이 어떻게 세 사람을 쇠망치로 때려죽일 수 있느냐는 더 난감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 씨는 결국 무죄를 선고받는다.  


재판부는 경찰이 받아낸 고 씨의 자백이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집중적으로 강조했다. 특히 빨랫줄과 쇠망치 식칼 등 범행 도구를 놓고 재판부는 몇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먼저 세 명을 살해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 왜 쇠망치나 식칼을 먼저 떠올리지 않고 굳이 뒷마당으로 나가, 빨랫줄을, 그것도 굳이 두 개를 끊어온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리 정신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당에서 다시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쇠망치를 발견하고 이것을 살해도구로 쓸 마음이 있었다면 빨랫줄은 놓고 쇠망치를 들고 갔을 텐데 왜 둘 다 가지고 갔다는 것인지, 이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이 두 질문에 스스로 답한다.  윤 할머니와 가정부 강 양이 최초 발견됐을 때 목에 빨랫줄이 감겨있었고, 수양딸까지 세 사람 모두 쇠망치로 가격 당한 것이 추가로 드러나자, 이 모든 행위를 고 씨가 혼자 한 것으로 설명하려다 보니 무리한 재구성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세 사람을 쇠망치로 때리고 두 사람의 목은 빨랫줄로 조른 것을, 모두 고씨의 동선 안에서 고 씨가 한 행동으로 설명하려다 보니, 이렇게 꿰맞춰진 의아한 자백이 나왔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한마디로 자백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고숙종 무죄 판결의 순간 (서울신문)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하지만 이 판결은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사건을 해결하던 관행에 제동을 건 역사적 판결로 기록되고 있다. 고문이 아니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자백, 그 자백을 그대로 받아들여 검찰은 기소하고 재판부는 유죄로 인정하는 부끄러운 사법 관행에 균열이 가해지는 판결이었다.


당시 대법원 재판부는 이렇게 말한다


“피고인의 자백이 '증거의 왕'의 위치로부터 퇴위된 것도 우리 형사소송법이 제정된 이래 30년이 경과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뚜렷하며 더구나 국제 인권규약 가입 비준을 고려하기에 이른 현시점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판결은 ‘역사적’인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이후 한꺼번에 모든 게 달라진 건 아니다. 이례적이라 할만한 판결로 폐습의 일단이 드러났을 뿐 이후에도 고문과 허위자백과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부끄러운 역사는 계속돼왔다.


수사권 조정 문제로 지금 열심히 다투는 검찰과 경찰이 늘 앞세우는 명분은 국민과 인권이다. 그러나 우리의 검찰 경찰 역사는 국민과 인권을 그렇게 쉽게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입장이 결코 아니라고, 고숙종 사건은 증언하고 있다.


강압과 고문에 의한 범인 만들기는 억울한 죄인을 만드는 것이자, 동시에 진짜 범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윤 할머니와 가정부 수양딸을 잔인하게 살해한 진짜 범인은 고숙종이 고통받는 순간 우리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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