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건 뒤에는 무엇이 있나 - 7>>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 체육교육과를 나오고, ROTC로 장교 복무를 마치고, 서울의 한 여자 중학교 체육교사로 부임한 남자 선생님. 큰 키에 호감을 주는 외모에 자신감과 배려심이 충만한 선생님에게 학생들은 물론 동료 교사들이 어떤 평가와 기대를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1977년 25살 나이로 교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아 대학원에 진학해 계속 스스로를 단련하는 주영형 선생님, 옆에서 바라본 그는 완벽한 교사, 완벽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스펙이고 외모고 간판이었을 뿐, 그의 삶은 겉모습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첫 부임지인 여자 중학교에서 어린 여학생들과 복잡한 이성 관계를 맺었다. 순수한 책임감으로 분투하는 초임 교사가 아니라 마치 작심하고 여학생들을 노리개 삼으려고 교사가 된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참으로 연구 대상이지만, 당시는 1970년대였고 그런 행동이 범죄인지조차 정립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지금의 상식으로 보자면 좋은 조건과 그럴듯한 외모를 가지고 어린 여중생들을 농락한 전형적인 ‘그루밍’ 범죄였지만 당시 엄정한 단죄와 추궁은 없었다. 3년의 근무 끝에 1980년, 다른 학교로 옮기면서 그의 패악은 은폐된다.
이번에 부임한 곳은 서울 마포구의 남자 중학교였다. 여전히 인기 있고 실력 있는 교사로 인정받았지만 아무도 모르게 그의 삶은 점점 구렁텅이로 몰리고 있었다. 도박에 빠져 빚 독촉에 시달리자, 마치 당연하다는 듯 제자들 중에서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공부 잘하고 형편이 넉넉해 보이는 그리고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가 불편한 1학년 이윤상에 주목했다.
윤상이 아버지는 조그만 판매업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와 누나까지 4명의 평범한 가정이었다. 주영형은 얼굴을 아는 윤상이 보다 그의 누나를 유괴하기로 마음먹는다. 주영형 곁에는 여중 근무 시절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여학생 두 명이 있었다. 잔인한 범죄까지 끌려온 17살 이 모양과 고 모양. 주영형은 이 가운데 이 양을 윤상이 누나 학교로 보냈고, 이 양은 윤상이 누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아빠와 너의 아빠가 친구야. 너네 아빠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으니까 우리 집에 같이 가자”
그러나 어색한 연기에 윤상이 누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거절했다. 첫 번째 작전이 보기 좋게 실패하자 주영형은 직접 나서 아예 윤상이를 유괴하기로 결심한다. 윤상이에게 할 얘기가 있다면서 방과 후 학교 밖에서 면담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1980년 11월 13일 오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윤상이를 아지트로 삼은 신길동의 한 아파트로 데려왔다. 아무 의심 없이 따라나선 윤상이는 그제야 철석같이 믿은 선생님이 자신을 납치한 상황임을 알아차렸고, 두려움과 분노와 절망 속에 소리쳤다.
“우리 누나를 유괴하려 한 것도 선생님이었나요....”
주영형은 윤상이를 묶고 입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모포를 덮어 가둬놓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가 다음날 돌아왔다. 그 밤새 윤상이는 숨졌다. 주영형은 이 양과 함께 시신을 경기도 가평의 북한강변에 매장한 뒤, 아직 윤상이가 살아있는 것처럼 두 여 제자를 앞세워 윤상이 부모에게 협박 전화를 걸게 하고 돈 요구를 담은 편지를 쓰게 하고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한 거짓 제보까지 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TV 뉴스에 등장해 빨리 윤상이를 돌려보내 달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절절하게 토해냈다. 상상을 초월한 그의 이중적인 삶은 그렇게 1년가량 이어졌다.
경찰은 주영형이 윤상이를 만난 것은 알았지만 면담 뒤 헤어졌다는 그의 말을 감히 의심하진 못했다. 학벌 좋고 실력 있는 젊은 교사가 제자를 유괴할 리가.... 경찰의 상상력은 더 전진하기 힘들었다. 엘리트라는 타이틀 앞에서 공권력의 날카로움은 알아서 무뎌졌던 것이다.
실은 그의 알리바이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유괴 당일 주영형은 다니던 대학원에 수업이 있었는데, 굳이 대학원에 가는 날 촉박하게 윤상이를 면담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는 대학원 수업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수업 내용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과거 여자 중학교에서의 불순한 행적이 파악되고 노름빚이 떠오르고 나서야, 경찰은 정신 차리고 그를 다시 바라봤다. 화려함에 무심코 흘려버린 것들이 눈을 다시 뜨고 보니 하나하나 죄다 의혹덩어리로 다가왔다.
학교 밖 면담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윤상이에게 다짐받은 사실이 뒤늦게 파악됐고, 유괴 당일 그의 귀가 시간이 평소 대학원을 마치고 올 때와 달랐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데 1년 이상 걸렸다. 유능하고 좋은 선생님이란 세평과 스펙에 막혀 1년을 돌아왔다.
연필 끝에는
지우개가 달려있다
연필이 잘못 쓰면
지우개가 지워주고
누구나 실수는 있는 게지
알고도 틀리게 쓰는
연필처럼 말이야
우리들 마음에도
지우개를 달자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리게
윤상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직접 쓴 지우개라는 동시다. 잔인한 범인 주영형에게 들려주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하고, 간판에 가려 진실을 못 보는 이 사회에 대한 일갈처럼 들리기도 한다. 주영형은 1983년 7월 사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