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커리어 클래스 Nov 07. 2024

샤갈의 그림을 잊고서(좋아서하는여행)

<내게 맞는 일을 하고 싶어> 저자의 배낭여행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사람들이 찾는 명소를 돌아보기로 한다. 가고 싶은 곳들만 다니다 보니 막상 남들이 다니는 여행지는 가지 않았기에 오래전에 여행했던 혹은 가지 못했던 관광지들을 마지막날에 묶어서 간다.

와…. 이럴 수가 사람들이 많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명소=사람들이 아는 곳=사람들이 많은 곳


여행지에서 위험한(?) 행동을 자주 했는데 맛집 검색을 하지 않고 아무 곳이나 들어갔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나를 즐겁게 채워줬다. 맛있어 보여서 들어갔는데 정말 맛있는 곳이었고, 맛있어서 검색해 보면 유명한 맛집이었다. 사람 입맛이 이렇게 비슷하다니까. 그런 행운이 따르는 것에 감사하며 다녔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구글 검색창에 ‘음식이름+ near me ’을 넣어서 검색하면 먹고 싶은 음식을 취급하는 음식점들이 나왔고 그중에서 제일 가깝고 평점 3점 이상인 곳으로 먹으면 되었다. 나 홀로 뚜벅이여서 평점보다 위치가 중요했다. 아마도 여행의 동행이 있었다면 평점 3점대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관광가이드가 추천하는 식당들도 정말 좋았다.-


샤갈의 그림을 잊다

오페라 가르니에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뜨거운 햇살에 지친 나를 위해 오렌지 착즙 주스를 주문한다.

실망스럽게도 컵이 작다! 양이 너무 작잖아. 그런데, 반전.

진짜 착즙이네~ 오렌지 알갱이가 씹힌다!

얼음을 넣지 않아서 양이 적었을 뿐, 순도 100%이다.

한국에서 맛보지 못한 리얼 착즙 주스를 만나다니. 한국의 카페에서는 얼음을 많이 줘서 양이 많아 보이는데 이곳은 순수하게 승부를 보는구나.

술도 아닌 주스 한 잔이 주는 감동에 취해서 오페라 가르니에를 잊어버리고 카페에 앉아버린다.

야외 탁자 위 하늘색 격자무늬 테이블보가 사랑스럽다.  

틈 날 때 읽으려고 가져온 쁘띠 쁘랑스 (어린 왕자 불어책)를 펼쳐 들고 몇 줄 읽는다. 스스로 멋지다고 자뻑하면서 주스를 홀짝 거리는데 사람들이 몰려와서 거리의 작은 기둥을 찍는다. 알고 보니 기둥에 재밌는 그림들이 그려 있다! 이래서 파리를 예술의 도시라고 하는구나. 책 읽다 말고 기둥도 구경하고 멍 때리기를 한다. 주스의 맛에 기둥의 미에 거리가 주는 멋에 반해서 그렇게 앉아서 땀을 식히고 화장실도 갔다 오니 찌는 날씨와 달리 기분이 상큼하다.

파리의 작은 카페가 준 휴식이 만족스럽다. 그런데 어쩌나

오페라 가르니에를 향해 가던 길이었는데 말이지.

따따다 단~(베토벤의 운명과 카톡의 주저 앉아서 통곡하는 이모티콘을 그려보자)

그 건물의 천장에 있는 샤갈의 그림을 보고 싶었는데 예약도 못하고 늦게 도착한 까닭에 들어가지 못한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괜찮아, 주스 한 잔의 휴식을 얻었잖아.

인생에 파리를 오는 날이 오늘만 일까?

언젠가는 볼 날이 있겠지.

7유로의 행복에 잠기다

포르투를 돌아다니다 발견한 와인 앤 북스 Wine&Books Hotels 이름이 독특해서 눈에 와 박힌다. 무작정 들어갔는데 깔끔하고 멋진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호텔 투숙객이 아니어도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단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와인 한잔(7유로)을 마시면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설레면서 다음날 다시 온다. 테이블마다 스탠드가 켜 있고 조명이 예술 작품 같다. 내부 무늬가 주홍, 베이지, 블루, 검정이 오묘하게 어우러져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장실까지 멋스러워서 내부 사진을 찍으니 현대 미술관에 온 느낌이다. 호텔의 라운지인 까닭에 일반 카페의 고급진 분위기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런 공간을 발견하다니, 칭.찬.해.

와인을 잘 마시진 않지만 이런 분위기에는 Dry 한 맛이지. 원목탁자 위, 고즈넉한 스탠드 불빛 아래에 Red wine과 바삭한 안주(무료?!)를 가지런히 놓고 어린 왕자 책과 수첩을 꺼낸다. 와인 앤 북스 호텔 Wine&Books Hotels 상호와 딱 맞는 이미지다.

아쉬운 건 어린 왕자가 포르투갈어가 아니라는 것 빼고는 완벽하다.

와인을 마시면서 책을 읽고 글도 긁적긁적 인다. 직원에게 상호명이 <와인 앤 북스 Wine&Books>여서 책을 읽으려고 가져왔다고 하니까 반가운 표정과 함께 엄지를 들어 보인다. 여유를 즐기며 쉬어가는 나를 칭찬했다. 잘했다. 잘했어. 이렇게 쉬어가는 거야. 있고 싶은 곳에 있는 거야.


파리의 재크리나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내고 전화도 시도했지만 부재중인지 전화는 응답기로 연결되었다. 파리를 가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곳에 집중하기로 한다. 앞으로의 여행 일정도 확인해야 해서 책 한 권만 오롯이 읽는 여유를 가질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무계획 즉흥 여행인지라 어쩔 수 없다. - 좋은 공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건에 감사했다. 두 시간이 쏜살 같이 지나가고

투어에서 만난 우림님, 민진 님과 약속되어 있어서 나와야 했지만, 감탄을 자아내는 공간과 시간이 준 여운은 길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쉬어가면서 즐기면서 지내야겠다고 생각한다.


11월, 귀국하고 급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시차적응이라는 걸 느낄 새가 없이 며칠이 흐른다. 긴장이 풀리니 뒤늦게 시차에 적응하느라 눈꺼풀이 말을 듣지 않는다. 오후까지 잠을 자고 저녁에는 잠이 안 와서 멀뚱멀뚱 영화를 본다. 가족들이 박수를 친다. 엄마가 드디어 쉬는 거냐며 좋아한다.


'여러분이 놀 때 제가 일을 하니까 마음이 불편하셨군요. 이제는 마음 놓고 쉽니다. '


뭐가 그렇게 겁이 났는지 일이 없을 때는 공부하고 일할 때는 120% 이상의 노력을 했던 것인지.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까지 활동할 수 있었다는 건 잘 안다. 그래도, 이제는 한 템포 쉬며 완성도를 대충 80%로 맞추고  살아야겠다. 놀며 쉬며 일해야 오래도록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자문자답해본다.

나의 기준으로 80%면 객관적 기준으로는 100%이니 그 정도만 합시다.

네?!

예….

체력이 예전 같지 않으니까 80% 이든 100%로 타협하자고요.

작가의 이전글 내가 좋아서 하는 여행 1_런던마켓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