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8시다.
이제 약 먹을 시간이다.
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다.
내 앞에는 아내가 있다.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함께 내시경을 하기 때문이다.
괜히 든든하다.
오히려, 나만 내시경을 하고
"내시경 잘 끝나고 나면 내가 내일
맛있는거 해줄게."라고
아내가 말하는 것보다 더 든든하다.
이건 무슨 심보일까?
힘든 시기를 같이 겪은 사람들 사이에는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고, 그 사이는 끈끈하다.
대체로 가족이 그러하다.
신병훈련소에 입대를 하게 되면,
그 안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교관과 훈련병 뿐이다.
그래서, 훈련병 사이에는 끈끈한
무언가가 생긴다.
훈련병 끼리는
부모의 지위나 재산 수준, 학벌을 비롯해
그 어느 것으로도 차별받지 않는다.
모두가 지옥같은 훈련을 예외없이
겪어야 하는 동지일 뿐이다.
속임수도 없고, 예외도 없다.
정직한 세상이다.
내 마음이 너무 힘들 땐,
함께 고생하고 있는 동지를 떠올리는 것이
든든한 위로가 되어줄지 모른다.
어쨌거나, 아내와 나는
약을 함께 먹기 시작했다.
맥주를 즐겨 먹던 나는
많은 양의 물을 먹는 것이
크게 부담되지는 않았는데,
술을 먹지 않는 아내는
부담이 되었나보다.
난 속으로, 약간의 우월감을 느꼈다.
이게 뭐라고.
이건 또 무슨 심보인가?
난 맥주킬러 답게 아내 보란듯이 벌컥벌컥
약과 물을 마셨다.
그렇게 시간 간격을 두고 두 차례에 걸쳐
2리터에 가까운 약과 물을 먹고
이제 신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있었을까?
아내는 화장실을 한 번 다녀왔다.
그리고 평소에 일찍 잠자리에 드는 아내는
그날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한시간이 지나도 배가 부글거리기만 할뿐,
도저히 신호가 오지 않았다.
아내는 이미 잠이 들었고,
두 시간 정도 되자 견딜수 없는 신호가 와서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나도 아내처럼 잠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게 왠걸.
30분에서 1시간마다 신호가 와서
화장실을 계속 들락거렸다.
더 이상 신호가 오지 않았을 때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반이었다.
가뜩이나 잠드는데 예민한 나는
잠이 들지 않아 다시 뒤척 뒤척 했다.
6시 일어나서 약을 다시 먹으라는데,
그럼 난 도대체 몇 시간을 자라는거야.
난 결국, 2시간도 채 못 자고,
6시에 일어나 마지막 약을 먹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것은
아내는 잠들기 전 화장실에 다녀오고
내리 숙면을 취한 후, 6시에 일어나서
화장실에서 모든 것을 비워냈다.
난 그 새벽 많이 외로웠다.
함께 약 먹는 이가 있어서 든든했고,
내가 물을 더 잘 먹어서 뿌듯했는데,
아내는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날 두고
7시간 이상을 내리 숙면을 취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이 이야기를 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대장 내시경 약을 먹고, 7시간 넘게
숙면을 취하고, 화장실을 단 한 번도 가지 않고,
새벽에 모든 걸 비워내는 게 가능한가?
다들 나한테 거짓말이라고 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전해들었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약을 먹고, 배가 부글 거리고,
곧 속옷에 실례를 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그 느낌이 오지 않고
7시간을 숙면을 취한다고?
말도 안된다.
근데, 난 7시간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여느때처럼 아내는 숙면을 취했다.
타인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때,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손사레치고 싶을 때,
난 이때의 일을 떠올린다.
대장내시경 약을 먹고,
7시간 숙면을 취하면서
내리 잠을 잔 아내를 말이다.
내 상식으로, 내 경험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일이 세상에는 넘쳐난다.
하지만, 상대방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서로 다른 2개의 진실을 가지고,
1개로 만들려다보니 우린 서로 다투고,
미워하고, 상처주는건 아닐까?
이해는 할 필요 없다.
이해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인식만
열어둔다면, 지금보다 훨씬 덜 다투고,
덜 미워하고, 덜 상처주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대장 내시경 약을 먹고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밤새 잠 못자면서,
숙면하는 아내를 보며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