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내시경만 같아도 #5

가짜 포만감

by 영순
저녁 7시다.




3시부터 시작된 금식이

고작 4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니,

왜 이렇게 시간이 더디게 가는걸까?




힘든 순간 그 자체에 모든 생각을 쏟으면
언제나 시간은 느리게 간다.




뒤를 돌아보면

내가 잃어버린 것은 음식이다.


앞을 내다보면

금식은 물론, 억지로 먹어야 하는 약이 있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잠을 잃게 되어 있다.


나는 그 중간에 갇혀있다.

이미 잃어버렸고, 앞으로 잃어버릴 거고,

또, 고통받을 그 중간지점에 말이다.




삶이 평화로울 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삶이 힘들 때는, 모든 것이 내 삶과 비슷한 거 같아서

실제로 느껴야 할 힘듦이나 고통보다

더 큰 것을 끌어안아 느끼곤 한다.




3시 금식이 시작되고 실제로 허기지지도 않은데,

허기를 채우려고 먹었던 물이

7시가 되자 배가 제법 불렀다.




이제 8시면 본격적으로 약을 먹어야 한다.

아뿔사...



약을 먹을때 다량의 물을 먹어야 하는데,

난 이미 물배가 차서 배가 부른데?


이따가 약과 물을 먹을 때 더 힘들거 아닌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어차피 넘어가지 않는 물을 억지로 먹어야 하는데,

난 찾아오지도 않은 허기를 채우려고

물을 양껏 먹었으니...




인간이 이렇게 어리석다.




서너시간 뒤에 찾아올 일을 미리 생각도 못하고,

두려움, 답답함, 금지에 얽힌 생각과 감정 때문에

생각없이 물을 양껏 마시다니...




그 걱정이 온통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데,

문득 기분이 좋아졌다.


배가 부른 것이었다.




허기가 지지도 않은데

허기를 채우려고 먹었던 물이,

포만감을 준 것이다.


가짜 포만감이었지만, 내가 채우려고 하는 것을

채운 느낌이었다.


이제, 내가 잃었던 것을 다시 채운 느낌이라

불안감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곧 다가올 고난(?)은 생각치도 못하고 둔

어리석은 수였으면서도 말이다.




삶에는 크고 작은 힘든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속에서 움직이는 나는 그것들을 피하려고
이런 저런 행동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다가올 고통을
더 크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금식에,

오지도 않은 허기를 채우려 물을 먹고,

약과 함께 먹을 엄청난 양의 물 생각에 다시 걱정하고,

순간 찾아온 가짜 포만감에 잠깐 기분 좋아지고...




나이를 많이 먹었는데도 이런 건,


철이 덜 들었기 때문일까?


내가 원래 모자란 놈이라서 그런걸까?


인간이 원래 그런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이제 진짜 8시다.


이제 시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