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햇살통통의 일상 그리기

#13. 함께 있다는 이름의 하루

by 햇살통통

— 누군가의 기억을 붙들고, 누군가의 통증을 견디며, 조용히 숨을 고르는 시간 속에서


마흔에 늦둥이로 낳은 딸이 주말을 맞아 부산으로 내려왔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을 보러 온 것이다.


딸이 외할머니께 인사를 드리자, 엄마는 잠시 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신 듯 웃으셨다. 기억 속에는 여전히 조그만 아이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새 다 큰 처녀가 되어 서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똑똑하고 귀여웠는데….”


엄마는 연신 감탄을 하시다가, 문득 이런 말씀을 덧붙이신다.


“내가 너희 엄마 내려와서 간병하라고 하지 않았다. 나 미워하지 마라.”


그리고는 연이어 묻는다.

“지금 학교 다니나?

대학교냐?

고등학교냐?”

딸이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자, 엄마는 두 손을 모으고는 “세상에나…” 하신다. 예쁘게, 참 잘 컸다고. 어렸을 때 할머니가 많이 돌보아 주었는데 이렇게 곱게 자라 주어 고맙다고 하신다.


기억 저편에 아스라이 살아 있는 작은 끄나풀이라도 붙잡으려 애쓰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 또한 언젠가는 저 자리에 서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딸의 눈빛도 잠시 머물렀다. 말없이 엄마 곁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딸의 얼굴에는 놀람과 애틋함, 그리고 조심스러운 이해가 함께 묻어 있었다. 할머니의 질문 하나하나에 웃으며 대답하면서도,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가족의 자리를 마음속에 새기고 있는 듯했다.


요즘 동생은 임파선으로 전이된 암세포 때문에 매일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다. 엄마는 식사를 거르려 하셔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쓰게 한다.


부산에 내려온 지도 벌써 삼 년째다. 이제는 스스로를 ‘부산 사람’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오시는 오전 시간에는 사진 수업을 듣는다. 예전에 다니던 곳에서는 일정 시기가 지나면 더 이상 수강이 어렵다고 해서, 미리 다른 곳에 수강 신청을 더 했다. 덕분에 하루가 제법 바쁘게 흘러간다.


엄마가 잠든 새벽에는 수영을 하러 가고, 미사를 봉헌한 뒤 수업이 있는 날이면 수업을 듣는다. 시장을 봐 집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다시 간병 모드다. 동생이 병원에서 돌아오기 전에 방을 정리하고 먹을 것을 챙겨 놓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 있다.


그날은 딸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이름에 ‘두바이’가 들어간 빵과 피자 같은 음식을 한가득 사 가지고 왔다. 남동생에게 맛을 보라며 내밀자, 동생은 잠시 음식 봉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이런 건 처음 먹어본다.”


조심스레 한 입 베어 문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괜찮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걸 먹는구나.”


짧은 말이었지만, 그 얼굴에는 오랜만에 치료와 통증을 잠시 내려놓은 듯한 편안함이 묻어 있었다.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한 조각을 더 집어 드는 모습에, 그 웃음이 집 안을 환하게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둘 다 큰 특이 사항 없이 지내고 있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마음 한편에는 서울에 있는 가족들에게 미안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누군가는 아픈 사람 곁에 함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도 그렇게, 함께 있다는 이름의 하루를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