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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Oct 14. 2024

행복한 광대, 유리 니쿨린

50년 서커스 인생 - 행복은 아주 작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러시아 교환학생 시절, 우리는 수업 시간에 종종 소련 코미디 영화(슈릭의 모험 시리즈)를 봤다.

내용을 다 알아듣진 못해도 몸개그나 행동들이 그저 익살스러웠기에 러시아어 입문자인 우리에겐 제격인 교재였다. 커다란 안경을 쓴 주인공은 물론, 그와 부딪치는 악당 삼인방은 매번 박장대소 포인트를 제공했다. 다른 영화에서도 이들이 똑같은 이름으로 또 등장하길래, '소련 영화는 원래 이런가?' 의아하기도 했다. 같은 감독의 의도된 연출임을 그땐 몰랐으니.


영화 <코카서스의 포로, 혹은 슈릭의 새로운 모험> 중에서. 가장 오른쪽이 유리 니쿨린(출처: culture.ru)


특별히 세 명의 악당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한 유리 니쿨린이 지난 모스크바 기행 이후로 궁금해졌다.

러시아인들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그의 이름이 붙은 서커스장은 좌석이 없어서 못 가볼 정도니 말이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일까?


스스로를 '광대'라 칭하면서 연기면 연기, 재주면 재주, 다재다능한 사람으로서

대중을 행복하게 만드는 소박한 꿈을 품고 산 유리 니쿨린의 인생과 그의 업적을 지금부터 들여다 본다.




행복을 찾아 떠난 광대의 여정


소련의 전설적 희극인 유리 니쿨린(Юрий Никулин, 1921-1997)은 1921년 스몰렌스크주 데미도프에서 태어났다. 피는 못 속인다 했던가? 그의 부모는 현지 드라마 극장 아티스트 출신이었다. 소위 예술가 집안이다.

이들 가족은 1925년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겨 더 넓은 무대에서 생계를 이어갔다.


어린 유리 니쿨린과 그의 어머니 리디야 / 군에 입대한 니쿨린(출처: 1000iodinsovet.ru, www.1tv.ru)


유리 니쿨린은 학교에서 연극 서클 활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졸업 직후 그는 전혀 다른 삶을 만난다. 1939년 18세에 군으로 징집되어 소련-핀란드 전쟁(1939-1940), 대조국 전쟁(1941-1945)에 연달아 참전한 것이다. 부상은 좀 입었어도 전투 결과는 승리였다. 참전의 업적으로 유리 니쿨린은 전쟁 기간 중에 국가로부터 '용맹' 메달과 '레난그라드 방어' 메달, '독일에 대항한 승리' 메달을 받았다.


전방에서- 좌측이 유리 니쿨린(출처: dzen.ru)


남들은 한번도 힘든 전쟁을 두 번이나 겪은 그에게 당시 경험은 향후 큰 자양분이 된다.

유리 니쿨린이 지닌 삶에 대한 끝없는 낙관과 소박한 행복의 개념 그작품과 활동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저는 까다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행복하기 위해 아주 작은 것만이 필요하죠.
.... 저에겐 저만의 행복 개념이 있답니다. 우리 각자가 타인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이 땅의 모든 이가 행복해질 겁니다.
- 유리 니쿨린


전쟁 후 1946년 제대한 그는 비로소 자신의 꿈을 실현해 나갔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유리 니쿨린은 세계 최초 영화 전문학교인 브기크(ВГИК 국립영화대학)와 연극 전문학교 기치스(ГИТИС 국립연극대학)에 입학하려 했으나, 번번이 연기력 부족 이유로 낙방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모스크바 서커스 부속 광대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곡예 연기에 전념.


유리 니쿨린과 미하일 슈이딘 광대 콤비(출처: dzen.ru)


그렇게 유리 니쿨린은 광대의 길에 입성했다!

당시 모스크바 국립 서커스단 최고 인기 광대이자 스승이던 카란다시 조수 활동을 시작으로, 파트너 미하일 슈이딘과 콤비로 호흡을 맞추며 대중에게 큰 호응과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가정도 이루었다. 니쿨린은 승마 스포츠에 종사하던 타티야나를 만나 1950년 결혼했고, 이후에 아내도 함께 서커스에서 공연을 했다.


유리 니쿨린과 그의 아내 타티야나 니쿨리나(출처: dzen.ru)


유리 니쿨린은 겉으론 완전평정을 유지하면서 무심한듯 툭 던지는 유머 감각이 탁월했다. 광대 장르에서 가장 어렵기로 소문난 서정적이고도 낭만적인 재담에 능했다. 그렇게 광대로 익힌 재주들은 유리 니쿨린 고유의 레퍼토리를 만들어내기 충분했다.


"나는 광대입니다" 유리 니쿨린(출처: culture.ru)


다른 장르에서도 빛을 발했다.

입시에서는 고배를 마셨던 영화와 연기였는데, 재능을 인정받아 배우로도 활약했다. 1960년대부터 40여 이상의 영화에 출연하여 코미디와 드라마 장르를 넘나들며 연기했다. 오랜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영화 <개 바르보스와 비범한 달리기> 중 왼쪽부터 차례대로 니쿨린, 모르구노프, 비친(출처: culture.ru)


특별히 레오니드 가이다이 영화감독 작품을 통해 유리 니쿨린은 이름을 제대로 알렸다. 소설 기반으로 탄생레오니드 감독의 <개 바르보스와 비범한 달리기 Пёс Барбос и необычный кросс(1961)>에서 전설의 코믹 트리오탄생했다. 명의 캐릭터 트루스(게오르기 비친), 발베스(유리 니쿨린), 비발리(예브게니 모르구노프)각각 '겁쟁이', '얼간이', '낡은'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는데, 이들은 레오니드 감의 다른 작품 <작전명 'Y', 그리고 슈릭의 또다른 모험 Операция «Ы» и другие приключения Шурика(1965)>과 <코카서스의 포로, 혹은 슈릭의 새로운 모험 Кавказская пленница, или Новые приключения Шурика(1967)> 등에서 다시 동일하게 등장해 삼인방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들의 인기는 만화 영화 캐릭터로 탄생하거나 동상이 세워지는 등 대단했다.


만화 영화 <브레멘 음악대>의 도적 삼인방(가장 왼편이 니쿨린) / 이르쿠츠크에 있는 삼인방 동상(가장 오른편이 니쿨린)(출처: ru.wikippedia.org)


외에도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 Андрей Рублёв(1966)> 수도사 파트리케이 역할,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 Они сражались за Родину(1975)>에서 병사 네크라소프 역할 다른 캐릭터를 선보이면서 배우로 인정받았다. 그밖에그는 1993년부터 TV 프로그램 <클럽 하얀 앵무새 клуб Белый попугай>를 진행했는데, 실제로 앵무새와 함께 게스트들과 일화를 나누며 대체 불가능한 진행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TV 쇼 <클럽 하얀 앵무새>를 진행한 유리 니쿨린(출처: liveinternet.ru)


영화 출연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여러 활동 가운데 유리 니쿨린은 광대로서 역할에 더 충실했고 애정을 쏟았다.

그는 오랜 서커스를 사랑했다. 1982년부터는 츠베트노이 가로수길에 있는 모스크바 서커스단을 이끄는 총감독을 맡았다. 그는 자기만의 재미난 서커스 레퍼토리를 기획해 오랜 시간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노력 덕분에 서커스 건물도 현대식으로 신축되어 1989년 9월 문을 열었다.


1959년도 당시 츠베트노이 가로수길의 철거 전 구서커스 건물 / 신축한 현대식 건물과 넘치는 관람객들(출처: ru.wikipedia.org, gazeta.ru)


그가 서커스에서 일한 시간을 따지면 거의 50년이다.

유리 니쿨린은 소련 인민 예술가, 사회주의 노동 영웅의 칭호를 부여받았고, 공로 훈장을 수훈하는 등 국가 차원에서도 그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츠베트노이 가로수길의 모스크바 서커스를 유리 니쿨린의 이름으로 명명한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니쿨린 서커스 공연(출처: ru.wikipedia.org)


평생 광대로 산 유리 니쿨린은 심장 수술 후 합병증으로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묘지에 있는 그의 동상을 보면 외로워 보이기도, 뭔가 아쉬움이 남는 느낌도 든다. 유리 니쿨린을 기억하는 많은 대중은 지금도 그를 기리며 이곳을 찾는다.


노보데비치 묘지에 있는 유리 니쿨린의 묘(출처: ru.wikipedia.org)


그렇다면 그가 이끌던 니쿨린 서커스는 어찌 되었을까?

서커스 관리자로 일하던 아들 막심 니쿨린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곳 총감독으로 선출되어 운영중이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유리 니쿨린 서커스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 공연이 연일 이어진다. 과연 한 사람이라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거라는 유리 니쿨린의 소신이 잘 지켜지고 있는 듯하다.


현재 서커스의 수장인 유리 니쿨린의 아들 막심 니쿨린(출처: udmcircus.ru)


유리 니쿨린의 애정이 담긴 모스크바 서커스


츠베트노이 가로수길에 있는 니쿨린 모스크바 서커스 건물(출처: www.culture.ru)


모스크바 중심가에서 살짝 북쪽에 위치한 츠베트노이 가로수길 중간에 위치한다. 현지에서도 대단한 인기라,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미리 표를 구하지 않으면 관람이 쉽지 않을 정도다. 보통 서커스 레퍼토리는 시즌제로 긴 텀을 두고 공연이 되는데, 시즌마다 독특한 콘셉트를 선보인다. 남녀노소 모두가 광대와 동물들의 공연을 즐긴다. 내용은 직관적으로 알기 쉽게, 또 광대들의 만담과 관객 참여가 함께 이루어지는 서사적 서커스의 특징을 잘 살렸다. 둥그렇게 생긴 홀은 약 2천 명을 수용하며, 돔 높이는 25미터로 높아 다채로운 공연 연출이 가능하다. 몇 달 전 직접 관람했는데, 지루하지 않은 기획이 놀라웠다. 역시 러시아답다.


지난 6월 니쿨린 서커스 마트료시카 콘셉트의 화려한 오프닝 / 곰이 등장한 무대(출처: 저자 제공)


19세기의 살라몬스키 서커스 건물(출처: pastvu.com)


이곳 모스크바 서커스는 1880년 예술가 알버트 살라몬스키에 의해 작게 문을 연 것으로 시작된다. 혁명 이후에는 서커스의 성격이 다소 변하기도 했지만, 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고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역할도 했다. 훌륭한 감독들 참여 아래 1946년에는 광대 스튜디오가 오픈했는데, 바로 이곳에 유리 니쿨린이 들어와서 광대 경력을 쌓게 된 것이다. 차츰 전문적 교육 및 훈련과 화려한 공연을 통해 소련의 서커스는 갈수록 번영했고, 순회 공연으로 세계적 명성도 얻었다. 광대만이 아니라 호랑이, 사자, 곰, 원숭이, 코끼리 등 동물이 등장하는 공연도 선보였다. 하지만 1980년대 초 모스크바 서커스는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었다. 유리 니쿨린이 총감독으로 임명된 후 서커스 신축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새 건물은 1989년에서야 지어졌으니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니쿨린 서커스 무대에서 등장한 말들(출처: russiainphoto.ru)


소련 붕괴 후에 닥친 사회적 혼란은 이곳 서커스까지 미쳤다. 당시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유리 니쿨린이 아들 막심을 불러와 서커스의 회계와 서류 업무를 돕도록 했다. 이후 막심도 공식 직책을 받아 서커스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유리 니쿨린 사망 후에는 서커스단 수장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그의 노력 덕분에 현재 니쿨린 모스크바 서커스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몇 안 되는 정통 서커스로 남게 되었다. 켓 매진 행렬을 보면 제대로 체감할 수 있다.


니쿨린 서커스 앞 유리 니쿨린 동상. 사진 찍으려는 이들로 북적(출처: 저자 제공)


2000년에는 클래식카에 오르는 형상의 유리 니쿨린 동상이 서커스 정문에 세워졌다. 수많은 이들이 공연 관람하기 전 이곳에서 인증샷을 남기려고 난리다. 줄을 서는 것도 치열하다. 한편, 국민 예술가 주랍 체레첼리는 길 건너 츠베트노이 가로수길 중앙에 광대 분수를 만들어 유리 니쿨린에게 헌정했다.


서커스 건너편 주랍 체레첼리가 만든 광대 분수(출처: rasfokus.ru)
< 츠베트노이 가로수길의 니쿨린 모스크바 서커스 >
- 주소 : Цветной бульвар, 13(츠베트노이 가로수길)
- 찾아가기 : 메트로 9호선 Цветной бульвар(츠베트노이 불바르)역 바로 앞




이처럼 유리 니쿨린이 보여준 광대의 삶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많은 러시아인을 웃게 만들었고 소박한 행복을 알도록 했다.


영화에서나 서커스장에서나 한결같았던 그의 진심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행복, 뭐 별거 있어요?
그저 이렇게 웃는 거죠!


우리도 그렇게 웃자.

그리고 행복하자.



* 커버 사진 출처: kulturologi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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