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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May 26. 2020

타이밍 잘 만난 조연

노력하는 조연에게는 좋은 타이밍이 반드시 온다

문득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지금의 나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사람을 잘 만났고 타이밍이 좋았던 덕분에 여기까지 왔을 뿐.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한결같이 내가 '주'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늘 주 옆 조연으로, 주인공이 되려고 무던히 애쓰던 그런 모습이었다.

너무 수줍어서, 말수가 적어서, 실력이 부족해서, 주 깜냥은 아니란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내게 신기할 정도로 주이 된 것처럼 으쓱하게 해준 사건들이 몇 떠오른다.



유치원 다닐 때,

잘 기억나는 건 없지만 한 가지 또렷한 스토리가 있다.

무슨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나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이 선생님 반주에 노래 연습할 때마다 항상 옆에 앉아 흥얼거리곤 했었다.


그러다 공연이 급박해 노래하기로 한 어떤 친구가 못 나오게 되자,

선생님은 함께 연습 자리에 있던 나를 기억해 못 나온 친구 파트에 나를 참여시켰다.

그냥 옆 자리에서 노래만 따라불렀을 뿐인데, 그렇게 조연이었던 난 무대에 올랐다.



중학교 3학년,

외고를 가고 싶었지만 떨어질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고민만 하던 그때 친구 따라서 교무실에 담임 선생님께 갔다가

친구가 외고 원서 부탁하기에 나도 그 자리에서 원서를 넣겠다고 했다.


마침 원서 신청 마지막 날이었던지라,

아마 그 날 말씀드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사랑 '러시아' 전공은 꿈도 못 꿨을 거다.

교무실 같이 간 친구 덕분에 나 조연도 덕을 봤다.

 


대학교 4학년,

글로벌 공기업, 거기 뭐하는 덴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공은 살릴 수 있는 곳이라 하니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내 실력은 턱없이 부족해 자신이 없었다.

친구와 선배가 원서를 낸다기에 나도 올해는 '시험삼아 넣어보자' 지원했다.


원어민 수준의 어학 실력에 각종 이력이 가득한 친구와 선배들,

심지어 면접에 같이 들어가서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떨어지겠구나' 했지만 그들이 떨어지고 내가 붙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갔다가 조연인 나만 강남에 남아 많은 경험을 쌓았다.



자발적 퇴사 이후,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에겐 어떤 타이틀이 없으면 마치 내 정체성도 없어지는 것 같으니 말이다.


조연의 뒤안길을 거닐며 글자나 좀 끄적이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시간으로 러시아 전문 팟캐스트에 참여하게 됐고,

나도 마침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왔는데 여행책 집필을 계획하는 공저자를 만나게 됐다. 그리고 '작가'라는 타이틀이 생겼다.

이런 기막힌 타이밍은 무엇이란 말인가!

주변에서 도와주신 덕분에 조연인 나는 또 이렇게 얻어 타고 간다.




사람일 참 알 수가 없다.

조연인 덕분에 너무나 감사한 일들이 많았.


그런데 요즘은 가끔 이제 내가 주이 된 것처럼 착각하며 산다.

그러다 문득 실망스러운 결과물에 스스로 괴로워질 때가 있다. 최근 그 횟수가 많아졌다.


그런 실망감이 왜 생기는 건가?

내가 타이밍을 잘 만난 조연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교만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나에게 절묘한 타이밍들이 그냥 왔겠는가?

평소 묵묵히 한 자리에서 노력하며 준비해온 덕분에 선물 같이 찾아온 것이다. 그냥 이루어지는 건 없다.


이 된 듯한 착각 때문에 노력 없이 빛만 보려 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한다.

나에게는 역시 주보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행복한 조연이 더 어울린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 낮은 마음, 감사한 마음 잊지 않고 겸손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런 조연에게는 언젠가 두근두근 멋진 타이밍이 다시 찾아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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