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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Aug 24. 2020

발 묶인 노마드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다가

2020년, 마음껏 떠나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여행작가'라는 타이틀을 가고 지낸지 3년차,

코로나19 특수 상황이 아니었던 2018년에도, 2019년에도,

부끄럽지만 당장 발목을 잡고 있는 일들에 붙들려,

현실적인 이유를 빌미로 떠나지 못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었던 그 시절,

실컷 여행하지 못했스스로 묶여있었나 아쉽기만 하다.

물론 프리랜서니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믿는 구석'에 항상 의지하며,

한 푼 더 벌자고 고객과 주변 분들의 업무 의뢰에 정성 쏟다가 시간만 보낸 경우가 더 많았다.


생각해 보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노마드의 마음

옛날부터 나에게 내재돼 있었던 것 같다. 이런걸 역마살이라고 하나.




애 처음 러시아로 떠났을 때부터였을까, 

어디를 가나 '그저 잠시 머무른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스물 둘,

모스크바 교환학생을 떠나 처음 러시아 땅을 밟던 그 시절,

기숙사에 짐을 풀 때부터 나는 1년 간 지낼 내 방에서조차 편하게 짐을 풀고 정리하지 못했다.

가져온 옷가지도 그대로 비닐 팩에 넣어진 채로 옷장 바로 문앞에 옮겨놓았을 뿐.

내게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왠지 금방 떠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환학생 시절 기숙사 내 방


첫 입사한 후에도,

열심히 일하면서 나름대로 정착해서 버틴 기간이 6년 반이었다.

입사 1~2년차 퇴사 욕구가 샘솟을 때, 이곳을 언젠가는 그만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닐 때도 있었지만, 잘 참고 '언젠가 떠날 사람'처럼 다녔다.

내 책상은 늘 깨끗했고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 사무용품도 필요한 것만 들여놓았다.

'어차피 그만둘 건데, 투자해서 무엇 하나'

그 마음 때문에 재테크도 맘먹고 제대로 하지 않았다.


여행할 때조차,

여행 일정은 늘 즉흥적이었다. 여행작가가 되기 전에는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여행을 좋아했다.

여행길을 나설 때는 언제든 편하게 떠날 수 있도록 작은 캐리어를 고집한다.

옛날부터 많은 짐으로 몸살을 앓았었다. 여행을 가면 어차피 또 어딘가로 이동하며 다닐 텐데,

짐이 무거우면 기동성이 떨어지니 간편한 게 좋다. 물론 짐을 적게 가져가면 불편한 점이 더 많다.

하지만 그런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더 집중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세(?)


그렇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노마드의 삶을 살아오다가,

2020년 팬데믹으로 인해 발이 묶인 상황에 맞닥뜨렸다.

떠나기는커녕 지금은 오히려 정착해 나와 가족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야 할 때가 됐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내가 언제든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집에서 우리 가족이 나의 안전을 기도하고 지지해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 동안 너무 당연하게 여기며 떠나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지금은 당분간, 아니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발 묶인 노마드는 당장은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여

잠시나마 정착하고 못다한 보은을 하면서,

언젠가 열리게 될 다음 인생의 막을 새롭게 준비하고자 한다.

마음만 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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