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맨으로 살아가는 가짜 인생들

by 이영선

정동극장에서 공연되는 창작 뮤지컬 '쇼맨'을 보러 갔다. 사전에 공연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아보지도 않았고 뮤지컬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 망설였지만, 화창한 일요일 봄나들이를 극장에서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았다. 무대라는 공간은 비어 있어도 나에겐 무조건 설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해 별다른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창작 뮤지컬의 수준이 상당하다고 느꼈다. 음악도 너무 좋았고 대사, 연기, 세트, 무대 연출 등 모든 것에 상당히 공을 들인 양질의 작품이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도 각 사람마다 그 시기가 다르고, 죽기 전까지 자기가 누구인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은 채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정체성의 위기를 아주 오래전 20대 중후반쯤에 경험했다. 대다수는 5, 60대가 되어서 은퇴와 노화 등을 겪으면서 그제야 그런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대부분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샐러리맨으로서 인생의 방황기가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그때가 되어서야 각종 사회적 굴레에서 홀가분해져서 오로지 자신으로 덩그러니 남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뮤지컬의 스토리를 보면 나는 이미 오래전 경험했던 고민들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인상적으로 다가오진 않지만 지금 한참 정체성의 위기를 맞아 '나'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강한 인상을 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관객들 중 일부는 아주 감동을 받은 듯이 눈가를 손으로 훔치기도 했다.


주인공 네뷸라는 별 볼 일 없는 배우였다가 한 나라의 독재자 대역으로 발탁되어 그의 인생을 자신의 것처럼 살아간다. 그리고 한국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처럼 주인공은 자신을 보고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 대역과 진짜를 혼동하는 삶을 살게 된다. 심지어는 극 중 잠깐 등장하는 실재 독재자 앞에서 그가 가짜인 줄 알고 그에게 오히려 독재자의 연기를 가르치려 하다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이후 정권이 무너지고 부역자로서 옥살이를 하게 되면서 그의 정체성은 더 큰 혼란을 겪게 된다. 그는 자신이 독재자의 껍데기를 입고 살았단 걸 싫어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소중했던 그 삶을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한 채, 독재자의 흉내를 내는 코미디 배우로 살기도 하고, 노년이 다 되어서도 원숭이의 탈을 쓰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채 유원지에서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마트에서 대체근무자로 일을 하면서도 프로 사진가 인척 거짓말을 하는 수아를 유원지에서 알게 되고, 그에게 자신의 인물사진을 의뢰한다. 극은 주인공 네뷸라가 가짜 사진사 수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진전이 된다. 네뷸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수아가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수아는 여러 가지 사진으로 네뷸라의 모습을 느낀 대로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가 아니지만 그 모습 모두 네뷸라에 대한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뮤지컬은 여러 가지의 가짜와 거짓말로 살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예시로 보는 이들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극의 마지막까지 수아가 네뷸라의 사진을 어떻게 찍었을까 궁금했는데, 극에 등장한 사진들이 흥미로웠다.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작품 속에 담긴 만든 이의 모습과 생각을 적극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작품도 교묘히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작품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가장 근접한 정보를 알 수 있다. 작품의 결과물은 모두 그것을 만든 이의 생각과 관점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뮤지컬을 보고 나서 내가 나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생각을 해보았다. 뮤지컬은 사실 약간 길고 지루한 감이 있었지만, 나로서는 재미있는 영감을 얻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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