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이 고통을 수반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나는 창작이 고통이었던 적이 많이 없다. 창작은 즐겁고 뜬금없는 영감을 실현시키는 과정이었다. 창작이 노력과 긴 기다림의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내 인생에 자연스럽게 그런 시간과 공간의 여유가 적절히 섞여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근래 들어서는 나에게도 창작이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특히 코로나 이후의 삶에서는 뭔가 인생에 변혁이 일어난 것처럼 느꼈다. 같은 물리적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전혀 다른 낯섦을 경험한다고나 할까? 사회적으로 놓인 내가 달라 보이고, 주변의 관계가 변하고, 세상을 보는 나의 관점도 달라졌다.
몇 년간 풀리지 않는 창작의 숙제들 때문에 나도 몇 년간 창작의 고통이라는 것을 겪었다. 온갖 회의와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예술가의 삶을 지속하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최근 창작과정의 고비를 몇 차례 넘기면서 더욱 친해진 오래된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와의 대화가 어려운 과정 속에서 정말 많은 힘이 되었다. 친구로 인해서 나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알게 되고, 나에 대해 더 알게 되고, 나의 작품이 가진 성격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강해 보이는 사람들 옆에는 진정한 친구가 몇 명 있다고 들었다. 애플에서 일했던 직원이 후에 한 강연에서 말하길 스티브 잡스에게도 힘들 때 늘 자기편이 되어 주었던 몇 명의 친구가 있었다고 들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에 있는 친구, 내게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복 받은 일이다. 이 친구는 단지 나를 칭찬하거나 비난하거나 하지 않고 늘 자신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편견 없는 의견을 나누고 내 존재를 듣는다. 그것이 조력자의 핵심인 듯하다. 나도 나를 포기하지 않듯이 친구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지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통제하거나 의존하는 것이 없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것 같다. 서로에게 잘 보이려 눈치를 보지도 비난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그대로의 모습이 인정이 되는 사이, 뒤돌아서서 그 어떤 찝찝함이나 기분이 상하는 것을 경험하지 않는 사이, 나는 친구의 존재가 자랑스럽다. 나는 종종 나를 포기하고 싶었고, 회의에 가득 찼고, 투덜거리고, 힘들어했지만, 친구는 한결같이 동정도 하지 않고, 동조도 하지 않고, 눈치도 보지 않고, 그저 그 자신으로써 자기 얘기를 함으로써 그 자리에 있었다. 친구는 내가 피곤했을 텐데도 늘 한결같이 먼저 전화를 하고 예술가의 예민한 투덜거림을 인내해주었다.
창작의 고비를 넘기면서 내 안에 무궁무진한 창작의 샘이 다시 차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오늘 특별히 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도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나보다 더 나를 믿어 주었다. 오늘도 친구가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너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어. 그건 사실이니까. 눈에 보이는 거니까. 정말 아니라면 나는 너를 뜯어말렸을 거야. 그 벽도 네가 넘은 거야. 결정은 네가 한 거니까. 너는 아주 잘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해, 그게 뭐든, 그냥 막 해!"
나는 그래서 오늘도 힘차게 하루에 시동을 건다. 내 손끝에서, 몸에서, 무한한 창작의 실타래가 넘실대며 나오는 것을 느낀다. 예술가에게는 특히나 늘 한결같이 옆에서 지켜봐 주는, 그냥 그대로 있어주는 단 한 명의 친구가 큰 성의 성곽보다 더 든든하게 다가온다. 친구는 본인은 무신론자라고 반박하지만, 나는 친구가 하늘에서 내게 보내 준 천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