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오고 가야 맛이고, 회화 수업은 시끄러워야 맛이다.
자기를 드러내면 손해를 보는 사회라 하지만, 나는 이것저것 감추고 속내를 모르겠는 음흉한 사람은 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위험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특히 일방적 강의가 아닌 상호 교감을 필요로 하는 외국어나 창의 수업에 있어서 수동적으로 떠먹여 주는 것만 받겠다는 태도로 일관된 학습자를 만나면 그 수업은 최악의 시간이 된다. 기본적으로 어떤 수업을 듣겠다고 오는 사람은 그 목적에 부합하는 태도로 그 수업에 임해야 한다. 언어를 학습하겠다고 와서는 입을 꾹 닫고 알아서 하라는 태도는 가르치는 이를 난감하게 한다. 안 그래도 얼굴이 다 보여도 그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참여자들이 마스크까지 끼고 조용히 수업을 리드하는 사람만 바라보고 있는 환경은 가히 절망적이다. 무엇을 해보라고 하면 해보려는 노력을 하는 게 최소한의 수업에 대한 예의인데 다들 얼음장처럼 가만히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그치면 다그칠수록 마치 내 말에 프레온가스가 달린 것처럼 사람들은 더 침묵의 블랙홀로 빠져든다.
나는 수줍어서라고 하는 말도 대부분 믿지 않는다. 사람들이 수줍어할 만큼 여리고 상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흉한 내숭이다. 밖에 나가면 삭막한 세상에서 용감하게 실속 다 차리고 사는 사람들 아니던가. 수줍은 척 눈치를 보며 주변의 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주변부터 살피는 태도는 자존감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는 자신을 드러내는 게 거의 공포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어서 그냥 조용히 있도록 해달라고 별도로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표현은 평소에 하는 것이지 모아 놓았다가 어느 때가 되면 짠하고 되는 것이 아닌데, 말하기 시간에 가만히 있으면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반응 없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속이 탄다. 일부 사람들은 움찔움찔하며 뭔가를 하려는 욕구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내 주변의 목석같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다 같이 목석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뭐 그리 살면서 숨길 게 많은지 모르겠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을 안에 두고 사는지 조심스럽게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팝송으로 영어를 배우겠다고 해서 노래를 틀으면 열심히 반복해서 노래를 하는 건 화면 속 유튜브 가수들이고, 다들 마스크 뒤에 숨어 음악 감상, 혹은 명상을 하는 태도로 앉아 있다. 아마 머릿속에 입이 또 하나 달려 있어서 거기에서 열심히 되뇌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닦달도 하고 일부러 푼수가 되어보기도 하고 별짓을 다했는데 이젠 포기했다. 그러면 오히려 수업은 수월하다. 다들 조용히 있다가 한 것도 없는데, 끝날 때가 되면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강의장을 나간다. 나도 한 마디 건네고 홀가분하게 강의장을 나온다.
"다들 조용한 회화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Thank you for the very quiet English-speaking class)"
내가 오늘 하지 않은 말 한마디는 말을 못 하는 장애인이 그렇게도 평생 하고 싶었던 한마디일지도 모른다. 말할 수 있다는 것, 표현할 수 있다는 것,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것, 걸을 수 있다는 것, 그런 모든 것은 축복이고 대단한 것이다. 그거 아껴서 뭐하려고 다들 있는 것도 활용을 안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세상을 맘껏 걷고,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움직이며 표현하고 삶을 노래하고 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