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가의 작업실에서

by 이영선

오늘 멀리 타 도시에 사는 한 원로 화가의 작업실에 다녀오게 되었다. 나는 그 화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그저 운전기사로 드라이브 겸 지인과 동행한 것이었다. 화가는 노쇠해서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작업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양보호사가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청소와 주변정리를 도와준다고 했다. 무수히 많은 그림들이 벽면과 베란다 공간에 쌓여있었다. 그의 그림들은 대부분 비슷한 색감과 소재로 그려져 있었다.


많은 화가들이 하나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사과로 유명해진 사람은 평생 사과만 그리고, 해바라기로 유명해진 사람은 평생 해바라기만 그리는 식이다. 나는 세상에 널려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 성향의 작가는 아니지만, 작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해서 행복하다면 평생 바나나 한 송이만 그리든, 배추 한 포기만 그리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만 그리는 작가들은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가 쉬운 장점이 있긴 하다. 그런데 나는 하나만 그리는 그림을 보면 이런 대화가 떠오른다. 물론 절대로 이를 희화하려는 의도는 없고, 그냥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표현하는 것뿐이다;


나 사과야.

-뭐?

나 사과라고!

-알았어.

나 사과인데?

-네.

나야 나, 사과!

-알고 있어.

나 좀 봐, 나 사과야, 이뻐?

-응, 그래.

나 사과지롱!

-알았어!

나 사과, 사과, 사과, 사과야!

-알았다고!

나 또 사과야! 놀러 왔어!

-알았어, 잘 놀다가!

나 사과처럼 생겼어?

-그래, 너 사과야!

어? 나 사과네?

-그래, 알았다고, 뭐 어쩌라고, 너 사과야, 알아 들었다고, 그만해! 어제도 오늘도 그제도 사과였어. 내일도 사과일 거야. 절대로 넌 감자도 바나나도 아니야. 그런데, 너 사과 맞아? 다른 거 먹고 싶어. 어 쟤도 사과네? 너 닮은 애 옆집에서도 봤어! 나 사과 싫어! 안 먹어! 메롱!

(계속 떠오르는 걸 쓰고 싶은 욕구를 잠시 억제하기로 한다.)


가끔 궁금하긴 하다. 정말 같은 걸 평생 그릴 때 행복한지, 매번 새로운지, 아니면 그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리는지, 사과가 무섭게 구는지, 집착인지, 사람들이 원하니까, 아니면 돈이 되니까 안 행복하고 하나도 재미없는데 계속하는 건지, 아니면 사과 말고 그릴 수 있는 게 없어서 그것만 그리는 건지. 문제는 사과 바이러스가 생겨서 옆집, 뒷집, 문화센터, 어린이집에도 죄다 비슷한 사과 그림들이 등장해서 누구 사과가 진짜인지 온 동네가 사과 밭이 되는 것이 좀 그렇긴 하다. (스타일이 깊어지면 바나나를 그리든, 알밤을 그리든, 그 무엇을 그리고 만들어도 결국은 작품이 작가의 고유성을 나타내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꼭 하나의 소재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바이러스는 해외로도 퍼져서 해외에서 그려진 사과 그림이 국내로 들어오기도 한다.


아, 나는 지금 사과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튼 원조가 어느 것인지 모르는 사과들이 온통 유행인 건 맞다. 사과는 맛있고 예쁘다. 맛있으면 바나나...... 아, 정신 차리자. 나는 지금 사과나 바나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과 농사를 짓는 것보다, 사과 한 개를 그리는 것이 돈이 되는 세상이긴 하다. '전원일기'의 회장님 댁 둘째 아들이 사과농사 돈이 안된다고 울분을 토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아, 지금 사과나, '전원일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신 차리자!


어쨌든 같이 간 지인이 화가의 작품을 죄다 사고 싶어 해서 차에 실릴 만큼 죄다 사 왔다. 그런데 내 그림도 아닌데, 왠지 나는 슬펐다. 화가에게 그림 작품이란 무엇일까? 나는 나의 창작품이 자식과도 같다. 작품은 그가 팔았는데, 나는 그의 작품이 놓여있던 빈 벽을 보며 내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화가에게"저 쪽에 쌓아둔 그림들을 벽에 죄다 걸어 드리고 갈까요?"라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다.


두 번째 씁쓸했던 느낌은 그림의 가격 때문이었다. 아무리 허접하고 못나게 그린 작품이라도 나는 내가 끄적거린 작은 종이 한 장도 버리려면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아주 '쿨하게' 그의 작품을 내가 상상하던 것과 동떨어진 가격에 죄다 동행한 지인에게 팔아 버렸다. 임금으로 치면 경력직 직원에게 최저시급을 주고 일을 시킨 것이다. 나는 최대한 그의 작품에 경의를 표하려고 미리 준비해 간 흰 장갑을 끼고 아주 소중하게 차에 작품을 실었다. 나도 예술가로서 작품이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도 예술가인 걸 밝히자, 그림 하나를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나는 몇 번이나 그래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매우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말 마음이 아팠다. 한편으로는 그가 선물한 그 작품이 그의 마음에 가장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했다. 물론 내 생각이다. 하지만 나라면 그랬을 것 같다. 나는 내 작품을 알아봐 준 이를 만나면, 그가 이미 그 값을 치른 셈이 된다. 나는 매사에 사람들이 돈보다는 내게 마음과 영혼을 내어주는 것이 더 좋다. 그게 더 값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품을 돈으로 환산하는 이에게는 돈으로 화답하지만, 작품이 마음이고 과정이고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이에게는 돈이 아닌 나의 마음을 작품이라는 껍데기에 포장해서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헐값으로 내 작품을 사는 사람은 내 마음은 가져가지 못하지만, 내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내 영혼이 전달되는 것이다. 적어도 나의 세계에서 셈법은 그렇다. 그래서 나는 현실 세계의 수학을 잘 못한다. 철학의 이해가 없이 기호만 나열된 현실의 수학은 멍청한 껍데기처럼 느껴진다.


주변에 작가들을 많이 만나봐서 작가가 작품을 파는 것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어려운지 알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생활고가 심해도 어느 일정 금액 이하로는 절대 작품을 내놓지 않는 이름 없는 작가들도 많이 알고 있다. 작가는 소위 자기만의 '똥'자존심이 있다. 하긴 누구나 자신이 부여한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가 있기는 하다. 나는 대단히 알려진 작가가 아닐지라도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종이 한 장도 절대로 아무에게나 마구 팔고 싶지는 않다. 거기에는 내 영혼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국내 미술시장이 커졌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를 하듯이 특정 작품을 사는 것이지, 정말로 작품이 좋아서 사는 경우는 많이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좋은가가 아니라, '그 작품이 돈이 될까?' 혹은, '빨리 돈이 되려면 곧 죽을 것 같은 유명 작가를 찾아야겠지?'가 더 우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품에 담긴 마음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작품을 사면서 '작품보증서'이니 '경력서'이니 그런 서류를 요구한다. 그런 것이 작품을 보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단순해서 어이가 없을 때가 많다. 그런 걸 요구해야 있어 보인다고 누군가가 말해줬을 것 같다. 내가 봤을 때, 한국에서 미술시장이 커졌다는 말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농산품이 비싸졌다고 농부들이 모두 부자가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커졌다는 미술시장이 사실은 미술로부터 사람들을 더 동떨어지게 예술을 왜곡하고 있다고 느낀다. 커진 미술시장만큼 사람들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인식이 그리 많이 깊어진 것처럼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견해이고, 나도 현실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주변에서 평범하게 열심히 살아온 많은 화가들을 접하고 내가 몇 십 년간 경험하고 느꼈던 것은 그저 아주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 한 점도 못 팔고, 작업을 지속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천만 원에 예술이 거래되고, 전시회를 몇 번 초청받았다는 그런 예술가는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는지 나와 내 주변 예술가들은 모른다. 그들의 얘기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들도 나름 일류 대학을 나오고, 그곳에서 가르치고, 예술의 판에서 오랫동안 배회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도 각각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 훌륭한 작품들이다. 그렇지만 늘 진행되는 대화는 "예술가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되는 거예요?"가 주된 내용을 이룬다. 그래서 이렇게 예상 밖의 가격으로도 누군가가 찾아와서 작품을 몽땅 사간다면, 기꺼이 내어주기도 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나는 운전 중에 가끔 창을 조금 열어서 차창 밖의 공기를 쐬면서, '내 그림도 아닌데 내가 왜 그 화가에게 빙의가 돼서 내 마음이 속상하지?'라고 생각하며 싱숭생숭한 마음을 털어내려고 해 보았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마치 많은 예술가들의 뒷모습인 것 같아 자꾸만 마음이 무겁게 내리 앉았다. 나는 지인에게 내가 그 화가라면 쫓아와서 다시 내 그림을 죄다 뺏어갈 거라고 했다. 그래서 빨리 달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 다시 요즘 유행하는 '전원일기' 속의 일용네로 가보자. 이들은 늘 농사가 얼마나 어렵고 돈이 안되는지 투덜거린다. 하지만 농사일을 놓지 못한다. 회장님(최불암)은 늘 그래도 농사가 소중하고 농사꾼이 있어야 한다며 땅을 소중이 여긴다. 소비자 가격이 올라가고 유통마진이 올라가면서 정작 농사꾼에게는 이문도 남지 않는 가격으로 키운 야채를 떠넘겨야 했을 때, 억척스러운 일용이의 처는 밭을 갈아엎어도 그렇게 팔지 않을 거라 씩씩대며 유통업자와 실랑이를 한다. 자식의 신발을 사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남편 몰래 고추를 팔러 시장에 간 회장님 댁 '용식엄니(김혜자)'는 자식처럼 길러서 말린 고추의 품질을 낮게 비하하고 의심하는 행인들에게 헐값으로라도 고추를 다 팔아넘긴다. 나는 이들의 마음이 예술가들의 마음, 그리고 예술 시장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농사를 짓거나 예술을 하는 마음은 시장의 논리와는 조금 다르다. 예술시장도 농사짓는 사람 따로 있고 돈놀이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전원일기'의 농작물 유통구조와 조금 비슷하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농작물은 금세 시들지만, 예술품은 부동산처럼 사람들을 거치면서 유통마진이 자꾸 붙어서 가격이 불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유통 구조를 많이 거칠수록 돈은 불어나지만, 나는 그게 좀 이상하고 우습다고 생각된다. 예술가는 죽을 고생을 하고 가난하게 죽어서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그 작품이 왜 좋은지, 또는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으면서 엉뚱한 사람들이 돈의 숫자만 계산하고 있는 게 몹시도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내가 고흐라면, 그리고 신이 고흐에게 하루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부활의 기회를 준다면, 나는 어리둥절한 눈을 하고 "야, 너네 내 그림들 가지고 뭐 하니? 내 그림들이 왜 이렇게 비싸졌니? 너희가 내 그림을 알아? 내가 귀까지 잘라가며 죽을 고생을 하며 삶을 녹여 작품을 그려냈는데, 너네 나 살았을 때 물감 하나, 밥 한 끼라도 사줘 본 적 있니? 너네, 되게 웃겨! 그거 내 삶의 즙이 말라빠진 껍데기야. 그거 가지고 놀지 말고 내 그림 다 내놔! (고흐는 모든 사람보다 나이가 많으니, 반말을 썼다. 회장 할아버지도 고흐 앞에서는 까마득한 어린애뻘이니까 말이다)"라고 그림을 다 뺏어서 무덤으로 들어갈 것 같다. 물론 고흐의 생각은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화가 날 것 같다.


아무튼 여러 생각이 들어서 괜히 나 혼자 마음이 울적해하고 있는데 지인이 갑자기 옆 좌석에서 졸다가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내가 받은 그림 선물이 탐이 나는지 다른 그림을 산 값을 똑같이 쳐서 돈을 줄 테니 내게 선물 받은 그 그림을 팔라고 했다. 그에게 그림은 예술이라기보다 캔버스의 규격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상품과 같은 존재였다. 나한테는 크기가 같은 캔버스에 담긴 영혼의 무게가 다 달리 느껴졌는데 말이다. 나는 이제 이건 가장 비싼 그림이 되어서 그 값에는 팔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림에는 스토리도 마음의 오고 감도 들어있는 몇 시간 전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값이 같을 수 있을까? 세상 사람의 셈으로는 그게 맞겠지만, 나의 세계에서 이 그림의 값은 그가 산 다른 그림과 이미 달라진 가치를 가진 그림이었다. 내가 받은 선물 그림은 'Priceless'가 되어 버렸다. '마음을 어떻게 팔아?'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같이 간 지인은 농산물 유통업자와 같다. 그래도 좋은 유통업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도 없었으면 이 작가의 그림은 찾는 이가 없었을 것이다. 유통업자가 있어야 땅끝에서 나는 농산물이 도시의 아파트까지 쉽게 오듯이 그림 유통업자들은 작품이 어디선가 파묻혀 시들기 전에 구매자에게 이를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인이 말하길, 대부분의 화가는 그림만 그려서 세상 돌아가는 다른 건 잘 모른다고 했다.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렇다고도 했다. 예술가가 저렇게라도 작품을 판매하는 것은 은퇴도 한 시점에서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가격이 너무 높으면, 사람들이 그림을 거의 구매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그림을 파는 것이 작가에게도 좋은 일이기 때문에 작가가 흔쾌히 작품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지인은 그림을 저렴하게 사서 좋고, 화가는 세상에 그림이 알려지면서 유통이 되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기분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그림이 많은 이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 주고,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조금이나마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인은 다음 주에도 가서 나머지 그림을 몽땅 사가지고 올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그의 작품이 내 취향의 작품은 아니지만, 그 작품을 그린 사람을 보았기 때문에 작품이 가진 진정성에 대해서는 신뢰한다고 말했다. 나에게 작품의 본질은 그것을 그린 사람이다. 사람이 우선이고 작품은 그 사람을 대변하는 것일 뿐이다. 작품의 취향은 주관적이라 비교나 평가의 대상이 아니지만, 그 사람의 작품에 임하는 진정성과 삶의 과정은 작품의 본질이기 때문에,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려면 그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다. 진정성은 도덕성이나 옳고 그름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작품에 담긴 그의 태도, 생각, 삶에 대한 과정, 나는 그것이 진정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런 삶을 살아서 현재의 노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도 취향과 스타일 너머에 있는 나의 존재를 알아봤다. 그러면 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지인에게 그가 예술가들에게 아주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작가에게는 절대로 가격을 흥정하거나 덤으로 달라는 식의 요구는 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정말 슬픈 가격에 작품을 내어준 작가에게 빵이라도 사서 방문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아무튼 예술가로서 마음이 조금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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