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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늪, 고라니 대신 사람

문제를 벗어나서 문제를 바라보기

by 이영선

겨울에 얼어있는 늪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벌써 2월에 되자마자 봄이 와버렸다.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얼어있는 늪을 볼 것 같다. 그런데 녹아버린 늪 그마저도 보고 싶었다. 어딘가에 살짝 얼어있는 얼음이 있지 않을까. 늪 관리실에 전화를 해보니 얼음은 녹았지만 그래서 새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얼음이 얼면 새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왜 그 늪에 다시 가는지 모르겠지만, 그 늪은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멀리서 늪이 자꾸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무작정 길을 나섰다. 내가 보고 싶은 건 얼음이었지만, 새들이 있는 동안 새를 다시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누렇고 앙상한 겨울 풍경을 가장 싫어한다. 하지만 이 늪은 뭔가 다른 이야기가 숨겨있을 것 같았다. 나는 주중이라 거의 인적 없는 늪을 자유롭게 거닐었다. 이곳의 겨울도 앙상하긴 이를 데 없었지만,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자연의 다양한 선들을 드러내며 있는 나무와 풀의 풍경을 한껏 즐길 수 있었다. 그래도 어쩐지 풍경에서 화려함을 벗어던진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늘 보던 커다란 나무 옆에 섰다. 앞에 있던 웅덩이의 물은 많이 말라있었다. 그리고 나무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정말로 나무가 내 얘기를 듣는 것처럼 온갖 것들을 혼자 주절거렸다. 툴툴대기도 하다가 이야기도 하다가 나중에 다시 오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몰라서 인사를 하려는 거니까 다음에 나를 보면 꼭 기억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이 없어서 혼자 노래도 불렀다. 나무도 많이 심심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말라있고 차갑게 온기가 없지만 생명이 그 안에 있는 한 늪은 다시 봄을 맞이해서 겨울을 잊은 듯이 초록잎을 틔울 것이다. 인생에도 타이밍이 있는 것 같다. 늘 숲이 울창한 아열대 기후라면 좋겠지만, 적어도 내 인생은 혹한기만 있는 북극은 아니었지 않나 싶다. 나의 때가 겨울이라도 겨울 다음에는 다시 봄이 오니까 말이다.


나무들은 모두 조금씩 모양을 바꾸고 서 있었다. 새삼스럽진 않다. 자연이니까 말이다. 자연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러진 것과 죽은 것들도 그저 자연으로 받아들이면 아무것도 아니다. 꺾일 때가 있고 숨을 죽일 때가 있고 피어나 만발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미 만발했던 봄을 여러 번 겪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갈 것은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다음에 올 생명이 자리를 잡을 것이다.


우포가 조금씩 지겨워지는 듯하다. 당분간 오지 않을 각오로 구석구석 우포를 거닐다가 처음 장소로 되돌아왔다. 늘 혼자였던 장소에 누군가 미리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를 지나쳐 가려는데 낯이 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우포에서 유명한 사진작가였다. 그의 사진과, 인터뷰, 책을 통해 이미 나는 그를 아는 것처럼 느껴져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당연히 그는 뜬금없다고 느꼈을 테지만 이내 연락처를 주고받고 싸인 대신 그의 사진 한 장을 흔쾌히 남겨 왔다.


10년쯤 되었을 때라고 했던가. 그가 그곳을 떠나려고 했을 때, 다시 머물게 된 순간을 경험하게 된 것이 말이다. 그때까지 그의 기분이 어땠을까 상상하며 그 길을 올라왔는데, 그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그때 고라니를 만났다고 했는데, 나는 고라니가 아닌 사람을 만났다. 나는 우포에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 점 안에 그가 있었다. 그에 비하면 우포에 온 것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횟수로는 미미하겠지만, 주중에 이 넓은 곳에서 누군가를 우연히 마주칠 확률은 없을 거라고 종종 생각했다. 그래서 자유로웠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우포는 내 인생의 문제를 만날 때 상황을 밖에서 볼 수 있게 하는 곳이다. 매번 이곳은 나에게 한 문장의 답을 던져준다. 결국 나는 앞으로도 다시 우포에 가기로 했다. 끝점인 줄 알고 간 자리가 시작점이 되었다. 우포는 왠지 끝나지 않은 이야기와 끝나지 않은 인연 같았다. 왜 그런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지금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내가 들어가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지점들이 몇 개 있다. 아직은 아무 구체적인 대안이 없지만, 왠지 언젠가 때가 되면 나는 그곳에서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다. 한 예술가의 삶이나 작품이 본인은 가만히 있어도 다른 이에게 어떤 긍정적 구실을 제공한다면, 그게 바로 예술 혹은 예술가의 힘일 것이다. 여행의 끝에 그 작가가 그 자리에 앉아있던 것이, 나에게는 하늘이 내게 준 대답처럼 느껴졌다.


나보다 오래 살 것 같았던 뻥 뚫린 나무는 1년 새 반으로 쪼개져 중환자실에 있는 부상병의 모습으로 겨우 그곳에 있었는데, 다음에 갈 때 내 투덜거림을 받아준 나무는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우포야 안녕! 다음엔 내가 춤을 춰 줄 테니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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